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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Oct 11. 2022

카메라(여행 사진)

사물의 우연 : 네 번째 서랍 - 여행

여행 기록 도구-카메라     

카메라는 여행을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다. 추억을 담는 도구다. 여행 사진엔 여행의 추억이 담겨야지 기록이나 기억이 담겨선 안 된다. 추억은 마음으로 만 저장 가능한 것이기에 사진과 달리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여행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겠다는 강박은 관료적이다.

여행이 한 인간의 역사적 행위, 즉 자서전적 행위라면 기록되는 게 맞다. 공무원들이 기록에 집착하는 것은 일의 책임을 확실하게 해 놓기 위함임과 동시에 본인의 치적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필자가 한 국가행사의 백서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받은 서류의 양이 종이 사과박스로 다섯 박스였다. 그 기록의 시시콜콜함이 실록과 견줄 만했다.     


대부분의 여행 사진이 기록의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이른바 본전을 뽑아야겠다는 강박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여행의 기록은 여행의 결과물이자 돈값의 상징이자, 여행을 할 것이고 하고 있고 했음을 불특정 다수에게 알리는 치적 쌓기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전지에 붙어 있던 사진들

불행히도 디지털카메라, 그리고 스마트 폰 카메라의 등장으로 그 기록조차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소풍이나 MT를 갔다 온 후 그곳에서 찍힌 사진을 출력해서 커다란 전지에 부착해 찾을 사람의 이름을 적게 한 것은 추억의 작은 조각이라도 붙잡아 나누고 싶다는 안타까움의 발로였다. 그래서 자신이 나온 사진을 한 장 한 장 봐야 했고 그 곁에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함께 찍혔는지도 꼼꼼히 살펴야 했다.


그 시절의 사진은 바르트가 얘기했던 것처럼 푼크툼의 날카로움, 스투디움의 기록과 기억, 그리고 사진 스스로 바래지면서도 붙잡고 있는 추억의 환영이었다. 예전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대청마루 높이 걸려 있던 빛바랜 가족사진의 어지러운 조합이, 반 친구 모두가 들어가 있는 사절지에 담긴 사진이 사진의 본질이다.      


이젠 그런 사진의 본질은 없어졌다. 바르트가 말했던 관객, 작가, 유령의 요소는 다 사라졌다. 관객은 너무 많아졌고,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으며 유령은 디지털로 불사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 선명한 유령이란.     


관광 입간판의 완성

우리가 지금, 여행지에 찍는 것은 무엇일까? 장대한 풍경? 랜드마크? 관광 스폿? 그리고 그 앞에서 있는 사람? 여행 사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멍 뚫린 입간판이다. 왜 무슨 동물이나 사람 모양을 해놓고선 얼굴 위치에 구멍만 뚫어놓은 것 있지 않나? 우린 그 유치한 짓을 왜 하는 걸까? 그것은 그 관광지의 상징물이다. 다른 곳에서 사진을 안 찍고 그곳에서만 찍어도 우린 여행자와 여행지의 상징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사진 속에서 여행자는 주체를 보여주는 대신 여행지의 상징으로 기꺼이 변신한다. 여행지 상징의 한 요소가 되는 여행자. 여행자는 없어지고 스폿을 떠도는 관광객만 남는다.      


여행자와 관광객의 차이는 뭘까? 우린 여행자일까 관광객일까? 영어로 여행자는 트래블러다. 관광객은 투어리스트고. 관광버스는 당연히 투어리스트 버스다. 트래블러 버스란 단어는 없다. 관광 산업, 즉 투어리스트 인더스트리라는 단어는 있어도 트래블러 인더스트리라는 단어는 없다. 즉 투어리스트는 인격 없는, 주체 없는 덩어리다. 반면 여행자는 그 동선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그야말로 나그네다.      


우리의 여행의 대부분은 관광객으로 시작해서 관광객으로 끝난다. 우리가 나그네, 즉 트래블러가 될 수 없는 것은 태생적으로 여행이 산업화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광객의 카메라에 담기는 건 산업 화 된 관광지와 관광객으로서의 자신이다. 산업화된 모든 것은 성과를 원하고, 그 안에 참여한 모든 주체들은 성과 주체이기에 더 많이 기록하는 사람이 관광의 본전을 뽑는다. 본전의 환산 척도는 사진, 그리고 기념품 밖에 없다. 결국 관광객의 카메라가 기억하거나 추억의 도구가 아니라 기록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투어리스트 어트랙션  

이 관광 산업의 성과 주체, 즉 관광객을 위해 개발된 것이 관광명소다. 영어로는 투어리스트 어트랙션이다. 디즈니월드가 떠오르겠지만 알고 보면 우리나라도 이 관광 명소의 나라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관광지 말이다. 대표적인 것이 용인 민속촌과 경주 보문 호수, 대전 엑스포 공원 같은 곳이다. 그리고 이천 년 대 들어서 우후죽순 들어선 영화와 드라마 촬영 세트장도 이런 관광명소다.      


이런 관광명소의 원조는 당연히 미국이다. 디즈니월드와 랜드를 필두로 말이다. 일본의 하우스텐보스, 유니버설 스튜디오, 건담이 버티고 서 있는 도쿄의 오다이바 같은 곳도 관광명소다. 이런 곳엔 뿌리가 없다. 역사도 없고 스토리도 없다. 그것들은 일상에선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들을 현실로 소환해서 환상을 제공한다. 관광객들은 그 관광명소에서 자신의 이성과 시선을 스스로 해체하는 산만한 존재가 된다. 어트랙션이 주체를 디스트랙션(distraction)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트랙션의 목적이 바로 이것일지도.     


그래서 놀이공원과 관광 명소에서의 사진에 주체는 없다. 관광객만 있을 뿐이다. 관광산업의 중흥을 위해 동원된 존재. 물론 모든 여행자가 문화인류학자의 시선으로 여행을 할 수는 없다. 또는 건축학자나 도예가, 로케이션 매니저처럼 여행할 수도 없을 것이다. 모든 여행자가 박물관이나 유적을 찾아 헤맬 수도 없고. 그렇다. 우린 애초에 관광객으로서, 아니 근본적으로 관광객은 차별화된 시선을, 그러니까 건축학자의 시선이나 도예가의 시선, 로케이션 매니저의 시선으로 낯선 도시를 볼 수 없다. 우리, 관광객의 시선은 관광 명소 루트를 따라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 없는 자유 여행

자유 여행조차 시선은 세팅된다. 출발하기 전부터 가야 할 곳, 보아야 할 곳은 정해져 있고 그에 따라 당연하게도 캐리어는 꾸려졌다. 카메라의 시선은 그곳에 맞게 설정됐고 어떤 곳에서 삼각대를 써야 할지 정해졌다. 그렇다. 관광과 여행은 이제 한 편의 진부한 상업 영화다. 예술 영화의 낯섦은 부재하고 장르의 클리셰만 반복되는.     


이 동일 여행의 반복 속에서 다른 사진을 건지기 위해 우린 기꺼이 그 입간판 뒤편으로 들어가 얼굴을 내민다. 관광 명소에 가서 셔터를 누른다. 모든 관광명소가 다른 관광 명소와 차별화되기 위해 그 입간판을 설치해뒀다. 관광객의 얼굴은 그 입간판 안에 갇혀 있다. 모든 관광지가 약속한 입간판.     


관광객에겐 그래서, 이동 중엔 경로 이탈과 산만함이 허락되지 않는다. 관광객은 내려야 할 곳에서만 내리고 카메라는 목적 있는 곳에서만 작동된다. 충동도, 마음 가는 데로라는 말도 부재한다. 그것은 구름 가는 데로 가는 나그네, 트래블러의 것이다.     


이 목적 지향적인 움직임이 동일한 사진들을 만들어 낸다. 다른 모든 곳에서 모두 같은 사진을 찍는다. 포즈와 표정 모두 같은. 이 동일성을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지만 두 명 이상 함께 여행 가면 이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둘 이상 가면 우린 표현의 안전지대, 비무장지대, 타협점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난 수십 년간 비슷한 신혼여행사진이 탄생했고, 단체 관광 사진이 탄생했으며 마카오의 그 쓰러질 듯 서 있는 성당의 전면 계단 앞에서의 사진들이 탄생했으며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성 가족 성당의 전경이 다 담기도록 본인은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처럼 나오는 사진을 찍어온 것이다.     


그나마 혼자 떠난 여행자의 사진이라면 관광하는 객과 함께 나그네의 편린이 존재한다. 자신이 보는 걸 찍고, 먹은 걸 찍고 걸어가는 길을 찍는다. 그 개인적 충동으로 인해 나그네의 여정의 짧게나마 기록되고 불확실한 멈춤과 이동이라는 불안한 여정이 기록된다.     


다르게, 또는 다른 곳

관광 소비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카메라의 렌즈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보도사진의 객관적 시각이 아니라 방랑자, 나그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 시선을 통해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의 쓸쓸함과 막연함, 알 수 없는 여정, 미래의 불안함, 그리고 어디에도 머물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담겨야 한다. 그것이 여행자의 카메라에 담겨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대부분 이 불안은 감당할 수 없기에 그 불안이 담긴, 그런 책을 산다. 불안한 시선이 세련된 상품을 생산한다. 여행 에세이들이 세련 되게 느껴지는 건 뻔 한 곳에서 찍힌 관광객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책에는 꼭 봐야 할 그곳, 즉 관광 명소가 명소로만 담겨 있다. 명소는 앞서 말했듯이 영어로 Attraction이다. 여기에 투어리스트가 붙으면 관광 명소가 되는 것이다. 그 어떤 매력적인 장소도 관광객의 시선으로만 보면 관광 명소가 되고, 결국 나만의 매력적 장소, 사적인 매력이 부재한 장소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 애초에 어트랙티브 하다는 건 보편적일 수 없고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그 명소가 매력적이라고 판단한 관광 회사, 지방자치단체, 심지어 국가에 의해 개발되어서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한 관광명소가 되기 시작하면 그 장소는 연예인이 되어 버린다. 스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앞에 국민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의 연예인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험난한 계곡, 다다를 수 없는 봉우리에 계단을 놓고,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으면서 절대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없었던, 그러나 매력적인 장소들이 모두의 것이 되어 버린다. 모두가 다다라서 만질 수 있는 것들은 사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여행 에세이를 읽는 이유

여행 에세이들은 이 점을 간파하고 있다. 모두가 갈 수 있는 곳의 다른 모퉁이를 찾아 담는다. 모두가 정면에 사진을 찍을 때 옆이나 뒷면에서 사진을 찍는다. 모두가 사람을 가운데 놓고 성당이나 오래된 건물을 담는 사진을 찍을 때, 여행 에세이 작가들의 사진 속에선 사람은 무심히 지나가고 그 명소들은 그 사람을 굽어보는, 사람에게 관심 없는 무심한 곳으로 설정된다. 사람도 그곳에 관심 없고, 그곳도 사람에게 관심 없는 익명의 건축물로 낯설게 전환시킨다.     


그 전환이 가능한 것은 관광객이 보는 시선으로 관광 명소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여행 작가의 시선은 관광객의 시선이 아니라 방랑자, 나그네의 시선이고 모든 관광객들은 여행 작가의 책과 사진을 보며 그 장소에 끌려 다가가 관광명소의 관광객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시선의 문제인데, 앞서 말했듯이 관광객의 시선은 필연적으로 지불한 돈의 효과를 쟁취해야만 하는 자본주의가 낳은 촉박하고 조급한 소비자 시선이다. 그들은 같은 돈으로 최대한 많은 장소를 가야 하며 그 장소들은 모두가 아는 최대한 유명한 장소여야 한다. 그래서 낯선 장소, 모르는 장소는 나그네와 탐험가의 몫이다. 위험을 감수하며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자의 훈장이다.     


결국 여행이 관광이 되는 건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관광에 드는 돈이 비용으로 환산되면 그것은 결과를 내야 한다. 그러나 여행은 투자다. 언제 회수될지 모르지만 평생을 지탱할 수 있는 추억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임어당이 말한 것처럼 여행의 본질은 방랑에 있고, 훌륭한 여행자는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즉 모든 여행자는 필연적으로 방랑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임어당이 말한 것처럼 여행을 한다는 것은 방랑하는 것이고 방랑이 아닌 것은 여행이 아닌 것이다.      


트래블과 투어 사이에서

그러나 관광이 방랑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것이 순회하는 것, 도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 travel은 불어 Travil에서 파생됐다. 알다시피 이건 수고, 고행, 노고라는 뜻이다. 즉 이건 무사귀환이 불확실한 성직자나 신자들의 순례를 의미한다. 반면 Tour는 라틴어 Tornus에서 유래했다. 이건 돌다, 순회하다의 뜻이다. 이것은 무사히 돌아옴이 당연한 이동을 말한다. 즉 거리상으로도, 목적상으로도, 그리고 일상과의 유리된 의미적으로도 관광은 상품화되기 좋은 수준의 떠남이다.     


관광 상품은 결국 안전한 곳, 문명화된 곳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고 관광객은 그 서클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관광 스폿, 즉 점들을 최대한 많이 찍고 와야 소위 본전을 뽑을 수 있다. 무한한 점들의 기록은 카메라와 기념품이 담당한다.      


아날로그 카메라일 때는 이 점들의 숫자는 유한했다. 한정적이었다. 필름도 한정적이었고 찍어도 잘 나온 사진 건지는 게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디지털카메라의 등장 이후 이 점들의 기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DSLR과 미러리스의 등장으로 실패하는 사진은 사라졌으며, 스마트 폰 카메라의 품질이 높아지면서 관광의 모든 순간이 기록된다. 그래서 관광 입간판은 관광 명소뿐만 아니라 식당, 휴게소, 철도역, 버스터미널 같은 곳에도 설치됐으며 그와 함께 관광객은 그 여정을 기록하는 서기로 전락하게 됐다.     


기록자에서, 진정한 여행자로

관광객이 서기라면 펜 대신 카메라로 기록하는 건 누구를 위한 걸까? 서기나 왕실의 사관이나 승정원의 역할을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 왕은 도대체 누구인가? 카메라에 담긴 관광객과 관광 명소가 담긴 사진을 보는 사람이 그 사진의 주인이 된다. 즉 왕실의 기록이 왕실과 기록자, 양자의 것이 아니듯 관광객의 사진 또한 찍힌 자신의 것도 찍은 자신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관광지의 기록이고 그것을 궁금해하고 비교하고 싶어 하는 타자의 것이다. 그래서 우리, 관광객의 기록은 타자를 위한 것이다.      


사관이나 승정원이 기록만 할 뿐 왕과 대신들의 담론과 일상에 참여하지는 못하듯이 관광객은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서 정작 여행이라는 낯선 경험은 박탈된다. 그의 시선은 렌즈와 액정 화면으로 한정되어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도, 그랜드 캐년 앞에서도 그가 눈으로 담을 수 있는 장대함 대신 카메라의 것으로 그것을 대신한다. 또 감각 기관으로서의 눈을 포기함과 동시에 해석하고 정서적으로 감동받는 나그네로서의 존재도 상실한다.      


그래서 카메라는 어디를 봐야 할까. 눈이 보는 것을 봐야 한다. 아니 눈이 놓친 작은 것을 봐야 한다. 나그네의 낯선 시선으로, 여행 작가의 시선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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