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 늘 검은색 수영복을 입는 할머니가 있다. 그렇다. 아줌마인지 할머니인지 헛갈리지 않는, 누가 봐도 할머니인 여사님이 있다. 기초반에서 아직도 배영을 배우고 있다.
수영을 시작한 지 몇 달 됐을까? 내가 다시 수영을 시작한 것이 작년 여름이었고, 할머니를 보기 시작한 것이 그 뒤부터라고 해도 최소한 3개월은 넘지 않았을까? 그러나 여전히 할머니는 자유형도, 배영도 잘 못한다.
수영장에서 만나는 두 부류의 할머니
할머니들은 기로에 서 있다. 수영과 아쿠아로빅 사이, 열한 시와 열두 시 사이, 주 5회와 주 3회 사이, 그 양갈래길, 선택의 기로에 있다. 월, 수, 금, 우리 반의 수영이 끝나면 할머니들이 등장한다. 그분들은 수영을 하는 아가씨, 아줌마들과 같거나 비슷한 수영복을 입고 있지만 수영을 하지 않는다. 풀에 들어가지만 그 물속으론 들어가지 않는다.
줄을 맞춰 서서 아쿠아로빅 강사의 진행을 기다린다. 선생님의 지시를 기다리는 초등학생처럼, 나란히, 나란히. 그분들 중 몇몇은 보조 풀장에서 가끔 짧게 수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야말로 잠깐이다. 그분들은 수영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수영을 한지도 오래됐고.
검은색 수영복의 할머니는 아쿠아로빅 할머니들 몇몇 분보다 더 연세가 있어 보인다. 할머니는 다른 젊은 회원과 대화 중에, 원래는 이렇게 나이 먹은 사람은 기초반에 들어오기 쉽지 않은데 어떻게 들어오게 됐다고, 뿌듯함과 고마움이 섞인 표정으로 말하셨다.
그렇게 몇 개월, 앞으로 나가지 않는 몸과 손에 잡히지 않는 물살과 씨름하셨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요즘도 여전히 배영 발차기를 연습하고 있다. 이번에 포기하면 다시는 수영장에 수영을 하러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그걸 뼈저리게 예감하고 있으신 것 같다. 열심히 연습하는 할머니를 볼 때마다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고 아쿠아로빅 하는 할머니가 아니라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는 할머니로 살고 싶다는 열망이 느껴진다.
은퇴의 연속
선수들은 어느 순간 은퇴를 예감한다고 한다. 본인이 본인의 몸을 가장 잘 아니까. 나도 여러 스포츠를 좋아했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나둘씩 접어 왔다. 이 또한 일종의 은퇴라면 은퇴일 것이다. 그렇게 축구와 농구를 그만뒀고 스포츠 클라이밍을 그만뒀다. 마라톤과 장거리 사이클링도 그만뒀다.
내가 수영을 배운 건 마흔이 다 되어서였다. 딸을 낳기 전, 한 2년 정도 열심히 했었다. 아내가 이제는 다치지 않는 운동을 해보라고 해서 하게 됐다. 기초반부터 차근차근 배웠다. 그전까지 물에 뜨는 법도 몰랐고 그 흔한 헤엄도 칠 줄 몰랐다. 당연히 물놀이 같은 것도 안 해봤다. 그야말로 쌩 초보로 수영장에 들어가서 마스터반까지 올라갔다. 딸이 태어난 후, 육아를 위해 그만뒀다.
다시 수영을 시작하고 열심히 하면서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몇 살까지 할 수 있을까? 이 질문 끝에 더 힘든 마스터 A반으로 옮겼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전력을 다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은퇴가 곧 퇴출인 분야
삶의 어떤 부분은 서서히 줄여가거나 슬슬 하면서 계속할 수 있다. 독서나 글쓰기, 달리기, 산책, 강연이나 강의 같은 것이 그런 분야다. 무슨 자문위원이니 고문 같은 것도 나이 들어서 할 수 있다. 일의 분량과 시간을 줄이면 가능하다. 현역이 아니어도 그 분야에서 활동할 수도 있는 분야도 있다. 스포츠 분야의 해설자나 정치 평론가 같은, 그 현업이 끝났거나 현업의 현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도 그 업의 다른 분야에서 명맥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섹스는 아니다. 안 되면 은퇴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것과 아쿠아로빅을 하는 것의 차이처럼, 이제 침실은 섹스를 하는 곳이 아니라 잠만 자는 곳이 된다. 솔직히, 서글프지만, 몸이 안 따라주면, 구질구질하게 약 따위를 먹지 말고 은퇴를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영원히 현역일 것이라는 착각
영원히 현역이리라 착각하고 산다. 많은 청춘남녀들이, 또 내 또래 중년 남성과 여성들이, 그러니까 아줌마, 아저씨, 유부남, 유부녀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산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그러나 할 수 있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다. 게다가 본인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타인이 그 하는 것을 보고 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건 또 다르다. 섹스는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할 수 있다고 인정받는 분야니까.
은퇴가 싫으면 노력을 해야 한다. 아쿠아로빅 할머니 반으로 가기 싫으면 될 때까지 자유형과 배영을 연습해야 한다. 몇 달이 걸릴지 모르지만 수영을 연습하는 동안 수영을 하는 사람으로 사는 거니까. 또 모른다. 올여름쯤? 어쩌면 가을쯤 교정반으로 올라갈지도. 검은색 수영복 할머니에게 배운다. 마음만으로는 현역 생활을 연장할 수 없다. 움직여라.
밑에 글은 섹스와 은퇴에 대한 글들이다.
2023.0211
그 분야엔 해설자가 없다.
요즘 프리미어 리그를 보면 정말로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의 해설을 듣는 재미가 있다. 무슨 말이냐면 예전에는 축구협회 전무나 대학의 노인네 감독(예전에 왜 다들 노인네가 감독이었는지), 전직 대표 감독 영감탱이들이 쓸데없는 장광설로 게임을 망치곤 했다. 그 이후에 신문선이나 이용수 같은 "교수"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너무 많은 지식을 늘어놔서 피곤하게 했다.
그러다 제3세대 해설가들이 등장했다. "열렸어요. 기회예요. 때려야죠."라는 삼단 공격 콤보 멘트로 유명한 박문성 해설위원은 74년생으로 나보다 어리다. 그의 전공은 어이없게도 회계학이다. 그는 축구 전문 잡지 기자출신으로 순수하게 축구에 환장해서 살다 보니 해설자가 되어 버린 사람이다. 스포츠 2.0 축구 팀장을 맡았던 장지현 해설위원도 이와 비슷한 케이스다. 해설 중간중간에 "어우. 네~"라는 추임새를 잘 넣는 이 사람도 나보다 어리다. 서형욱 해설위원은 리버풀 대학교대학원 축구산업 석사를 마친 재원이다. 얼마나 미쳤기에 축구로 석사까지 했겠는가. 이 사람도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
게임을 즐긴 사람이 게임을 해설할 때 신명이 난다. 팬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부분에서 흥분을 한다. 물론 게임을 신성시하는 사람이 해설을 해도 감동을 받는다. 바로 차범근의 해설이다. 차범근은 축구를 했고, 지도하고, 깊이 알고 있는데도 그 모든 걸 팬의 수준에서 말을 한다. 그래서 그의 해설은 담백하다. 마치 가볍고 투명한 소스만 얹어진 샐러드 같다고 해야 하나?
해본 사람, 아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해본 것과 아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걸 가르치고 타인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각기 다르다. 많은 남자들이 축구와 군대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그 연령의 제한은 의외로 없다. 늙어 죽을 때까지 군대와 축구 얘기를 한다. 그리고 섹스 얘기를 한다. 그런데 전자의 두 개는 내용과 깊이가 비슷하게 세월을 타지만 섹스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못하다.
축구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재미있는 해설을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군대도 기억할 때마다 생생하고 얘기할 때마다 전설로 포장된다. 그러나 이상하게 섹스는 그렇지 않다. 나이가 들어도 누가 예쁘다, 섹시하다 얘기를 물리도록 하지만 섹스 얘기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섹스는 글로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게 아니고 말로도 한계가 있다. 축구처럼 남이 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 흥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섹스는 현업에서 은퇴하면 해설만으로 과거의 흥분과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섹스에서의 은퇴는 그 바닥을 떠나는 거다. 섹스라는 분야는 해설가나 기자나 감독 등의 앞길이 없다. 선수, 아니면 은퇴인 것이다. 그래서 1Q84에 그런 대사가 나온 것이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세요."
섹스 해설 따윈 재미없다.
앞의 두 해설위원처럼 아무리 뛰어난 해설가가 나온다고 한들 섹스 중계는 재미없다.
"아~지금 커플이 모텔에 들어가고 있네요. 아직 해도 안 졌는데요."
"십 분 째 애무, 이제 본격적으로 공격에 들어갈까요?"
"남자 선수, 드디어 한 시간의 벽을 넘어섭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여자 선수, 드디어 침대 시트를 움켜쥡니다. 허리까지 휘어집니다. 헐리웃 액션으로 보이지 않는데요."
"남자 선수,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데요. 승부처에서 체력문제를 드러내나요?"
역시, 재미없다. 세상에는 직접 해야만 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음담패설도, 두 명의 여자랑 자봤다는 말도 안 되는 허풍도, 엄청난 걸 봤다는 너스레도 다 현역 선수의 몫인 게 섹스다.
진열되어 있는 자전거를 보는 것만으로는...
질주할 때의 바람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섹스를 글로 배울 수 없고 지식인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3D TV, 아니 4D TV가 나와도 절대로 중계하지 않을 단 하나의 혼합 복식이 섹스다.
2011.12.28
섹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는 법
학교를 다닌다고 섹스가 수월해지진 않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도 같은 생각인지 섹스? 그거 별거 아니야 식으로 툭툭 말을 던진다.
발기불능이 문명화의 역효과라는 말은 흥미롭다. 대부분의 발기불능(임포텐스)은 심인성이다. 즉 심리적 문제라는 것인데 이것은 타인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배려, 이해, 존중, 이타주의 등등.. 이것은 우리 사회를 미개사회에서 문명사회로 만들었지만 침대에서 발기와 땀, 근육의 부대낌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잘할 수 있을까? 내 몸이 예뻐 보일까? 그녀(그)가 만족하고 있을까? 이 체위는 좋아할까? 이런 생각들이 겹쳐지면서 우리는 침대에서 심각한 불안과 마주하게 된다. 원초적 본능이라는 영화 제목이 왜 대단하고 정곡을 찌르는지 새삼 알게 된다.
베스트가 아니면 은퇴다.
은퇴란 그것을 더 이상 못하게 돼서 그것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가 해왔던 만큼, 내가 원했던 만큼, 내가 기대했던 만큼 "잘"하지 못하게 돼서 그만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은퇴한 박지성도, 은퇴를 앞둔 차두리도 축구를 "못"해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기준만큼 축구를 "잘" 못하게 돼서 은퇴한 것이다.
섹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중년에 접어들어서 섹스를 그만두는 건 기능적으로 섹스를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섹스 판타지의 실현 가능성이 전무하기 때문에 스스로 "섹스로부터" 은퇴하는 것이다. 물론 박지성과 차두리는 일반인보다 몇 배는 더 축구를 잘한다. 그러나 본인이 설정해 놓은 Best의 기준이 중요하다. 섹스도 본인이 설정해 놓은 Best의 기준이 중요한 것이다.
우린 그 Best를 서른 중반이 넘어서도, 마흔을 넘어 중년이 되어도 달성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Best가 언제 달성한 정점이었는지 우린 회고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 회고 끝에 지금 거기에 다다를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은퇴 시기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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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경기처럼 멋진 은퇴 섹스를 하고 싶지만 그 은퇴 섹스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일까 봐 걱정이다. 그렇다고 상대에게 "내 명예로운 은퇴를 위해 최고의 오르가슴을 느껴줘."라고 부탁이나 강요는 할 수 없지 않나? 그게 강요로 될 것 같으면 은퇴도 안 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