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라면 다섯 시에 퇴근해서 늦어도 다섯 시 사십 분쯤에는 집에 들어섰던 걸 감안하면 무려 두 시간이나 늦은 것이다. 잔업이나 야근을 한 것도 아니다. 엑스포 실사단 눈 호강 시켜주겠다고 광안대교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바람에 해운대와 센텀 시티 일대의 차량들이 완전 통제를 받으면서 거의 한 시간가량 꼼짝 못 했기 때문이다.
딸과 난 파스타의 일종인 펜네를 아라비아따 소스에 버무려 저녁을 먼저 먹었다. 여섯 시 반쯤,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00 치킨에 청양고추치킨 있거든. 그것 좀 주문해 줘.” 스트레스 정도가 이만저만 아닌가 보다 짐작했다. 집에 온 아내는 후라이드와 반반을 주문해서 혼자 먹었다. 물론 매운 치킨 몇 조각을 먹고 대부분은 남겼다.
애초에 매운 걸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인데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종종 매운맛 치킨을 시켜 먹는다. 나 같은 경우는 치킨을 그렇게 즐겨 먹지 않고 그나마도 후라이드나 오븐에 구운 깔끔한 맛의 치킨을 좋아하기 때문에 매운 양념 치킨에 끌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매운 걸 잘 먹고 좋아하지만...
스트레스받는다고 매운 걸 먹지는 않는다. 최근엔 나이 탓인지 매운 걸 먹으면 속이 고생하는 것 같아서 더 잘 안 먹게 됐다. 평소 좋아하던 매운 풋고추도 거의 안 먹고 있다. 그렇게 매운 걸 안 먹게 되면서 오히려 주변에 매운 음식이 많고, 그걸 먹는 사람도 많아졌다는 걸 느끼게 된다.
과거, 각종 외식 프랜차이즈 업체의 메뉴가 모아져 있던 쿠폰 북이나 아내가 주문할 때 쓰는 배달 어플을 어깨너머로 보면 매운 메뉴는 어디에나 있다. 돈가스, 떡볶이, 족발, 치킨, 짬뽕, 마라탕 등등. 매운 걸 잘 먹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단어도 생겼고 매운 걸 못 먹는 사람에 대해 조롱하는 단어도 생겼다. 스트레스받을 땐 매운 걸 먹는 걸로 푼다는 사람도 많아졌고 말이다.
그런데, 이 현상, 생각해 볼수록 이상하다.
스트레스는 몸과 뇌가 받는 부정적 자극이다. 몸에 온 스트레스를 놔두면 가볍게는 감기에서 심각하게는 암 같은 병이 된다. 그래서 운동만큼 중요한 것이 회복이다. 운동으로 지친 몸은 풀어주고 쉬어주고 달래줘야 한다. 정신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알다시피 기분 좋은 호르몬을 뿜어내서 없애주거나 상쇄시켜줘야 한다. 스트레스받을 때 아주 단 디저트를 먹거나 탄수화물이 가득한 빵을 먹는 건 이 효과 때문이다.
반면 매운 걸 먹는 건 이런 탄수화물에 반응하는 호르몬 분비와 함께 신체가 받는 고통을 쾌감으로 착각시켜 몸과 마음에 있던 기존의 고통을 망각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른뺨에 남아 있는 싸대기의 고통을 왼 뺨에 새롭게 맞는 싸대기로 잊는 것과 비슷한 거다. 예전에 한 정치인이 말한 것처럼 뉴스를 뉴스로 덮는 것과도 비슷한 것이다.
문제는 고통을 고통으로 잊는 건 몸에 후유증을 남긴다는 것이다. 물론 고통을 단 맛과 탄수화물의 쾌감으로 잊는 것도 후유증을 남기지만 최소한 즉각적인 통증을 남기진 않는다. 그러나 매운 걸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건 스트레스 그 자체를 없애지도 못할뿐더러, 다음 날 지독한 속 쓰림을 남긴다. 사실 이런 속 쓰림은 숙취만큼 건강에 안 좋다. 당연하게도 다음 날 아내도 속이 쓰려서 고생을 했다. 화장실에서... 그만하자.
예상했겠지만, 가장 좋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섹스다.
아, 물론 섹스에 적극적인 애인이나 배우자, 또는 기타 파트너가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섹스의 장점을 몇 개 꼽아보자.
일단 섹스는 육체적 고통이 없다. 물론 어쩌다, 그러니까 한두 달에 한 번, 심지어 분기별로 한 번 하는 사람의 경우엔 할 때는 물론이고 하고 나서도 심각한 근육통에 시달릴 수 있지만 그럭저럭 일주일에 한두 번, 주기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섹스 전후로 겪는 고통은 없지 않을까? 원래 몸은 쓰면 쓸수록 단련되고 준비가 빨리 되는 법이니까.
같은 맥락에서, 섹스는 후유증이 없다. 임신과 육아라는 막대한 후유증도 피임만 잘한다면 당연히 피할 수 있다. 소위 정상적인 섹스를 한다면 층간소음으로 신고를 당할 일도 없을 테고, 몸에 흉터가 남거나 멍이 들지도 않을 것이다.
이상한 액체를 사용하거나 거품 같은 걸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집을 크게 어지럽힐 일도 없을 테고, 튼튼한 소파와 견고한 침대를 사용한다면 섹스로 인해 그것들이 파손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육체적, 경제적, 심리적 후유증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 물론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돼서 욕을 먹을 수는 있겠지만...
건강에 도움이 된다. 당연하게도.
지금 당장 “섹스의 효과” 같은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관련 정보들이 뜰 것이다. 뼈와 근육이 단련되고 심폐 지구력이 좋아지며 피부도 좋아지는 데다가 스트레스와 통증 완화에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반면 매운 음식처럼 속을 쓰리게 하지도 않고 담배처럼 폐를 망가뜨리지도 않고 술처럼 간을 손상시키지도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이 정도로 부작용이 없는 운동은 거의 없다.
사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우린 많은 운동을 한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무슨 종목을 떠올리든 그 종목엔 부상이 따라온다. 아무리 주의해도 그건 어쩔 수 없다. 나도 그랬다. 축구를 했을 때는 근육통을 달고 살았고 발목과 무릎 부상을 당했었다. 농구도 마찬가지다. 마라톤을 할 때는 전혀 안 아플 것 같은 팔도 다쳐 봤다. 게다가 장거리 달리기를 오래 하면, 좀 말하기 민망하지만, 피부 자극으로 인해, 음...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다양한 곳에 상처를 입는다. 스포츠 클라이밍은 손바닥이 갈라지고 손이 못 생겨진다. 심지어 가장 부상이 적다는 수영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어깨 부상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섹스 때문에 병원에 가는 사람은 없다.
물론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종종 있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색다른 곳에서 특이한 도구를 사용하며 하는 경우이고,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그럴 일은 거의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만큼 매운 음식을 잘 먹는 나라는 드물다.
오죽하면 매운맛에 강한 민족과 국민의 순위를 정할 때 우리나라 국민과 한민족은 열외로 친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이게 자랑할 일은 아니다. 매운맛은 점점 강해지고 파스타조차 매운맛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사회인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만큼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그 스트레스를 해소할 다양한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저출산이 젊은 세대가 안고 있는 현재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섹스로 풀지 않고 매운 음식으로 푸는 한, 아니 매운 음식이 필요 없을 만큼 이 사회에 스트레스가 사라지지 않는 한, 어쩌면 저출산은 물론이고 섹스리스 현상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째, 얘기가 거창해졌다. 여하간 고통 없는 자극, 몸에 해롭지 않은 자극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다면 방을 잡고 전화를 해라. 내가 오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오라고, 아주 솔직하게. 아, 물론 파트너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 하~ 이 또한 스트레스이려나? 없으니까 불닭볶음면을 먹는 건가?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