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형은, 당연하게도, 영어로 Free Style Swimming이다. 참고로 접영(蝶泳)은 한자 표기에 쓰인 나비 접(蝶)과 같이 영어로도 Butterfly Stroke이고 배영(背泳)은 Back Stroke다. 평영(平泳)은 좀 달라서 영어로는 Breast Stroke다. 개인적으론 영어의 평영 표현이 더 마음에 닿는다.
바뀐 강사는 몇 주에 걸쳐 우리의 자유형을 손 보고 있다. 그야말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고칠 태세다. 아니 자유형은 그야말로 자유형 아닌가? 실제로 자유형만 했을 경우엔 특별한 기준은 없다. 그러니까 물속에서 본인이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으로 수영하는 것이 곧 자유형이다.
그러나 혼계영이나 개인 혼영 같은, 다른 영법과 같이 할 경우, 또는 그 영법과 비교할 경우엔 자유형은 우리가 아는 그 자유형이어야 한다. 우리가 아는 그 자유형은 크롤이다. 영어로는 Crawl, 또는 Front Crawl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자유형은 자유롭지만 크롤은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완벽한 자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자세의 효과
완벽을 향한 강사의 열정엔 약간의 저항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오랫동안 해 와서 몸에 배인 영법, 그것도 자유형의 영법을 바꾸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거의 왼손잡이를 오른손잡이로 바꾸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수영을 오래 하면 할수록 그 난이도는 높아지고 변화의 벽은 견고하다.
이럴 때 강사가 할 수 있는 건 변화의 시도 후, 그 효과를 체감케 하는 것이다. 즉 완벽에 가까울수록 더 빠르고 더 오래 하면서도 체력은 덜 쓴다는 걸 회원들이 느끼게 하는 것이다. 특히 그 체감을 수영을 진짜 잘하는 1번, 2번, 3번 주자가 느끼게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강사는 그 체감의 순간을 선사했고, 그 후 우리는 그의 일타강사 뺨치는 코치에 얌전히 따르고 있다.
며칠 전 사이드 킥을 교정했다. 중급 정도의 자유형 발차기가 발등이 수면 아래를 향해 차는 것이라면 사이드 킥은 복숭아 뼈가 수면 아래를 향하게 해서 차고 나가는 것이다. 이 킥 방법은 몸통의 회전, 즉 로테이션을 염두에 둔 발차기로 우아한 자유형의 완성을 위해선 꼭 익혀야 한다.
강사는 일단 사이드 킥 한 바퀴를 시켰다. 우리가 그 정도도 못할까? 다들 무난히 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강사가 여러분은 지금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완벽한, 교과서적인 자세를 가르쳐줬다. 그 자세대로 한 바퀴를 돌고 왔다. 1번 주자 아저씨가 말했다. “야, 확실히 빠르네.”, 난 2번 주자 아저씨를 보고 말했다. “아니, 그동안 우린 뭐 한 거야?”
할 줄 아는 것과 잘하는 것의 차이
자유형은 자유롭지 않다. 아니 자유롭기 위해서는 교과서적인 자세를 완벽하게 할 수 있어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그 진정한 자유에 조금씩 근접하고 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자유형에서 누리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자유로운 세계로 진입할 것이다. 그 순간을 기다리며 우린 강사의 다양한 가르침을 인내하고 있다.
수영을 1년 이상 한 사람이라면 자유형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고 완벽하게 하는 건 또 다르다. 또 남들 다하는 것 같고, 누구나 수월하게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잘하는 사람이나 제대로 하는 사람은 드문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육아나 밥 짓기, 라면 끓이기, 삽질이나 망치질 같은 거 말이다.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
완벽한 자유형이라는 단어만큼 완벽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역설적이다. 완벽한 자유형은 실현할 수 있지만 완벽한 사랑은 실현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완벽한 자유형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야말로 완벽한 자유형의 형태가 있다면, 그래서 모두가 그 형태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다면 올림픽 수영 경기에서 해설자가 필요 없을 것이다. 다들 조금씩 다른 폼으로, 다름 리듬으로, 다른 각도로 수영을 하기에 그 차이를 설명하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만의 자유형을 위한 조건
이 다름엔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다. 첫째는 우선 소위 교과서적인 크롤, 즉 자유형을 익힌 뒤에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폼을 알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과 그 폼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운전을 배우고 자기 스타일대로 운전을 하는 것과 운전을 안 배우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의 차이라고나 할까? 정석과 기본을 습득한 뒤 그걸 자기 몸으로 실현해야 한다.
여기서 두 번째 전제가 발생한다. 우린 불행히도 다 다르게 생겼다. 몸의 유연성과 근육의 양도 다 다르다. 예를 들어 난 키에 비해 손과 발이 큰 편이다. 물론 다른 게 컸으면 좋았겠지만. 여하간 그 덕분에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많이 물을 잡고 더 많은 물을 찰 수 있다. 게다가 남자치고는 유연한 편이다. 어깨와 허리, 골반 등이 유연해서 가동범위도 넓은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손이 작고 발이 작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유연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교과서적인 폼을 그대로 할 수는 없다. 자기 신체의 조건에 맞게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다. 나 같이 어깨가 유연해서 가동성이 넓은 사람은 손끝이 거의 얼굴을 스치며 나와서 팔뚝이 귀에 붙어 물속에 들어가지만 어깨가 두껍거나 유연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 폭이 넓을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 머리 앞에 있는 물이 아니라 약 15도 정도 앞의 물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가게 된다.
완벽한 사랑은 없거나 있다.
완벽한 사랑은 한번뿐이다. 아니 모든 사랑이 완벽하거나 모든 사랑이 완벽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고유하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람이 누구와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 사람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사랑하는 동안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 사람의 마음과 신체에 딱 맞다. 오직 그 사람이라는 넓은 품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遊泳)한다. 내 신체의 각 부분은 그 사람에게 맞춤이다. 여자의 그 안만 남자의 그것에 맞게 움직이는 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그 사람에게 맞춤이다. 궁합이라는 건, 사실 별 거 아니다. 그렇게 서로에 딱 맞아떨어지는 거다. 내 존재, 신체, 성격... 여하간 그 모든 게 완벽하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그것이 궁합의 순간이다.
그러니 완벽한 사람을 찾지 마라. 완벽하다고 자부하는 사람과도 만나지 마라. 그 완벽은 어제의 그 사람의 것. 당신에게 맞는 완벽함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허술한 사람에게 있다. 당신의 완벽함 또한 당신의 고유함을 완벽함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사람에게 있다.
그렇다고... “오 그래? 그럼 뭐 사랑 따위는 따로 공부할 게 없는 거야? 노력이 필요 없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왜 앞에 길게 자유형 이야기를 했겠나. 좋은 사랑, 괜찮은 사람의 표본이나 예시, 기준은 있다. 스스로 그런 사랑을 할 만한 사람인지 반성해야 한다. 수영이 그렇듯 폼을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고칠 수 없다. 그 폼의 반성과 교정이 없으면 늘지 않는다. 사람도, 사랑도 성숙하기 위해서는, 어제보다 좀 더 괜찮은 연인,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를 봐야 한다. 어렵겠지만 말이다.
여하간... 뭐... 과거의 연인에게 키가 작다, 가슴이 작다, 심지어 그게 작다는 말을 들었다고 너무 상심 마라.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좁으면 좁은 대로 넓으면 넓은 대로... 얕으면 얕은 대로 깊으면 깊은 대로... 유연하면 유연한대로 뻣뻣하면 뻣뻣한 대로 살다 보면... 그래도 더 나아지기 적당히 꼼지락거리며 살다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