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수영장의 의미 변화, 혹은 그 시절 교수들의 착각

진지하게 야한 농담들 22

by 최영훈

열한 시의 수영장

앞서도 썼지만, 월수금, 열한 시와 열두 시의 수영장은 다른 공간이다. 열한 시의 수영장은 천오백 미터 가까이, 그야말로 숨이 턱이 닿도록, 시원한 물속에서도 몸에 열이 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손에 걸린 물의 무게가 모래주머니처럼 느껴질 정도로 운동을 하는 공간이다. 그 수영장엔 꿈틀거리는 근육이 있고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빠르게 반복하는 건강한 심장과 폐가 있으며 그 심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순환하는 피와 그 순환을 돕는 튼튼한 혈관, 그 덕분에 무리 없이 움직이는 육체가 있다.


음악도 리듬도 없지만 다들 같은 리듬과 속도로 앞으로 나간다. 내가 느려지면 뒤에 오는 사람에게 민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쉬어도 스타트 라인에 가서 말리기 위해 널어 놓은 미역처럼 레인줄에 너부러져 기대어 쉬어야 한다. 그전까지, 레인에 있는 동안엔 앞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끝에 가서도 쉬지 않는다. 터치 패드에 다가갈 때, 내 앞의 사람이 이미 터치를 하고 돌아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 순간 쉼은 잊힌다. RATM의 음악처럼 쿵쾅대는 심장 소리도, Numb에서 내질렀던 채스터 베닝턴(린킨 파크의 리드싱어다. 나보다 몇 살 어린데, 몇 년 전에 죽었다.)의 절규처럼 간절히 신선한 공기를 원하는 폐의 갈망도 무시하고, 나 또한 터치를 하고 잽싸게 턴을 하며 터치 패드를 가볍게, 지면 위로 깡충 뛰어오르는 아이처럼 차고 나온다.


그 턴엔 우선, 일종의, 일본 말로 가오(かお) 같은 것이 담겨 있다. 힘들면 영법을 바꿔 갈지 언정 속도를 늦추지도 쉬지도 않겠다는, 이 시간의 마스터 A반의 격에 맞게 수영을 하겠다는 마음의 자세가 아주 결연히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뭔가가 담겨 있다. 앞서 말한 나를 따라오는 뒷주자에 대한 책임감이다. 1번 주자부터 마지막 주자까지, 이 공유된 책임감이 모두를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게 한다.


올림픽 수영 경기에서 들리는 코치의 휘파람 소리도, 평영의 리듬을 맞춰주는 구호도 필요 없다. 강사도 말이 없다. 그저 레인 위에서 내려다볼 뿐이다. 2번은 1번의 발끝을 보고, 3번은 2번의 발끝을 보고... 그렇게 앞에 가는 이의 격렬한 발차기가 일으키는 물보라의 끝을 잡고 묵묵히 따라간다. 음악도 리듬도 구호도 휘파람도 없지만 우리는 같은 음악을 들으며 군무를 하고 있다.


열두 시의 수영장

열두 시 오 분 전부터 음악이 켜진다. 강사의 목소리와 구호는 남자 샤워실을 넘어 라커룸까지 들린다. 70에서 80이 넘은 할머니들-왜 할아버지는 없는지 모르겠다. 아쿠아로빅은 할머니 한정인가? <무한도전>에 나왔던 변두리의 에어로빅 학원처럼-은 조회 시간에 줄을 맞춰 서 있는 학생들처럼 오와 열을 맞춰 물속에 서 있다. 수영장의 천장을 울릴 정도로 크게 음악이 나오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어머니들 안녕하세요~”하는 강사의 신명 나는 인사 뒤에 이어지는 “허이”, “하나, 둘, 셋, 넷,”, “뻗고, 오므리고, 뻗고, 오므리고”와 같은 구호가 울려야, 그제 서야 움직인다.


안 움직인다고 해도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한 박자 늦게 움직여도 상관없다. 어차피 양팔 간격으로 서 있다. 앞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건강을 유지할 정도의 심장 박동, 마지막 남은 근육을 붙잡을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 더 살이 찌지 않을 정도의 유산소 운동. 열두 시의 수영장은 그런 공간이다. 한 공간, 다른 시간, 다른 풍경이 있다.


같은 공간, 다른 나이, 다른 의미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같은 공간에 함께 있어도 저들의 느낌과 나의 느낌이, 저들의 해석과 나의 해석이, 저들의 자리와 나의 자리는 다른 기운을 갖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젊은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 그 공간의 저편과 이편이 확연히 느껴진다. 마치 냉전시대의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처럼.


그런 느낌이 가장 강한 곳은 대학이다. 교직원, 교수, 학생은 다른 권력 위계에 위치하면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있기에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 다름의 이유로 나이 차이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동안 20대 초중반의 청춘들을 보면서, 참 젊다는 건 아름답다는 걸 절감했다. 그때 내 나이도 겨우 삼십 대 중반이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틈만나면 학생들에게 밝게 입고 다니라고 했다. 특히 남학생들한테는 더 그랬다.


어느 해였나, 4학년 수업을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 해에 야상이 유행했었다. 여학생들이 거의 다 그런 외투를 입고 있었다. 다시 군대 온 것 같으니 다음 주부턴 좀 밝게 입고 오라고 했다. 어차피 졸업하면 너희들 입고 싶은 데로 입고 살 수 없으니 학교 다닐 때만큼이라도 남 신경 안 쓰고 편하게 입고 다니라고 했다. 그렇게, 뭘, 어떤 색을 입어도 눈부신 때는 이때뿐이라고 했다.

반복해 말하지만, 삼십 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이십 대의 여대생은 다른 존재였다. 유혹을 할 수도, 당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물론, 솔직히 말하면, 예쁜 여학생이나 매력 있는 여학생을 보면 긴장이 되기도 했고 ‘제 남자친구는 좋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대학 강사가 아니어도 어떻게든 먹고 살 방법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밥줄이 끊길까 염려되어 몸을 사렸던 건 아니다. 그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상상력 없는 아저씨

불행히도 다들 나 같은 생각을 하진 않았다. 내가 대학을 들락거릴 때 여러 대학에서 교수의 성 관련 사건이 연일 뉴스에 나왔다. 야한 문자를 보내고 유혹을 하고 술 마시다 만지고 껴안고 입을 맞추고... 난 솔직히 이런 사건을 볼 때 윤리적으로 분노하거나 개탄해 마지않거나, 뭐 그러지는 않았다. 다만 다들 참 상상력이 없구나 싶었다.


내가 사는 동네엔 모텔촌이 있다. 근처에 대학이 많아서 종종 대낮이나, 심지어 오전에도 젊은 커플들이 오가곤 한다. 그러다 가끔... 척 봐도 이래저래 균형이 안 맞는 커플의 모습을 볼 때도 있다. 특히 나이 차이가, 아니 누가 봐도 아빠와 딸 같은 남녀가 들어가는 걸 볼 때도 있다. 난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상상을 한다.

우선은 저 두 사람이 걷는 동안 자신들 스스로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까? 두 사람이 침대에 있을 때, 그 모습이 보기 좋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젊은 육체 위에서 노쇠한 육체가 헐떡거리는 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그런 상상을 한다.


모르겠다. 내 머리가 일찍 쇠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대학 강사 시절에도 제법 흰머리가 많아서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개인적으로, 몸을 나누는 남녀는 그 장소와 시간 안팎에서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침대의 밖, 그러니까 카페나 박물관, 화랑, 공원을 걸을 때도 둘이 어울려야 한다. 둘이 김치찌개를 먹든, 고급 일식이나 양식을 먹든,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두 사람의 풍경이 그 공간에 녹아들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침대에 엉켜 있을 때도 보기 좋아야 한다.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봐도, 또 미친 척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게 해도, 그리고 두 사람의 그 시간을 촬영하여 둘이서 볼 때도 완전히 어울려야 한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완전히 조화로워 보여야 한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의 착각

학회에서 지금의 내 또래, 그러니까 당시엔 범접하기 어려운 교수들과 관련 사건을 주제로 대화를 해보고 더 놀랐었다. 윤리 의식은 셋째 치고, 현재의 내 또래, 그러니까 쉰이 넘는 남자 교수들의 빈곤한 상상력에 난 놀랐었다. 또, 자기 자신과 자기 또래의 남자 교수들의 성적인 매력과 윤리 의식을 이렇게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할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랐었다. 교수라는 직함과 학문적 성취, 사회적 명망과 자신의 성적인 매력, 성적인 능력을 동일시하는 건 아닐까, 그런 착각 속에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었다.


더 나아가, 공부에 바친 청춘에 대한 보상을 이제야 받아보려는 건 아닐까, 그 보상을 멋진 자동차나 학문적 명성이나 학회의 간부나 심지어 폴리페서 같은 사회적 야망과 같은 대체제가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청춘의 육체로부터 받으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생기를 읽은 시대의 청춘

이건 좀 다른 이야기다. 사는 동네가 그렇다보니, 또 다니는 수영장이 대학 건물에 있다보니 요즘에도 대학생들을 자주 본다. 그런데, 뭐랄까, 생기가 없다. 두툼한 푸퍼 패딩을 입은 청춘들을 보면 만화 <빅히어로>에 나온 뚱뚱한 로봇 베이맥스와 미쉐린 타이어의 캐릭터 비벤덤이 생각난다. 지하철에서, 그렇게 두툼한 점퍼를 입고 두 손으로 스마트 폰을 잡고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는 청춘들을 보면 노쇠함이 느껴진다. 지적으로도, 정력적으로도 고갈된 존재가 거기 있다.

다른 맥락에서, 어쩌면 그들의 기운을 다른 장소, 다른 문제, 다른 세대가 갉아먹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숨이 턱에 찰 정도로 섹스를 하거나 달리기를 하거나 수영을 하거나 해야 될 존재들이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이 빠질 정도로 책을 읽고 너무 말을 많이 해서 입이 말라 갈라질 정도로 열띤 토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누가 이런 열정과 체력과 지력을 빼어갔는지 모르겠다. 강사의 구령이 없이는, 저 밖의 음악이 없이는 스스로 리듬을 생산하지 못하는 노쇠한 할머니들처럼 우리의 청춘들을 누가 이렇게 좀비처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봄이 온다. 보기만 해도 눈부신 청춘 같은 봄이 온다. 청춘이 청춘다운 세상이 나 같은 중년의 사내도 살기 좋은 세상 아닐까? 올봄엔 봄도 청춘도 제 모습이었으면... 20230227

keyword
이전 24화견갑골을 못쓰는 이유, 혹은 남자의 기능 향상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