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두툼하고 풍성한 푸퍼 패딩/다운과 사람을 살찐 곰과 양으로 퇴화시키는 둥글 펑퍼짐했던 뽀글이 점퍼-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딸도 겨울 내내 입고 다녔다- 가 유행했던 걸 감안하면 올봄엔 그 어느 해의 봄보다 훨씬 붐빌 것이다.
수영장에서 매일 보는 사람도 밖에서 보면 알아보기 쉽지 않다. 특히 요즘 같은 겨울에는, 마스크까지 쓰고 있으면 더 그렇다. 수영하는 내내 대부분 수경을 쓰고 있으니 눈매만으로 그 사람을 추정하는 것도 어렵다. 사실 수영장 밖에서는 몸매가 좋은 아가씨라도 밖에서 보면 평범해 보일 것이다. 그럭저럭 봐줄 만한 몸매인 우리 레인의 몇몇 남자들도 라커룸에서 옷을 입은 모습을 보면 그저 평범한 아저씨이자 회사원이다. 그들의 복근도, 상체의 잔근육도, 업 된 엉덩이도 여간해서 티가 안 난다. 이런 현상들을 볼 때마다 옷의 구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옷은 신체의 장점을 살리는 걸까, 아니면 단점을 커버하는 것일까.
그건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옷을 입었을 때의 모습이 그 사람의 진면목이 아닐 확률이 의외로 높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남자로 한정하면... 옷을 벗기기 전까지 몸매를 파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여름엔 그나마 나은데 그마저도 좀 헐렁하게 입고 다닌다면 그야말로 벗겨 놓기 전까지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의외로 남자들을 위한 보정 속옷이 많아서 옷을 벗으면 후두둑하고 흘러내리는 살을 감춰놓고 사는 사람이 많다.
옷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자. 젊었을 때는 대체로 장점을 부각하는 옷차림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단점을 가리는 옷차림을 한다. 각기 다른 개성적인 존재에서 모두 비슷한 평균적인 존재가 되어가면서 자신의 장점 또한 망각된다. 언젠가부터, 이름 대신 누구의 엄마나, 누구의 아빠, 또는 어떤 직함이나 지위로 불리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그리고 그것을 더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옷에겐 입었을 때의 역할과 벗었을 때의 역할이 있다.
그 양자의 역할의 핵심에 신체와 주체가 있다. 전자의 경우엔 사회적이며 암묵적이고 다층적이며 해석적이다. 후자의 경우엔 명시적이며 직관적이고 원초적이다. 전자의 경우엔 만들어진 자신감이 중요하다면 후자의 경우엔 태생적인 자신감과 타자로부터 쏟아지는 시선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 그 타자, 나를 에로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타자의 시선 앞에서 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개별적인 신체가 된다. 옷을 벗었을 때만 획득되는 나다.
다시 봄날의 운동 붐, 다이어트 시도로 돌아가자. 이런 이유로, 어디선가 그런 글을 썼던 거 같은데, 모두를 위한 신체를 만들려는 시도는 예외 없이 실패한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신체를 봐줄 그 한 사람이 없으면 모든 몸매 만들기의 시도는 예외 없이 실패한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해라. 당신을 봐줄 사람이 없다면 봄날의 공원을 산책하는 걸로도 충분하다. 사놓은 새 옷에 몸을 꾸겨 넣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운동을 시작해 봐야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은밀한 순간, 옷을 벗는 순간을 위해 운동을 한다면 응원한다. 평소엔 당신의 몸매가 어떤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지만 그 한 꺼풀의 천 안에 상상도 못 할 뭔가를 숨기고 있고, 그 숨긴 것을 오직 단 한 사람에게만 보여주고 싶다면, 그 보이는 순간 내 앞의 그/그녀의 나지막한 탄성에 매번 자잘한 소름이 돋으며 깊은 쾌감이 솟구쳐 오른다면 열심히 운동해라. 우리의 신체는-일반적으로-단 한 사람의 신체와 시선의 점유만으로도 충분한 부피니까. 아래의 글은 몸매과 관련 된 과거의 글이다 20230301
거울방
우리 부모님의 시대는 단칸방에서 모든 불을 끄고 애들은 잠들었는지 확인하고 섹스를 했다. 물론 나같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가족에게만 해당하는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난 대학 때 해피엔드라는 영화를 보면서 전도연이 주진모랑 섹스를 할 때는 환한 곳에서 섹스를 하고 최민식과 섹스를 할 때는 불이 다 꺼진 안방에서 하는 걸 보면서 섹스의 양면성을 느꼈다. 섹스가 쾌락일 때 나와 타자의 쾌감을 느끼는 순간을 보고 싶어 하고 섹스가 노동이고 번식 행위일 때 그것은 은폐된다. 마치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인증샷이나 셀카를 찍는 여대생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환한 데서 하는 걸 좋아했다. 과거형이다. 애석하게도. 그러나 가장 좋은 건 거울 방이다. 몸매와 상관없이 섹스를 하는 인간만큼 아름다운 인간은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보디빌더도 포즈를 취할 때 보다 여릿한 여자를 안고 있을 때가 천배가량 멋지다.
세상이 좋아져서 곳곳에 방의 사면이 거울로 된 방이 있는 모텔도 많이 생겼다. 두세 번 해서 굳이 내숭 떨며 가까운 모텔로 끌려가고 끌고 가고 하는 커플이 아니라면 한 번쯤 이런 곳에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인간은 때론 발가벗고 있는 자신과 마주해야 할 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아름다움과 타인의 아름다움을 보며 우리의 젊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절감해야 되는 순간이 필요하다. 마누라의 말처럼 중년의 부부가 거울방에 해봤자 서로 상처만 될 뿐이다. 늘어지는 뱃살과 움직 때마다 출렁이는 비계 덩어리들, 그리고 축 처져버린 바스트와 근육 1그램도 없는 남편의 팔뚝을 보는 건 그나마 잘 안 되는 섹스를 원천 봉쇄할 것이다.
결국 거울방은 청춘들의 것이다. 애초에 그들을 위해 고안되고 설계되고 만들어진 방이다. 이 방에서 당당히 섹스를 할 수 있는 인간은 청춘인 것이다. 나 같은 중년들은 깜짝 놀라 카운터에 전화를 해 방을 바꿔달라고 할 것이다.
우린 자신의 모습을 다 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 못 본 내 모습은 의외로 많다. 오르가슴을 느낄 때의 자신의 근육의 떨림과 얼굴의 찡그림을 본 적이 있는 가? 사하라 사막에서 삼일동안 물을 못 마신 사람처럼... 애타게 연인의 입술을 덮치며 체액을 빨아들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때론 우리에겐 나를 바라보는 쇼 타임이 필요하다. 그 쇼의 주인공이 된 화려하고 퇴폐적인 자신을 보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쇼는 짧고 주인공의 전성기도 짧다. 쓸데없이 몰카 따위로 섹스를 기록하지 말고 거울방에서 섹스를 뇌리에 기억해라. 그 기억으로 중년과 노년의 마른 몸에 습기를 더할 수 있을 테니... 2015. 2. 10
그런 속옷을 입지 말아야 하는 이유
얼마 전 아내가 퓨마 속옷 세트를 샀다. 입은 걸보는 것 보다 펼쳐져 있는 걸 보는 게 멋있는 속옷이다. 홈쇼핑 여자 속옷 브랜드는 크게 서너 가지 시장으로 나뉜다. 스포츠, 원더브라 스타일, 레이스류의 원더브라 스타일, 중년 레이스, 중년 보정 등등.... 물론 세세하게는 더 나뉘겠다만...
이 나뉨은 역순으로 판타지를 조장한다. 그러니까. 스포츠 브랜드의 속옷이 가장 판타지를 조장하고 중년 보정 속옷 브랜드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양 극단의 속옷을 사는 소비자는 전혀 다른 욕망으로 구매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중년 보정 속옷을 사야 하는 연령과 몸매의 여성이 스포츠 브랜드의 속옷을 산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판타지의 실현이자 자기 기만이 된다.
남자들끼리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넓은 밴드가 있는 남자 팬티가 있다. 그중, 특히 드로즈 계열은, 입었을 때 뱃살로 그 띠가 덮어지면 입지 말라고 한다. 그건 브랜드 이미지를 소비자가 헤치는 전형적인 예다. 어떤 샴페인을 흑인 래퍼들이 너무 많이 소비해서 고민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퓨마나 아디다스, 또 원더브라 같은 브랜드의 아슬아슬한 속옷을 주 타깃 소비자가 아닌 여성이 입었을 경우엔 매출은 상승되지만 브랜드 이미지는 깎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수영장의 여자 탈의실에서 한 중년 아줌마가 팬티의 밴드를 덮는 것도 무시한 채 빨간색의 퓨마 스포츠 란제리 세트를 입고 있는 걸 같은 브랜드를 입고 있는 20대의 여자가 봤다면 당장 다른 브랜드를 입고 싶을 정도의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속옷 따위로 현실을 부정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 정도는 알 나이다. 프리파라 같은 만화를 보면서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게 귀여울 나이는 대여섯 살까지 인 것처럼 비키니 스타일의, 스포츠 브라 스타일의 속옷을 입으면 몸매가 달라 보일 거라는 환상을 가질 수 있는 나이도 상한 연령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때 소위 철들었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홈쇼핑, 특히 여성 의류판매 시간의 호스트 담론은 여성 마케팅 메시지의 교과서다. 관련 전공자가 꼼꼼히 녹취해서 논문을 써도 될 정도다. 그 안에는 라캉, 맥크라켄, 부르디외, 보드리야르, 마르크스, 크리스테바 등 소비와 페미니즘 이론으로 분석가능한 넘치는 전략과 기호, 상징들이 있다. 그런 전략과 기호, 상징에 넘어가서 빨간색이 포함된 속옷 세트를 산 나름 똑똑한 와이프 같은 소비자가 있는 걸 보면 그것들은 지금도 지위고하, 학력 수준, 경제 수준을 막론하고 잘 통하고 있는 것 같다. 2017. 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