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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짐승, 혹은 들뢰즈의 뚜껑과 내용물의 간극

진지하게 야한 농담들 35

by 최영훈

한 청년의 이중생활

얼마 전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글을 봤다. 아주 상반된 두 여자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관계를 이어가는 청년의 이야기였다. 내용은 간단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여사친"이 있다.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살고 가정환경도 비슷해서 친구가 됐고 그렇게 성인이 됐다. 두 사람 다 복잡하고 불우한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면서 아주 “정상”적인 사람 행세를 하며 “정상”적으로 살고 있다. 물론 연애도 각기 다른 사람과 아주 정상적인 연애를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사친과 술자리를 이어가다 이성의 끈이 끊겨 선을 넘게 된다. 선을 넘은 후 더 많은 선을 넘게 된다. 상식과 금기의 선을 넘는다. 일상의 선을 넘어 환상의 선으로, 사람의 선을 넘어 짐승의 선까지 이어 넘는다. 여사친이 내는 소리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고, 여사친의 페티시는 상식으로 수용될 수 있는 선이 아니다. 각자의 애인과는 상식적이고 "통념적인" 체위와 "평범한" 소리를 동반한 섹스를 했지만 두 사람이 만났을 때는 그 "통념"과 "평범", 그 모든 걸 밖에 두고 왔다. 이 청년의 삶을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건 내 몫이 아니다. 이 매거진의 주제도 아니고. 대신 우린 이 청년의 이중생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중생활 속 두 남녀의 모습 중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닌지, 모두가 진짜일 수는 없는지를 말이다. 그 편이 우리에게 더 많은 교훈을 줄지도 모르니.


들뢰즈의 뚜껑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에는 뚜껑의 은유가 나온다. 우린 종종 뚜껑이나 라벨, 포장, 심지어 누군가 말해준 그 도시의 풍경을 “듣고” 상상한 그 내용 및 본질과 실제로 그 뚜껑을 열어 확인한 내용물 및 실제로 간 여행지에서 두 눈으로 본 풍경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곤 한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둘 중 하나다. 실망하거나 내가 잘못 유추했음을, 잘못 상상했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상상과 이미지를 실재하는 내용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다.


설득커뮤니케이션에도 이와 비슷한 이론이 있다. 인지부조화이론이나 균형이론이 대표적이다. 이 이론들, 쉽게 말해 광고를 보거나 다른 사람의 소개를 듣고 물건을 구매했을 때 내 기대나 판단과 제품의 실재가 다를 경우 내 이성적 판단과 메시지 수용 및 해석 행위를 조절하는 것이다. 실망한 소비자는, 의외로 긍정적 메시지를 찾아 소비한다. 분양받은 아파트에 실망했지만 멋진 그 브랜드 아파트 광고를 보며 자기 자신을 위로한다. 대형 세단을 구매한 뒤 한두 달 타보니 이런저런 불만이 생기지만 종종 나오는 화려한 TV 광고를 통해 자신의 자동차의 가치를 새삼 확인하며 위안을 받는다.


뚜껑에 맞춰가는 삶

브랜드나 라벨, 포장지, 그리고 뚜껑은 상품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다. 단지 그렇게 해석되길 바라는 이미지일 뿐이다. 그것을 그렇게 해석했다면 그 이미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문제는 그 뚜껑을 열었을 때 발생한다.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보니 아닐 경우 말이다.


우린 일반적으로 뚜껑이 A를 말할 때 당연히 내용도 A이길 바란다. 사람에게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 기대를 한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그렇게 해석했다면 그건 타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런 해석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바라며 나의 이미지를 구축한 자기 탓이기도 하다. 결국, 주체와 타자 둘 다, 뚜껑에 구속된다.


다른 글에도 썼지만, 우린 이 뚜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상당히 조심스럽게 산다. 소위 사회생활이라 통칭되는 삶이다. 연애 때도 마찬가지다. 연애초반엔 마치 약속대련 하듯이, 의례를 치르듯이 “시대적/상식적 연애적 표상”에 맞게 행동한다. 문제는 이 표상적 활동이 지속될 때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지속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의미와 본질은 기호 안에 밀봉되어 있다. 그 의미와 본질은 어느 날, 어느 사건, 어느 사람과 마주쳤을 때 펼쳐진다. 그 의미와 본질을 펼쳐 보여준다. 문제는 그 안에 많은 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뜯어서 확인했다고 여기고 있는 본질이 진짜 본질이 아닐 수도, 또는 그 본질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도 자신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에 그렇게 살면서도 의심을 품지 않는 것이다. 표상이 본질이라 여기며 살면 딱히 문제가 없다. 해석자, 즉 타자에게, 애인에게, 배우자에게 늘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면, 해석의 계열체에 통합될만한, 그런 모습과 삶만 보여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뭐, 그렇게 살다 죽는 거지.


반면, 어느 정도 서로를 알게 되면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타자의 의지로 개봉된 것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보낸 시간이 개봉한 진짜 자신이라고 생각되는 자신을 말이다. 그 모습을, 참모습이라 부르자. 당연히 타자에겐 새 모습이다. 새 모습을 보고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다. 좋아하면 당연히 자신도 참모습을 보여준다. 자기 참모습도 좋아해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어디 일이 그렇게 돌아가나. 나의 참모습은 상대가 혐오하는 모습일 수 있다. 참모습을 보여줬을 때, 타자가 싫어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오해의 원인은 도대체 누구에게 있나?


호불호는 내 탓이 아니다.

기호는 해석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해석이 그 기호의 상태, 그러니까 그 기호가 사람이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온 마들렌이든 기호 그 자체와 관련이 없다. 타자가 내게서 찾는 내 참모습은, 엄밀히 말하면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찾은 것이고, 그래서 그가 날 떠올릴 때만, 그에게 현현(顯現)할 수 있다.


여기서 일종의 무기력이 발생한다. 난, 타자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내 참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타자가 없을 때 나 혼자 그것을 재현해 낼 방법이 없다. 무기력은 타자에게도 있다.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그/그녀의 참모습이리라 “믿을 뿐”, 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그녀가 다른 곳, 다른 이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알 수 없다. 다른 방향에서 본 사람, 다른 곳, 다른 상황에서 본 사람은 다른 그/그녀를 본다. 어쩌면 그 모습이 진짜 참모습일지 모른다. 참모습은 많다. 나는 너무 많다. 타자도 마찬가지다.


질투의 이유

다 알 수 없고, 다 볼 수 없고, 다 가질 수 없기에... 질투한다. 질투는 연인에 대한 해석의 잔여, 또는 그 해석에 대한 “확증 없음”, 이 부분에서 발생한다. 더 나아가 해석의 수많은 가능성을 단순화시키는 데서도 발생한다. 나에게 보여주는 “그 웃음”과 다른 이에게 보여주는 “그 웃음”은 모양새만 같을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해석은 웃는 이에게 있지 않고 타자에게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연인에게 그런 웃음을 짓지 말라고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같은 맥락에서, 내게 질투심이 없었던 이유를 알았다. 내가 만난 연인들은 내게 밑바닥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교회나 직장, 학교에서의 모습에선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들은 "나" 한정 에디션이었다. 물론 나를 만나기 전에 다른 남자를 만난 사람도 있었고 다들 그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 줬다. 내가 과거의 그녀의 연애와 그녀를 품었던 남자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판단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게 그런 모습, 내 연인으로 존재해 준다는 사실에 감사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설령 다른 곳, 다른 사람에게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인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는지도 모른다. 내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었는지도. 그리고 어쩌면, 모든 연인은, 들뢰즈의 말처럼 거짓말을 감추고 있다고,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기억의 무기력함

맨 앞의 청년의 사연으로 돌아가자. 그 청년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소위 정상적인 섹스를 하는 자신의 모습도, 짐승 같이 섹스를 하는 자신의 모습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무기력이 가장 큰 무기력이다. IQ84에서 아오마메는 노부인을 마사지하면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


"당신 몸은 무척 탄력 있어 보여요." 노부인은 말했다.

....

"고맙습니다."아오마메는 말했다.

"나도 예전에는 그런 몸을 갖고 있었지요."

"알고 있어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

"지금도 멋진 몸이세요."아오마메는 말했다.

노부인은 가볍게 입가를 올렸다. "고마워요. 하지만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아오마메는 거기에는 응대하지 않았다.

"나는 그 몸을 몹시 즐겼고 상대도 몹시 즐겹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요?"

"알아요."

"어때요, 당신은 즐기고 있나요?"

"가끔." 아오마메는 말했다.

"가끔으로는 부족할 거예요." 노부인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말했다.

"그런 건 젊은 시절에 열심히 즐겨둬야 해요. 마음 가는 데까지. 나이 들어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음에는 예전 기억으로 몸을 따스하게 덥혀야 하니까요."


난 들뢰즈의 책을 읽으면서, 엄밀히 말하면 이 글을 쓰면서 저 대화의 마지막 말, 기억으로 몸을 덥힌다는 말의 의미를 사무치게 깨달았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그리고 그 후로 이 대목을 여러 상황에서 떠올렸을 땐, 그저 늙으면 섹스를 할 수 없어서, 좋았던 시절을 돌아보며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쩌면, 하루키는 더 깊은 슬픔을, 더 큰 무기력함을 저 대화에 넣어 놓은 건 아닐까?


난 다시...

난 다시 짐승이 될 수 없다. 한 여름의 모텔에서 끈적하면서도 투명한 땀을 흘리며 A와 녹초가 될 때까지 섹스를 하던 내가 될 수 없다. B에게 어깨를 물리면서도 전기 모기채에 걸린 모기가 타다닥 거리며 은빛 섬광을 내며 죽는 것처럼, 낯선 비명을 지르며 쾌감에 몸을 부르르 떨던, 그날의 내가 될 수 없다. <감각의 제국>의 사다처럼 날 산채로 삼킬 것 같았던 J의 품에서 모든 에너지가 사방으로 녹아 흘러내리고 작은 관절 하나조차 희미하게라도 움직일 수 없었던 그날의 나는 없다. 날 개새끼라 부르며 자신의 길고 흰 목을 물어뜯으라며 내밀던, K만 불러낼 수 있었던 짐승인 나도 없다. 엄밀히 말하면 얼마 전, 조용히, 가만히 아내를 안았던 그날의 나도 될 수 없다.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재현할 수도 없다. 그날, 그 사람과 만끽했던 쾌감은 나만의 것이 아니어서 나 혼자 만들 수 없다. 좋았던 시절은 돌아올 수 없어서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순간의 나도, 느낌도, 순간도 사라졌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건 잊었기 때문이다. 잊고 사니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 좋았던 순간의 나를, 그 기쁨과 쾌락을 지금 나 혼자 재현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나마 살만한 것이다. 더 좋은 날 오겠지, 하며 스스로 위로하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같은 날, 같은 나는 없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과거의 나를 잃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날의 나를 오롯이 떠올릴 수 있는 건, 마치 마들렌의 맛처럼, 사건 같은 경험을 통해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찰나처럼 그날의 전율이 시간의 공백을 가로질러 내 몸을 관통하며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 후, 우리가 다시 깊은 우울에 빠지는 건, 내 몸을 지나가는 그것, 과거의 내 것이었던 그것을 오늘의 나 안에 붙잡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밤 열 시, 이 순간에도 많은 연인들이 모텔이나 호텔, 혹은 자신의 공간에서 자신들의 섹스가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범위인지, 또는 그 밖인지 가늠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그 가늠 따위는 밖에다 내 다 버리고 사건 같은 섹스 속에서 엄청난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어떤 섹스를 하든 지금 뿐이다. 내일이면 과거의 일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생각하며 이런 사람으로 살면서 이런 연인으로 보이며, 날 그렇게 보는 사람을 만나 남들 다하는 식으로 연애를 하고 섹스를 하고 살아야지 생각하고 산다. 그러나 아직 당신이 젊다면, 또는 젊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수많은 가능성이, 수많은 나를 만날 가능성이 여전하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살든, 어떤 섹스를 하든 답은 이것뿐이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 않았으면 한다. 이렇게 저렇게 살면 결국엔 이러저러한 내가 되리라 믿으며 오늘의 나를 미래의 나로 이어지는 계열체의 한 점으로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것이, 그렇게 믿고 연애를 하고 섹스를 하는 것이 우리를 불안으로부터 구원한다고들 하지만, 알다시피 어디 인생이 그렇던가. 당신은 당신 스스로에게도 아직 밀봉된 선물 상자인지 모른다. 어떤 맛이 날지 마셔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20년 산 위스키인지 모른다. 아직 못 뜯어봤을 당신, 아직 못 마셔 봤을 당신이 오늘의 당신과 내일의 연인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체는 미래로부터 도래한다는 백상현의 말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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