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종아리가 뭉친 지 3일이 지났다. 여전히 걸을 때 불편하다. 핀 수영을 하다 뭉친 것인데 이렇게 오래간다. 한 십 년 전만 해도 다음 날 오후면 괜찮아졌다. 아마 이십 년 전이었다면 뭉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이를 잘 먹기 위해선, 막을 수 없는 신체의 노화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며칠 전 침대에 누워 아내와 몇 마디 나누다가 툭하고 말을 던졌다. 아주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오십이 넘어서야 했다. “당신 손이 스치기만해도 그게 딱딱하게 서고 그러니까...뭔가, 당신이 착각하는데, 내가 언제까지 작동 될 수 있을지 몰라. 그러니까 아직 그게 서고 허리 들썩일 수 있을 때, 하자고 해. 내가 하자고 하면 다행이라 생각하고. 나중에 뒷북치지 마. 나중에 안 될 때 오면 진짜 산에 들어갈지 몰라. 쪽팔려서.”
그러자 아내가 답했다. “음. 당신은 그럴 수 있지.”, 내가 말했다. “자연인? 그거 별 거 아냐. 그냥 남자 구실 끝나서 보채는 여자 없고, 돈 달라는 새끼 없고, 뭐, 이런저런 용도가 끝나서 땡중처럼 처 박혀 사는 거야.”, 이렇게 냉소적인 말을 남기고 잠들었다.
"밝히다.", "밝히는 사람"
사전에서 남자나 여자를 “밝히다.”의 의미는 “밝히다.”의 네다섯 번째 뜻으로 나온다. 흔히 우리가 “돈을 밝히다.”, “여자를 밝히다.” “남자를 밝히다.”, “색을 밝히다.”, “먹는 것을 밝히다.”라고 할 때의 뜻이다. 이때의 “밝히다.”는 “드러나게 좋아하다.”의 뜻이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거기에 환장한 인간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A”를 좋아할 때 이 “밝히다.”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점이 생긴다. 왜 “밝히다.”일까? 밝히는 것은 어둠을 물리치고 환하게 하는 것이다. 그 환함 속에서 나와 타자, 사물과 환경이 명백히 드러난다. 결국 밝히는 것은 곧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은 알고 싶은 진실, 찾고 싶은 사물, 원하고 갈망하는 그것을 얻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이때의 눈은 욕망의 헤드라이트 역할을 한다.
누군가 당신을 이렇게 불을 켠 채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지나가는 변태나 머리 벗어진 부장님이나 가슴보다 배가 더 나온 과장님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도 사랑하는 이가 당신을 이렇게 본다면 말이다. 그럼 당신도 불을 켜야 한다. 당신이 불을 켜지 않으면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불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 거기엔 빛도, 뜨거움도 없다. 빛이 없는 곳에 열이 없고 빛과 열이 없는 사랑은 두 사람을 밝게 해 줄 수도, 뜨겁게 해 줄 수도 없다.
담담한 밝힘
난 밝히는 여자-난 평범한 이성애자다-를 만난 적이 없다. 나만 보면 벗겨 먹지 못해 환장하는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날 안고 싶어서, 섹스를 하기로 작정하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고 날 불러낸 여자는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어딘가에 썼는데 그런 경험은 한번 해볼 만하다. 특히 한국 남자라면. 유별난 멘트나 문자를 보내서 유혹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한 메시지를 보냈다. 다들 그랬다.
오늘 (수업/일) 끝나고 뭐 해? - 음 별 거 없어.
그래? 그럼 저녁에 봐. 당신이 좀 보고 싶네. - 그러자. 어디로?
00 모텔로 와 - 응. 알았어.
또는 맥주를 마시다가....
몇 잔 들어가니까 땡기네. - 그래? 그럼 해야지.
그럴까? - 이것만 마시고 나가자.
오늘 모텔비는 내가 낼 게 - 응? 왜?
뭐. 내가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 그래 그럼. 난 그럼 맥주나 좀 사갈까?
물론 그 여자들이 작정하고 무슨 엄청난 코스프레를 겉 옷 안에 숨기고 있거나 해외에서 직구입한, 입는 방법부터 미스터리한 속옷을 입고 있진 않다. 그냥 일상에서 금방 빠져나온 차림새다. 그러나 내가 들어가면 스위치가 켜지고 미친 듯이, 그리고 게걸스럽게 날 먹어치운다. 그렇게 무서운 식욕 같은 성욕을 해결하고, 사람과 사랑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나면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담히 한다.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내 손길을 음미하면서, 자신의 손으로는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 페니스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그러다 점점 그 손이 빨라지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내일은 당연하지 않다.
수영에 관한 매거진에 썼듯이 많은 청춘들이 내일을 당연시한다. 언제라도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킨 강사도 놀랄 만큼 엄청난 운동량을 소화하는 우리 반의 아저씨, 아줌마들을 이해 못 한다. ‘그깟 수영, 뭘 그렇게 열심히 하시나. 천천히 하면 되지.’
우리 반의 주력은 4, 50대다. 삼십 대 중후반 두세 명, 이십 대도 두세 명 정도다. 4,50대에겐 어떤 절박함이 있다. 운동할 짬을 내는 것도, 섹스할 짬을 내는 것도 쉽지 않다. 짬이 허락될 때 최대한 열심히 해서 최고의 효과를 내야 한다는, 그런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다. 우리 사이엔 이런 심정에 대한 공감대가 있다.
조금 늦게 들어와서 끝나자마자 나가야 하는 1번이 이런 절박함과 간절함이 가장 크지 않을까? 그는 어쩌면 수영이 끝나고 나면, 점심도 거르고 직장이나 일터로 긴박하게 차를 몰고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전력으로 앞서 물살을 가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난 어떤 초조함과 절박함, 간절함이 느껴진다. 나 또한 마찬가지 마음이니까.
어제 새벽, 꿈을 꿨다. 후배가 내게 물었다.
“칸트, 읽어야 됩니까?”
내가 아주 시니컬하게 답했다.
“칸트? 야이~씨. 그럴 시간 있으면 섹스나 더 해. 그게 남는 거야.”
불경스럽나?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 봐라. 주말에 등산을 가 봐라. 남자/여자로서의 수명이 다한 사람들이 거기 있다. 아직은 죽지 않았음을, 그런 수컷임을 과시하기 위해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채 큰 소리로 통화하고 있는 아저씨가 있을 것이다.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고 진한 화장과 요란한 모자를 쓴 채 등산을 하는 아줌마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 웅변 해봤자 소용없다. 다 된 건 다 된 것이고, 끝난 건 끝난 것이다.
혹시, 당신을 밝히는 사람이 있나? 축하한다. “하~ 시도 때도 없이 왜 이래. 나 이러려고 만나? 네 머릿속엔 그 생각 밖에 없지?”라고 타박하지 마라. 그 힘이 떨어지면 그 관심도 떨어지고, 그 후에는 무슨 모임의 회장이니, 총무니, 고문이니 하는 자리를 탐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 그 한 명한테 제대로 대접받으면 해결될 일을, 밖에서,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인정받는 걸로 해결하려 한다. 결국 밖으로 돌고 직함에 목맨다. 봉사단체마다 이름을 올리고 교회에 가면 집에 오질 않는다. 그러니 밝힐 때 같이 밝혀라. 그것도 한 때다. 자연인으로 사라지기 전에 많이 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