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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언젠간 좀비가 된다.

진지하게 야한 농담들 38

by 최영훈

체력이 달리는 이유

얘기는 이렇게 흘러갔다. 지난 화요일, 울산의 한 어항(漁港)에서 야외 촬영이 있었다. 감독은 스태프로 인테리어 감독이자 드론 촬영 감독이기도 한 이 씨와 촬영 감독인 성씨를 불렀다. 둘 다 감독의 후배고 나하고도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다. 촬영이 끝나고 저녁에 한 잔 하면서 성씨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됐다. 회사를 나와서 프리랜서로 활동하는데, 요즘엔 제대로 카메라 잡을 줄 아는 놈이 없어서 되려 퇴사 후에 일이 더 많아져서 바쁘다는 소식을 먼저 전했다. 이어서, 집에 가면 두 아들과 놀아주느라 체력이 달린다는 말을 한 후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작가님, 제가 와이프랑 일곱 살 차이가 나거든요. 하~ 이제 저는 슬슬 내려오는 나이인데 아내는 지금 피크라 체력이 두 배로 달립니다.”, 이게 쉰이 넘은 작가 앞에서 할 소리인가? 스멀스멀 올라오던 분노를 지그시 누르며 “야, 이거 뭐, 좋은 거 챙겨 드셔야겠네.”하며 맞장구를 쳐 줬다.


하지 않는 측근들

이 이야기를 어젯밤, 애가 자러 들어간 후 아내에게 해줬다. 아내는 딸과 함께 들인 봉숭아물이 조금 더 배일 때까지 기다린 후 아예 빼고 자겠다며 거실에 앉아 있었다.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아내가 말했다. “아, 그런 사람이 진짜 있구나. 난 내 주변에서 섹스가 좋다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아, 한 사람 있다. 예전에 알던 간호사 한 분. 그분 말고는 다들 아파서 못 하겠다, 분비물이 나와서 싫다, 뭔가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난 이 말에 딱히 토를 달지 않았다. 아내 주변과 회사엔 실제로 그래 보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겉은 아주 멀쩡한.


대학에서 깨달은 것

대학은 특이한 곳이다. 강사와 교수는 계속 나이를 먹는 데 학생들은 계속 같은 나이의 청춘들로 바꿔 채워진다. 함께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교수와 강사만 나이를 먹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학에서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젊음이 강렬하게 와닿는다. 대학에서 한참 강사를 할 때, 난 겨우 삼심 대 중반이었다. 그 나이에도 여학생들을 보면 눈부셨다. 젊다는 건 그 자체로 좋은 거라는 걸 실감했다.


다들 잔뜩 꾸미고 좋은 백을 들고 와서도 뭔가 불안한지 연신 거울을 봤지만, 내 눈에는 다들 예뻐 보였다. 키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마르면 마른 대로 글래머면 글래머인대로. 난 이때, 또 절감했다. 젊음이란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것임을. 저 눈부신 생명력과 약동하는 에너지는 저 시절이 지나가면 무엇으로도 되살릴 수 없는 것임을


나도 젊은 나이였지만 그들 옆에 있으면 내 나이가 실감이 났다. 가까이 가는 건 고사하고 함께 사진도 찍지 않았다. 그 투샷은 너무 서글펐다. 다시 말하지만, 젊음과 그 젊음의 에너지는 사회적 지위나 돈이나 무슨 명품이나 고급 자동차 따위로는 살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그때 절감했다. 그때 학생들에게 그랬다. “어이, 다들, 힘 있을 때 해야만 하는 게 딱 두 개 있어. 하나는 공부, 하나는 연애야. 다들 열심히들 해.” 나중에 애를 낳고 난 이후에는 여기에 육아를 추가했다.


성적 기능이 사라진 뒤

갱년기가 지나고 완경이라 부르든 폐경이라 부르든 여자의 생산 기능은 멈춘다. 남자 또한 마찬가지다. 마흔이 넘어가면 언제 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쉰이 넘어가면 남자도 무섭고 여자도 무섭다. 물론 각기 다른 이유지만. 그래도 오십 대까지는 그럭저럭 남자 구실을 한다. 물론 내 주변 남자들 중에는 그걸 비뇨기로만 쓰는 사람이 제법 많지만.


그렇게 어느 순간, 하루키가 말한, 뜨거웠던 시절의 기억으로 몸을 덥혀야만 하는 시절이 온다. 스스로는 열기를 낼 수도 없고 함께 열을 내줄 사람도 없으며, 그 열을 내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와 기능도 없어진 시절. 그 시절의 사람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좀비와 비슷하다. 뜨거운 피도, 힘찬 맥박도, 온기도, 부드러운 피부도 없다. 젖지도, 힘차게 커지지도 못한다. 사회적 존재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젠더리스한 존재.


성적 기능이 사라진 인간은 그 기능을 대신할 뭔가를 열심히 찾아 내세운다. 가장 좋은 건 인격이다.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인격과 소양이 부족한 “좀비”는 권위와 지위를 앞세운다. 그것도 없으면 돈으로 어린 사람을 움직인다. 아무것도 없으면 나이라도 앞세운다.


좀비의 시간

대중문화 속 좀비는 대체로 신인류의 출현과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영혼 없는 소비자의 메타포다. 그런데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열정 없는, 생물학적인 노화가 찾아오기 전에 이미 조로(早老)한, 그야말로 목석같은 섹스리스 인간을 표현하는 메타포로도 좀비는 딱이다.


살아 있는 인간은 물어뜯어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드는 좀비. 자신의 생기 없음과 에너지 없음이 드러나지 않게 함께 움직이며 스스로를 숨기지만, 그렇게 무리 지어 살아도 아무런 관계-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도 맺지 않는 존재. 그래, 생각해 보니 좀비는 생명이 있는 인간을 죽이긴 해도 그들과 무리를 짓지도, 관계를 맺지도 않는구나. 영화 <웜바디>와 <새벽의 황당한 저주>의 재미는 이 법칙을 비트는 데서 나왔다.


다른 글에도 썼지만, 수영장의 회원 중엔 설렁설렁 시간만 보내는 사람이 있다. 아니 의외로 많다. 그들에겐 수영 시간 그 자체에 대해서도, 수영으로 체득할 수 있는 체력이나 건강에 대해서도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언제든 할 수 있고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체력과 수영 실력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섹스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마인드려나?


좀비의 시간이 온다. 아닌 척하지만 이미 여자로서, 남자로서 생명이 끝난 존재로 살아야만 하는 시간이 온다. 그런데 벌써부터 그렇게 좀비로 살기로 했다면... 말리지 않겠다. 말릴 수도 없고.... 대신 가까이 오지는 마라. 좀비는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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