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야한 농담들 30
자, 약속대로 에로틱에 대해, 색기에 대해 얘기할 차례다. 소위 야한 사람, 섹시해 보이는 사람, 또는 그런 조건이나 상황에 대해 얘기해 보자는 것이다.
난 앞선 글에서 내 뒤의 아줌마에 대해 한참 칭찬을 늘어놓은 뒤 이 아줌마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했다. 그 뒤로 수영장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고 심지어 아줌마와 자유형의 롤링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으며, 눈을 마주치며 인사도 몇 번 했지만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여전히 그 아줌마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없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도대체 왜?
그렇다. 여자 수영복은 노출이 심한 옷이 절대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발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말한 수영복은 비키니가 아닌 경영(競泳) 수영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올림픽 수영 경기에서 보는 그 수영복 말이다.
아니, 그래도 그 수영복도 등이 훤하고 다리도 다 보여주고 팔도 다 나오고 가슴도 좀 보이지 않아?라고 반문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사실이다. 그러나 그 디자인과 절개선과 노출 부위는 신체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 오로지 신체가 수영을 하는데 편하도록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여성 속옷으로 말하면 아주 정직한 흰 면 팬티 같은 거란 말이다. 위생적인 속옷의 기능을 충실히 하도록 디자인된 그 속옷처럼 실내 수영장의 수영복도 그렇게 디자인된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의 실내 수영복은 신체의 장점이나 단점을 부각해 주지도 커버해주지도 않는다. 왜? 그런 용도로 디자인된 게 아니라니까.
신체는 반응한다. 타자의 시선과 상황과 분위기에 반응한다. 그래서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신체는 사무적으로 경직되고, 전날엔 슈트를 입고 경직된 회사원으로 살던 남자도 오래간만에 군복을 입고 예비군이 되면 늘어진다. 애인과 모텔에 들어간 신체는 에로틱하게 변하지만, 그 애인과 결혼해서 배우자가 되면 일상적인 신체가 된다. 가슴을 노출하더라도 아이에 젖을 먹이는 엄마는 에로틱하지 않다. 오히려 신성하다.
결론적으로, 벗는다고 다 야한 것이 아니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 수영장에서의 여성의 몸은 그냥 운동을 위한 신체일 뿐이다. 운동을 하러 온 신체는 에로틱함을 어딘가에 두고 왔다. 시선 또한 마찬가지다. 에로틱하게 봐야 신체도 에로틱해진다. 에로틱한 시선이 부재하면, 당연히 에로틱해질 이유가 없다. 결국, 아무 데서나 벗는다고 섹시해지는 것이 아니다. 허구한 날 야하게 입고 다닌다고 해서 섹시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시선과 신체의 조우가 있어야 비로소 신체는 섹시해진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에게 들은 이야기고 과학적(?)으로 검증된 이야기다. 묘하게 야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있다. 아내가 그런 케이스다. 아내의 고등학교 때 별명이 “관능의 여인”이었다. 웃기지 말라고? 진짜다. 아내의 친구들을 만나서 확인해 봤다. 지금도 사우나나 온천을 가면 할머니들이 몸이 예쁘다, 피부가 좋다 등의 말씀을 하시며 아내의 몸을 지긋이 본다고 한다. 할머니들이 말이다. 아내는 주말에 발레를 하러 가는데 거기서도 그런 말을 지겹게 듣는다고 한다. 같은 동작을 했을 뿐인데, “아이고, 뭐 이리 야시시 하노.”와 같은 말을 말이다.
그렇다고 아내가 엄청 특이한 신체 조건을 가진 것도 아니다. 키는 160, 가슴은 B컵 정도? 골반은 오히려 좀 작은 편이고, 힙도 그렇다. 허리는 짧고 다리는 길다. 피부는 아주 하얗다. 그런데 어찌 됐든, 이십 년을 넘게 보고 있지만 야하다. 이상한 여자다.
한 십 몇 년 전 이야기다. 여자 후배 하나가 연애를 했다. 같은 교회에 자기를 죽자고 쫓아다니는 성실한 청년의 구애를 못 이기는 척 받아줬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친구가 나한테 술자리에서 고백을 했다. “선배, 나 남친이랑 진도를 못 나가겠어요. 흥분이 안 돼요.” 뭔 소리냐고 물어보니, 남자가 소년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수컷의 분위기, 어떤 섹시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좀 사귀다 보면 발전되고 발견되겠지 하고 일 년을 버텼는데 그게, 또 그렇지 않더란다. 결국 그 후배는 섹시한 남자 하나를 골라... 그만하자.
수영복을 입은 신체라도 수영장에선 섹시하지 않다. 그러나 그 수영복을 신혼여행이나 "특정" 이벤트를 위해서 입게 되면, 그 달라진 맥락과 상황으로 인해 어떤 신체든 섹시해질 수 있다. 이런 맥락과 상황이 부재한 일상 속에선 나와 타자의 섹시함을 드러내는 것도, 그걸 발견하는 것도 쉽지 않다.
특히 나 자신의 섹시함을 발견하는 건 특히 어렵다. 매일 보는 나는 그저 일상의 나일뿐이다. 내가 보는 나는 그저 평범한 나일뿐이다. 사회적이고 공동체 속의 나. 그런 나로 살다 보면 섹시한 나로의 전환이 쉽지 않다. 의외로 엄숙하고 진지하고 유교적이며 가부장적인 데다가 청교도적인 생각으로 자신을 통제하며 사는 사람도 많다. 그렇게 통제하고 규제하며 사는 사람에겐 자신의 섹시함을 발견하는 순간도, 그런 섹시한 자신에 대한 긍정도 쉽지 않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외모도 몸매도 평균으로 수렴되는 아줌마, 아저씨가 된다.
약간 생각을 바꿔 말하자면, 타고나길 섹시한 사람도 있지만 모든 사람은 누군가에게 섹시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즉 아무리 무난하고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시선 앞에서 무지하게 섹시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이 사람 나한테 왜 이러지? 하고 의심하지 마라. 당신, 임자 만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