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첫째주, 대천 바름이를 뽑았다.
7월 1일, 월요일, 학교에서 투표가 있었습니다. 대천 바름이를 뽑는 투표였죠.
대천 바름이란, 은채 얘길 추려보면 대략 수업 시간에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수업 참여 잘 하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그런 친구에 표를 던지는 투표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후보를 정한 것 같지는 않고 무기명으로 투표를 했던 모양입니다. 결과는 은채의 몰표였습니다. 열 명 정도의 친구가 한 두 표씩 가져갔고 은채가 아홉 표를 가져갔습니다. 은채 말로는 선생님이 투표용지를 펼치면서 계속 자기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살짝 민망했던 모양이죠. 표정 관리를 어떻게 했을까요? 정말 궁금합니다.
은채는 학교와 집에서 다른 긴장도를 유지합니다. 학교에선 옷도 잘 입고 헤어 스타일에도 신경 쓰고, 자세에도 제법 신경을 씁니다. 또 나름 리더십도 있는 모양이고 주변 친구들도 잘 챙겨주는 것 같습니다. 또 선생님 심부름도 자주 하고 말입니다. 이런 은채도 집에 오면 완전히 애기가 됩니다. 소파에 벌렁 누워서 만화를 보기도 하고 아직은 아빠 앞에서 재롱도 부립니다. 엄마와 함께 있는 저녁 시간이나 주말이면 엄마 껌딱지 그 자체죠. 그래서 주말이나 휴일이면 저랑 운동을 같이 하러 나가거나 따로 외출하지 않으면 엄마 곁에 하루 종일 있으려고 합니다. 아내도 그런 은채를 딱히 뭐라 하지 않아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집에서 애기 같은 은채도 학교에선 나름 자신의 역할을 늘려가고 제법 비중 있는 존재감을 발산하는 것이죠.
은채는 앞서 말했듯이, 학교에서 만나는 선생님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그걸 집에서 곧장 실천하는 타입입니다. 최근에서는 방송 댄스 선생님이 춤을 연습해 오라고 하셨죠. 블랙핑크의 <Kill this love>라는 곡인데 솔직히 은채가 아니었으면 이런 노래가 있는지도 몰랐을 노래입니다. 은채의 성화에 동영상 사이트에서 안무 영상을 찾아줬습니다. 요즘엔 뮤직 비디오 외에 이렇게 안무 영상을 따로 만들어서 프로모션을 하는 모양입니다. 자연스레 아이들이 따라하면서 팬덤의 외연을 넓히고 그 깊이를 더하는 것이겠죠.
은채는 그 영상을 몇 번씩 돌려보면서 춤을 따라했습니다. 선생님한테 1절의 안무만 배웠는지 약 1분가량만 반복해서 따라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봤을 때는 연습 전과 후의 차이를 크게 못 느꼈습니다. 다만 동작의 순서를 더 잘 기억하게 됐다는 느낌은 받았죠. 그러나 선생님은 그 연습의 차이를 확실히 느끼셨던 모양입니다. 월요일, 그러니까 투표가 있던 날의 방과 후 수업이 바로 방송 댄스였는데 선생님이 연습곡을 해보라고 다들 시켰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30여명의 아이들 중에서 제대로 한 친구는 두 명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은채를 포함해서 말이죠. 은채는 선생님이 잘 했다 하시면서 칭찬 스티커를 네 장씩(?)이나 주셨다고 흥분해서 자랑을 했습니다.
은채가 저에게 몰래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 학기에는 방송 댄스를 안 할까 생각중이라고.
“왜? 너 좋아하잖아?” 전 놀라서 물었죠.
은채가 말하길 선생님이 이런 실력으로는 발표회를 할 수 있겠냐면서 제법 아이들을 압박하셨던 모양입니다. 은채는 그런 형태의 동기 부여가 살짝 스트레스로 느껴졌고요. 그러나 솔직히 블랙핑크처럼 추려면 초등학교 1,2 학년 애들이 일주일에 두 번 연습해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선생님은 집에서도 열심히 연습해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은채는 이 날, 연습의 가치를 느꼈던 모양입니다. 집에서 연습을 안 한 아이들과는 다른 성과를 보였기 때문이죠. 전 그저 집에서 맨 날 앞부분만 따라하고 발차기(이 춤의 킬 포인트가 바로 시원한 발차기입니다.)도 어설퍼서 별반 연습이 효과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저 즐겁게 추기나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은채가 반복의 중요성, 연습의 가치를 알아가는 시간은 또 있습니다. 방과 후 학교에서 배우는 바이올린이죠. 은채 말로는 벌써 그만둔 친구들이 수두룩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바이올린 선생님도 은채한테 “3개월 만에 그만두는 게 어디 있냐?”며 하소연 하시면서, 꾸준히 하는 은채를 칭찬하셨다고 합니다. 솔직히 생각해보면 어떤 걸 배울 때 처음 3개월이 힘듭니다. 수영도 등록해서 초반에 발차기 하고 음~파, 음~파 배우고, 물에 뜨고, 자유형을 좀 익힌 다음에 다른 영법을 익히는 데까지 대략 3개월이 걸리니까요. 이 3개월 못 참고 그만두고 다시 등록하고, 그만두고 다시 등록하는 걸 반복하면 영법의 자세를 세련되게 만들어주는 교정반으로 가기는커녕 몇 년이 지나도 초급반 신세를 못 면하죠.
그러니 바이올린은 오죽 할까요? 은채 말을 들어보니 한 줄 한 줄, 그 줄로 내는 음을 차근차근 배워간답니다. 통기타 배울 때처럼 C코드 잡고 “촤라랑”하며 느끼는 쾌감은 아예 없는 것이죠. 몇 달 동안 그야말로 한 음 한 음 정확하고 길게 내는 것만 배우는 겁니다. 어른인 제가 배운다고 해도 지겨운 과정니다. 은채는 이 지겨운 과정을 견뎌내고 요즘엔 그래도 여러 음을 번갈아 내며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이때까지 배운 음으로 구성 된 간단한 곡이겠지만 말입니다.
은채의 인내심은 이렇게 학교에서 긍정적으로 발휘되고 있습니다. 반복 학습을 무던히 견뎌내고 있고, 이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수준이 되기 위해선 시간을 들여야만 한다는 걸 깨달아 가고 있죠. 악기든, 운동이든, 춤이든 말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공부까지도.
은채는 처음엔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그저 외모로 눈에 띄는 아이였을 겁니다. 키도 크고 얼굴도 나름 선명하게 생겼고, 수업 시간에는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 있고, 떠들지 않고, 미술 시간에는 꼼꼼하게 잘 그리는 친구. 그러나 지금은 뭔가를 반복해 연습하여 실력을 쌓아서 결과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죠. 음악 줄넘기도, 바이올린도, 방송 댄스도, 그림도, 하다못해 종이 접기까지. 은채는 자기가 잘 하고 싶은 것은 단순하고 지겹더라도 꾸준히 반복 연습하고, 그 기초 과정을 무던히 참아내야지만 수준이 높아지고 친구들을 앞서 갈 수 있다는 걸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학(주산, 학습지, 학교에서 내주는 수익힘까지)숙제도 빠지지 않고 하고, 패드로 종이접기를 검색해서 따라 접어보기도 합니다. 딸 가진 아빠로서 기대 이상, 예상 이상의 딸이긴 하지만 반면에 그렇게 모든 일에 애살을 기울여 하는 하고재비 딸을 보면 안쓰럽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요즘 은채를 잘 표현하는 단어는 아마 이 두 단어. 애살과 하고재비일겁니다. 둘 다 경상도 사투리인데 엄마가 은채한테 잘 써서 찾아 봤습니다. 애살은 국립 국어원의 정의에 따르면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고자 하는 욕심과 애착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쓰는 표현이죠. 하고재비는 일반적으로 뭔가 새로운 걸 해 보려고 시도하고 그 일을 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잘하려고 하고, 끝까지 해 내려고 하는 사람을 칭할 때 쓰는 경상도 사투리 표현입니다. 아내가 이것도 해보고 싶다 저것도 해보고 싶다하는 은채에게 쓰는 표현이죠.
하고재비이자 애살 많은 은채는 당연히 달성해야 될 과제가 늘 발생하는 학교가 적성에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걸 다 하려고 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제 풀에 지칠 수도 있죠. 은채 친구 중에 지유라는 친구도 은채랑 비슷한 유형의 친구인데 방학 중 방과 후 학교를 일주일 꽉 차게 신청했다고 합니다. 그 친구 엄마가 이렇게 신청하면 엄마가 힘들다고-그 친구한테는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여동생이 있습니다. -했더니, 자기한테 첫 번째 방학이니까 해보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답니다. 자식이 이렇게 나오면 솔직히 말릴 수 있는 부모는 없죠.
전 은채가 타고난 것만으로 칭찬 받던 시기에서 노력해서 성취한 것으로 인정받는 시기로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격과 재능, 시간을 들여서 노력할 때 더 많은 걸 얻고, 더 높은 수준을 달성할 수 있으며, 그로인해 친구나 선생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가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걱정 되는 것은 성과나 칭찬 같은 결과만 보고 달려가면서 과정이라는 소중한 경험을 가볍게 생각하는 건 아닐지, 또 때론 사람의 재능에 따라 노력해도 안 되거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게 되진 않을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물론 좀 더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 은채 스스로 자신의 달란트와 타인의 달란트의 다름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시기가 오겠죠.
그 시기가 올 때까지 은채가 열심히 해서 달성한 성과들을 칭찬해주고 그 과정에 조력자가 되어 주고, 지켜봐 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은채의 자아가 단단해지고 자존감이 깊고 높아지는 시간을 함께 보내줘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