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빠를 보는 딸
새벽 같이 촬영에 합류했습니다.
울산광역시의 중요한 광고를 촬영하는 현장에 일손 하나라도 더 보태자는 생각에 작가가 나선 것이죠.
사실 전날 급채 했습니다. 열한시부터 한 시간 정도 격하게 운동한 후 점심을 먹어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낮에 일 할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은채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자 약간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느껴졌습니다. 마침 엄마도 서울에 출장 가서 늦은 저녁에 오는 날이었죠. 족히 삼십분은 구토를 하고 삼십분은 욕실을 치운 것 같습니다. 애를 굶길 수는 없어 집에 있던 베트남 쌀국수 컵라면을 줬습니다.
잠시 후 다시 구토가 치밀어서 또 한참을 토했죠.
잠시 구토가 멎었을 때 은채에게 부탁했습니다. 혹시라도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에게 전화하라고 말이죠. 은채는 얼굴빛이 변하더니 잠시 울먹였습니다. 잘 못 말했음을 깨닫고 정정했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죠. 아직 “혹시”라는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알기에는 어린 가 봅니다.
은채와 단 둘이 있을 때 아픈 모습을 보여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은채가 다섯 살 때쯤 됐을 때, 그 해 겨울에 처제가 미국에서 놀러 왔습니다. 처제가 전주에 가 보고 싶다고 하자 마침 광주에 출장 가 있던 막내 동생, 그러니까 은채의 하나 밖에 없는 삼촌도 볼 겸 아내는 처제와 여행을 갔었습니다. 그때 전 어떤 기업의 역사를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었는데 인스턴트 커피를 달고 살았습니다. 믹스 커피가 아니라 유리병으로 파는 그 인스턴트 커피 말이죠. 그 커피를 진하게 타서 설탕 두 숟가락을 넣어서 마시는 것이 그때 습관이었습니다.
그날, 은채를 어린이집에서 데려 온 후 잠시 있는데 갑자기 심장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어지러움이 몰려 왔고 몸이 무기력해졌죠. 앉아 있기도 힘들어서 소파에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은채한테 거짓말이 통했습니다. 아빠가 좀 피곤해서 그러니 혼자 만화 보고 있으라고 하니 은채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저녁까지 잘 차려줬으니 더 그랬겠죠. 다행히 몸의 이상 증상은 한 시간 여 만에 진정됐습니다.
아내가 돌아온 후 얘기를 했더니 심장에 무슨 문제가 생겼을지 모르니 정밀 진단을 받아 보라고 했죠. 그래서 그야말로 심장 내과에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받아봤습니다. 심전도 테스트, 운동 부하 심장 검사, 활동 중 심전도 검사까지 받았습니다.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었죠. 의사는 종종 커피 알레르기가 갑자기 생겨서 이렇게 찾아오는 환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전 커피향이 너무 진한 커피숍에는 갈 수 없게 됐습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말이죠. 2층으로 된 커피숍에만 겨우 갈 수 있게 됐죠. 카페인 함유량이 좀 많은 커피를 마시면 여지없이 머리가 아픈 건 당연하고요.
어제, 은채에게 아빠가 아픈 건 커다란 공포라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아빠가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을 상상만 해도 은채는 속상해 합니다. 농담으로 집을 나간다는 소리만 해도 은채는 화를 냈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빈 말이라도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죠. 그런 은채에게 아빠가 아파하는 모습은 아빠의 부재를 상상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떤 병에 걸려야 사람이 죽고, 어떤 병이 가벼운 병인지, 어떤 증상이 어떤 병의 결과인지 알 수 없는 은채에게 아빠의 구토는 아주 심각한 병의 증상으로 해석 될 수도 있었겠죠.
그날 밤 잠들면서 다짐 했습니다.
‘술이든, 일이든 뭐든. 무리하지 말자. 오버하지 말자. 객기 부리지 말자.’
‘은채가 날 필요로 할 때까진 건강하게 최대한 오래 있어주자.’고 말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모든 아빠들이 그렇겠지만 내 건강이 오직 나만을 위한 게 아님을 새삼 깨달았던 밤이었습니다.
새벽 여섯시, 울산 태화강의 촬영 현장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부탁했습니다.
“은채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어제 은채 많이 놀랐어.”
아내는 알았다고 했습니다. 문을 조금 열어 은채가 자는 방을 들여다봤습니다. 은채는 살짝 잠이 깨서 “안녕.”이라고 속삭이더군요. “좀 더 자.” 은채는 금세 눈을 감고 잠을 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