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쇼핑, 고르고 고르다.
낮에 아빠가 솜씨를 부린 골뱅이 무침 소면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엄마가 의료 봉사 후에 챙겨온 거창의 막걸리를 곁들였죠. 은채는 새벽에 이불을 여지없이 차고 자서인지 배가 살살 아프다며 소면을 사양했습니다. 마침 은채가 좋아하는 튀김우동 컵 라면이 있어서 그건 먹겠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했습니다. 참, 마성의 컵 라면, 저도 인정합니다.
그렇게 오후 세시쯤 됐을까요? 은채가 공부방에 있는 저한테 왔습니다. 자기 인스를 사야겠는데 다이소에 같이 가줄 수 있겠냐는 겁니다. 마침 엄마는 새벽에 잠을 설친 탓에 피곤했던 터라 낮에 잠시 쉬어줘야 할 것 같아서 은채를 데리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막걸리 기운이 살짝 남아 있었지만 시원한 지하철이라면 문제 될 것 없었죠.
인스란 인쇄소 스티커를 말합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죠.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아이들 스티커는 도양의 모양대로 떼어 붙일 수 있게 절개 되어 있죠. 반면 인쇄소 스티커는 그 절개선 없이 아이 스스로 오려서 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매력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죠. 은채도 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 돼서 이 세계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저한테 사달라고 하죠. 가격도 얼마 안 해서 보이는 데 가게 되면 하나씩 사주곤 합니다. 이번엔 자기 지갑에 이천 원이 있으니 쇼핑하는데 데려다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다이소가 있는 경성대는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걸어가도 되지만 은채가 지하철을 고집해서 시원한 지하철을 타고 갔습니다. 엄마는 집에 있는 열대어 구피의 물고기 밥도 있으면 사오라고 했죠. 엄마가 사무실에서 키우던 구피들이 불어나서 어쩔 수 없이 몇 마리를 갖고 왔거든요. 은채는 엄마의 지령도 받은 터라 신나게 외출 준비를 했습니다. 아빠가 골라준 헐렁한 티에 헐렁한 조깅 반바지, 질끈 동여 묶은 머리칼도 개념 치 않았죠.
은채는 다이소에서 오천 원짜리 인스 세트를 골랐습니다. 랩핑지와 함께 있는 전형적인 세트였습니다. 랩핑지는 A4용지만한 포장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문제는 은채가 가진 돈이 2천 원 뿐이라는 거. 그래서 전 은채한테 이천 원을 받고 제 카드로 결제해줬습니다. 나중에 3천 원 갚으라고 분명히 말하면서요. 물론 물고기 밥은 없었습니다.
근처에 있는, 역시 은채가 좋아하는 아트 박스에 갔습니다. 뭘 사지 않아도 아이들이 한 시간 이상 홀린 듯이 떠돌아다니는 곳이죠. 초딩들의 백화점이나 면세점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요? 은채는 이런 곳에서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저한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합니다. 요즘 우리 부녀의 버릇이죠. 마트의 장난감 코너나 서점, 대형 문구 잡화점 같은 곳에서 은채가 사고 싶은 것을 발견하면 제가 사진을 찍어 주기로 했습니다. 지금 당장 살 돈도 없고, 사고 싶은 걸 다 살수는 없지만 언젠가 돈이 생기고 선물을 받을 때 - 생일, 크리스마스, 어린이날 - 가 되면 이 물건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가 사달라고 하고, 또 사주겠다는 약속과 계약의 표현이죠.
은채는 이날도 몇 장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봉제 소품 DIY세트, 아이 러브 페인팅이라는 번호 대로 따라 색칠만하면 작품이 완성되는 캔버스 그림 세트, 천 염색용 마커펜, 작은 미니어처 인형의 집 세트 등이었습니다.
무조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건, 저도 불편하고 은채에게도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뒤로 미루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이건 사실 제 자신에게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한 방법입니다. 중고서점에 가게 되면, 또는 그 사이트를 들어가서 좋아하는 분야를 스크롤 하다보면 눈에 띄고, 마음이 끌리는 책이 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책들을 당장 다 살 수는 없죠. 돈은 둘째 치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책상과 책꽂이에 많은 데 또 새 책을 산다는 건 순서를 기다리는 책에게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래서 일단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모니터 화면을 찍거나 서점에서 실물을 찍습니다. 따로 이미지 앨범을 만들어서 보관하죠. 아마 이런 아빠를 보아온 은채도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빠가 책을 언젠간 사려고 하듯이 나도 언젠간 이걸 사겠다.’ 뭐 이런 생각 아닐까요?
문구 잡화점보다 은채가 더 좋아하고 오래 머무는 곳이 중고 서점입니다. 이날도 은채는 바로 옆에 있는 알라딘 서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갔습니다. 은채는 어린이 서적 코너에서 잠시 둘러보다가 잠깐 <13층 나무집>을 들었다가 놨습니다. 제법 두꺼워서일까요? 그러나 미련이 남아 있는 거 같아서 검색을 해서 이 서점에 시리즈가 세권 있다고 가르쳐 줬습니다. 은채는 알았다고 하더군요. 앤디 그리피스의 <13층 나무집>시리즈는 말 그대로 13층씩 집이 커지는 시리즈입니다. 최근엔 <104층 나무집>까지 나왔더군요.
그 뒤엔 <신기한 스쿨버스> 시리즈를 들었습니다. 은채의 첫 번째 픽이었습니다. 잠시 후, 다른 서가에서 서성이던 저를 용케도 찾은 은채가 “아빠, 저학년 속담 좀 검색 해 줘요.”라고 부탁했습니다. 검색 결과 <자신만만 저학년 속담>이 딱 뜨더군요. 은채가 찾던 책이었습니다. 은채는 이 책을 가만히 앉아서 한 시간 넘게 읽었습니다. 끝까지. 아빠는 여기저기를 서성이다가 하루키의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를 찾아서 들고 와 옆에 앉아 읽었습니다. 진지하게 읽고 있는 딸 옆에서 킥킥대면서 말이죠. 은채는 서점에 들어오면 두 권 이상은 읽어야 나옵니다. 이날도 다섯 시가 넘어서, 엄마가 기다릴 것 같다는 재촉에 겨우 나올 수 있었죠.
사실 이날 은채가 가장 먼저 고른 책은 <13층 나무집>시리즈였습니다. 그러나 읽지는 않았죠. 왜 그랬을까요? 전 은채가 이 정도 두께의 이 정도 텍스트 양은 소화해 낼 수 있다고 보는데 말이죠. 아마도 선생님의 읽기 방침 때문 아닐까 추측 해봅니다. 앞서 말했듯이 선생님은 학기 초부터 아이들의 학습 능력을 다방면으로 측정해 봅니다. 아이들은 크게 수학과 언어 영역을 중점적으로 배우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선생님에게 가늠 받는 것이죠. 문제는 이 능력이 아이들마다 천차만별이라는 것이죠. 특히 언어 영역에서 말이죠. 쓰기와 읽기, 말하기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아이들은 다양한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고, 선생님은 아무래도 낮은 수준, 기초 수준의 아이들을 기준으로 놓고 가르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담임선생님의 교육 철학마다 다르겠죠. 은채의 담임선생님은 국어 시간에는 자음, 모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이것도 모르는 애들을 기준으로 두고 국어를 가르치시는 것이죠. 전 이 철학에 동의합니다. 초등학교란 원래 그런 곳이니까요. 문제는 읽기 능력이 천차만별이다 보니 선생님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서 반에 가져다 놓으신 책의 수준은 일정하지만, 아이들이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책의 수준은 들쑥날쑥 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아이는 이제 받침 없는 동화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아이는 은채처럼 <13층 나무집>시리즈에 눈이 가는 것이죠. 선생님은 이런 차이 때문에 행여나 아이들이 열등감을 느끼고, 부모님들이 조바심을 낼 까봐 아이들에게 일부러 그림은 많고 글은 적은 책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은채도 학교에서 책을 대출 할 때는 이 기준을 충실히 지키려고 매번 노력했지만 학습 만화를 빌릴 때는 어쩔 수 없이 이 기준을 어겨야만 했죠.
어쩌면 선생님의 이런 가르침 때문에, 은채는 아직 자기는 이런 시리즈를 읽을 때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구스범스>시리즈나 <제로니모의 환상 모험>시리즈의 유혹을 못 이겨내고 두꺼운 책을 덥석 들고 페이지를 정신없이 넘길 때가 올 것 같습니다. 제가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와 <해저2만리>, 뵈르거의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같은 소설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 후, 초등학교 고학년쯤에는 어쩌면 저처럼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나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에 빠질지도 모르죠. 제 궤적을 그대로 쫓는다면 중학교 때는 아가사 크리스티로 넘어갈지도 모르겠군요.
혹시나 해서 소설들을 정리하면서도 코난 도일 전집과 에드거 앨런 포우 전집은 남겨 놨습니다. 언젠간 어린 주인이 나타날 것 같아서 말이죠. 그리고 아빠의 예상보다 빨리 새 주인이 나타날 것 같습니다. 아홉 권이나 되는 셜록 홈즈 전집과 847페이지나 되는 <우울과 몽상>을 밤을 새가며 은채가 읽을 날이 벌써 기대가 됩니다. 그때가 오면, 은채의 대화 상대가 되기 위해서 저도 다시 읽어나가야 할지도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