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중순부터 4주 동안 처남집에 있었다. 마침 바쁜 시기가 겹쳤다. 울산에서 전국체전이 열리는 동안 울산시의 공무원들은 찾아온 손님들에게 울산에 대한 이것저것을 홍보하고 싶어 했다. 여기에 10월 초에는 바뀐 지자체장의 취임 100일이 있었다. 이와 관련한 홍보 영상 의뢰가 이어졌다.
문제는 날씨였다. 9월은 흐리거나 비가 왔다. 쾌청한 가을 날씨는 열흘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였다. 감독과 난 속이 타들어 갔다. 카피와 콘티가 통과되고 연기자를 비롯한 스텝들의 스케줄을 잡았다 취소하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두 개의 태풍이 이어졌고 촬영 장소로 물색해 놓은 울산의 주상절리와 그 앞의 몽돌 해변은 태풍으로 인해 풍경이 바뀌었다. 그래도 감독은 촬영을 강행했다. 그 후 감독은 무려 2주 가까이 밤을 새우며 편집했다.
난 나대로 처남의 낯선 책상에서 새로 들어온 일을 위해 자료를 찾고 칼럼을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아침에는 집에서보다 삼십 분 일찍 일어나서 아이의 등교 준비를 도왔다. 밥을 차려주고 준비물을 체크하고 날씨를 봐가며 입을 옷을 준비했다. 딸이 원하는 시간에 학교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처남집에서 일곱 시 반에는 나가야 했다. 일찍 학교에 가는 걸 왜 그리 좋아하는지, 솔직히 4년 내내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딸의 조바심을 존중하여, 늘 이른 등굣길에 나섰던 4년이었다.
그렇게 십 분 가까이 <광안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고 세 정거장을 가서 <경성대/부경대역>에 내려 다시 십오 분 정도를 걸어야 학교에 도착한다. 딸은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4주를 그렇게 했고 나도 그랬다. 덕분에 주말을 제외하면 대부분 날엔 2만 보 가까이 걸었다. 살이 2킬로그램 정도 빠졌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집으로 다시 들어가기 1주 전에는 몸살을 앓았다. 코로나19가 터지고 난 후 처음 아팠다.
딸은 그렇게 부산한 4주 동안 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9월 하순에 연이틀 이어졌던 생존 수영 실습도 잘 해내서 수료증을 받아왔다. 10월 중순에 있는 학예회 연습을 틈틈이 했고 급격히 변하는 날씨에도 건강했다. 데리러 가면 종종 남자 친구 주현이와 함께 걸어와서 인사를 하는 걸 보면 둘 사이도 별 탈이 없는 것 같다.
두 개의 상장
삼촌 집에 있는 동안 딸은 두 개의 상장을 받아 왔다. 두 개 다 미술 관련 상으로 하나가 <우리 동네 예쁜 간판 그리기>였고, 다른 하나는 월드비전이 주최한 아프리카 친구들을 위한 <꿈 엽서 그리기 대회>였다. 앞의 대회는 부산의 옥외 광고 관련 협회가 주관한 것이고 뒤에 대회는 당연히 월드비전이 주최다. 딸은 동네 간판 그리기 대회에서 특선을 하여 문화상품권을 상품으로 받아 왔다.
이 상을 받아 온 저녁, 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아빠, 맨 날 입선만 하다가 특선하니까 기분이 좋아.”하고 말했다. 이런 대회에서 주는 상이야 주최 측이나 받는 사람이나 상이 몇 개나 되는지 셀 수 없을 만큼 상 인심이 후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입선과 특선의 차이가 뭐 그리 대단한가 싶었으나 입 밖으로 그런 생각을 꺼내진 않았다. 그저 잘했고 수고했다는 말만 했다.
딸은 사교육을 두 가지 한다. 하나는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했던 수학 학습지고 다른 하나는 미술 학원이다. 수학 학습지는 “수포자” 던 엄마 아빠의 전철을 밟게 하지 않기 위해 부부가 의견 일치가 되어 시켰고 미술 학원은 그리기를 좋아하고 더 잘하고 싶어 하는 딸이 원하여 보냈다.
그렇다고 딸이 그림에 엄청난 소질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색감이 좀 있고 오래 앉아 집중하여 뭔가를 하는 걸 잘하는, 인내심이 강할 뿐이다.
이제까지 살면서, 그리고 카피라이터 일을 20년 가까이하면서 다양한 예체능 분야의 인재와 인력들을 만났고, 그중엔 천재에 가까운 사람도 몇 있었다.
대학 시절,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음대 미대 학우들의 일상을 보면서 그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얼마나 지겨운 과정을 거쳤고 대학 내내 그 전공을 잘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게 됐다. 미대와 음대 1, 2학년 학생들이 하는 걸 보면 말이 좋아 예술이지 그야말로 단순노동에 가까운 반복 작업이 많았다. 다들 나름 동네에선 그림깨나 그리고 노래깨나 해서 이름도 날렸고 동네 어귀에 현수막도 걸려 봤던 친구들도 예외가 없었다. 우리가 사진으로 본, 그 형태가 일그러진 유명 발레리나의 발이 반복된 연습의 세월 속에 만들어졌듯이 예체능 분야의 대가가 되기 위해, 아니 최소한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기 위해선 재능은 물론이고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난 딸이 설령 예체능에 어느 정도 재능이 있더라도 그걸 시킬 생각이 없다.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걸로는 타고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는 분야가 예체능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설령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일정 수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경쟁 과정이 있어야 하며, 그래서 설령 천재적 재능이 있더라도 집안의 지지와 후원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는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천재
실제로 본 천재에 가까운 사람 한 명이 생각난다. 이십 대 시절 다니던 교회의 후배인데 그 친구는 피아노 천재였다. 천재들의 스토리가 으레 그렇듯 그 친구 역시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다. 그저 작은 시골 교회 1층, 오랜 세월 속에 반들반들해진 긴 마루가 깔린 그곳에 있던 업라이트 피아노를 혼자 두드리며 피아노를 터득했다. 처음엔 찬송가의 4부 악보를 그대로 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재즈의 화성을 익혔고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절대 음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절대 음감을 가진 사람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신기한 재능인지 아마 감을 못 잡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밴드 연습 시간, 보컬리스트가 낯선 곡을 부르려 한다. 그런데 악보가 없다. 보컬리스트가 노래를 시작한다. 한두 마디 불렀을까? 어느덧 피아노 반주가 따라간다. 보컬리스트가 뱉어낸 음을 찾기 위해 머뭇거리며 건반을 더듬지도 않는다. 그저 어느 순간, 귀신같이 음을 찾아 들어간다.
그 후배와 함께 지역의 교회 음악 밴드에서 수없이 합주하는 동안 이 장면을 몇 번이나 봤지만 볼 때마다 신기했다. 난 그 후배가 음을 잡고 코드를 잡으면 “대용아. 코드가 뭐야?”하고 물은 뒤에 그 친구가 코드를 외쳐주는 걸 듣고 나서야 둥둥거리며 베이스를 깔아줄 수 있었다. 이 차이가, 천재적 재능과 그저 약간의 음악적 감각이 있는 사람의 차이다.
내가 먼저 대학을 가고 그 후배가 대학을 갈 때쯤, 온 교회 식구들이 그 친구의 전공 선택을 궁금해했다. 음대를 갈 건지, 그즈음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한 실용음악과를 갈 건지 물어봤다. 자기는 음악을 안 할 거라고 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후배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집안 사정 탓으로 돌리는 이도 있었고, 후배의 성격 탓이라는 이도 있었다.
이런 엇갈리는 추측 속에서도 그 후배의 재능을 아는 지역의 기독교 음악을 하던 청년들은 그가 음대를 가고, 음악을 업으로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그 친구는 음대에 가지 않았다. 나중에 SNS를 통해 근황을 보니 평범한 직장을 다니면서 음악은 그야말로 취미로, 부업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경험들 때문에, 어린 시절 섬광처럼 드러난 재주에 놀라 여기저기 학원을 보내거나 유명한 음악가나 화가, 운동선수가 되지 않을까 설레발을 치며 기대하지는 않는다. 나 또한 어린 시절엔 글깨나 쓴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산력 차원이고 그야말로 글 자체를 아름답게 쓰거나 표현력이 좋은 사람하고 그 결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기에 고객이나 지인이 내 글에 인사치레라도 칭찬을 남기면 적당히 웃어넘긴다. 좀 친한 사이라면 “뭐, 공장 돌리고 있습니다.”나 “아이고, 이십 년 정도 했으면 이 정도는 해야 밥값 하는 거지.”하는 정도의 농담을 곁들이면서.
하루치 기쁨, 적절한 축하
아빠가 이런 타입의 사람이어서인지 딸은 금세 평정심을 찾았다. 아니면 그 문화상품권을 <올리브 영>이라는 잡화점에서도 쓸 수 있다는 걸 안 후 뭘 살지 궁리하는 동안 특선의 기쁨이 가라앉았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4학년이 만 원짜리 상품권으로 그런 곳에서 살 수 있는 것이래야 잘해야 립 글로즈 정도 아닐까?
아마, 이렇게 금방 흥분을 가라앉힌 건 우리 가족만의 축하 방식도 한몫했을 것이다. 상을 받아 오면 “잘했어, 수고했어.” 하는 격려를 하고 좋아하는 치킨을 시켜주거나 한다. 그러면 그 상에 대한 공식적인 축하는 끝난다. 가까운 시일에 외갓집에 가게 되면 용돈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 봐야 여운은 며칠 안 간다. 어린이집 시절부터 그랬다.
나나 아내는 대회를 준비하면서 애가 받는 스트레스를 걱정하는 타입이다. 초등학교 2, 3학년쯤 되니까 학원에선 틈틈이 각종 미술 대회에 참가시켰다. 언제부터인가는 아예 미술 대회를 위한 그림을 준비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러나 딸은 그림을 배우고 싶었다. 차분하게 앉아 오랫동안 공들여 그림을 그리고 선생님의 피드백을 받고 수정하고 그렇게 서서히 자신의 그림 솜씨를 발전시키고 싶었다.
이 얘기를 3학년 때 엄마에게 했고, 아내는 원장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했다. 결국, 일주일에 하루를 가되, 세 시간 이상 그림을 체계적으로 배우기로 했다. 이때부터 딸은 소묘, 수채화, 아크릴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는 방법은 물론이고 정물이나 풍경화 등 다양한 소재에 접근하는 법도 배우기 시작했다.
무책임한 아빠의 한가한 생각
우린 여전히 딸에게 미술을 시킬 생각이 없다. 방과 후 교실에서 4년 내내 바이올린을 배우지만 음악을 시킬 생각도 없다. 음악 줄넘기도 아주 고급 수준까지 도달했지만, 체력을 위해서 계속 시켜왔고, 시킬 뿐이다. 그렇다고 딱히 딸이 이런 직업이나 전문가가 됐으면 하는 것도 없다. 아니 최소한 나에겐 그런 게 없다. 아내는 대화 중에 은연중 학자나 외교관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비쳤고, 미국에 사는 친할머니도 외교관이 되길 바라신다. 딱히 이유는 없는데 그냥 그런 느낌들이 있는 모양이다.
나? 난 무책임한 아빠다. 내가 저번에 얘기 안 했던가? 난 아직도 딸에게 초딩의 3대 덕목은 “3잘”, 즉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에 있다고 말하는 아빠다.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학교에 잘 가서 잘 지내고 집에 잘 오면, 그걸로 안도하는 아빠다. 수학이 어려워진다고 딸이 투덜대면 차분하게 하던 데로 꾸준히 공부하면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까짓 거 수학 못해도 어떻게든 살아지니 걱정하지 마라.’하고 생각하는 아빠다. 웃긴 건, 아내는 얼마 전 딸에게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는 수학을 못 하지만 그래도 직장 다니는데 크게 문제없다고.
살면서 상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아니다. 두 개 정도 생각난다. 하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한 신문사가 개최한 그림 대회에서 받은 상이고, 다른 하나는-이것도 상이라면-대학 입학 때 받은 성적 우수 장학금이다. 그 사이, 그리고 대학 졸업 이후 내가 상 받아서 온 가족이 축하 파티를 한 적은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섬광처럼 빛나던 영광스러운 기억 없이도 그럭저럭 지금까지 묵묵히 사는 걸 보면, 난 참 무딘 사람이거나 의외로 배짱이 좋은 사람이구나 싶다.
그나저나 남자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과거의 영광에 빠져 산다던데 내겐 그럴만한 영광의 기억이 없으니 나이 먹고도 계속 그 영광의 순간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노력해도, 아마도, 딸의 상장이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내 상장은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