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행복을 알아가는 중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15

by 최영훈

행복이 뭔지 모른다.

어떤 감정이 행복한 감정인지도 모른다. 일설에 의하면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동아시아에 받아들여진 건 19세기 이후라고 한다. 사전에선 행복을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하거나 그러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언제나 그렇듯 사전은 다른 여러 낱말을 맞물려 의미를 설명할 뿐 그 본연의 의미를 하드 보일드 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손에 잡히듯, 뺨을 맞듯, 하나의 개념이 육체로 와닿는 경험은 결코 흔치 않다.


다시 말하지만, 누가 내게 행복이 뭐냐고 물으면, 어떤 현상이 행복한 현상이냐고 물으면 답할 재간이 없다. 다들 나름의 기억을 헤집으면 나오는 행복한 유년 시절의 추억이 내겐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명절 때 불쑥 꺼낸 앨범에 몇 장은 있는, 부모, 형제자매 온 가족이 담긴 행복한 여행 사진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마주 앉아 술을 배우고 함께 땀을 흘리며 사우나를 했던 추억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가족이 함께 산 세월보다 뿔뿔이 흩어져 산 세월이 훨씬 길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난 여전히 행복이 뭔지, 어떤 현상을 콕 집어 행복하다고 부를 수 있는지 여전히 자신이 없다.


딸이 행복을 말할 때-여행

그러나 딸은 종종 행복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여행길에 좋은 호텔이나 펜션에 갔을 때 딸은 행복하다고 한다. 엄마가 프런트에서 체크 인을 하는 동안 그 옆에 꼭 붙어 있던 딸은 멀찍이 서 있던 아빠에게 오며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자기 몫의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딸의 설렘은 신체 밖으로 뿜어져 나와 내게도 전해진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몇 층이냐고 물어보고 잽싸게 버튼을 누른 후,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딸은 엘리베이터 내부를 두리번거리거나 경치가 보이는 창이 있는 엘리베이터라면 경치를 구경하면서 작은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성큼 앞장선다. 객실 앞에 서면 엄마에게 카드를 받아 자기가 문을 연다. 객실에 들어가 높은 침대와 하얀 시트, 깔끔한 욕실과 경치가 보이는 객실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한다. 엄마와 아빠는 캐리어를 잘 펼쳐 놓고 점심이나 저녁을 어떻게 할지 궁리하는 동안 침대에서 살짝 뛰어보거나 그 까슬까슬한 침대보 위에 늘어지게 누워 쉴 때, 딸은 종종 행복하다고 말한다.


처음 풀빌라를 갔을 때도 그랬다. 딸은 코로나19가 만연하던 여름방학에도 물놀이를 하고 싶어 했다. 아내는 고민 끝에 거제도의 한 풀빌라를 예약했고, 덕분에 나도 난생처음 풀빌라를 경험했다. 거제도는 경주와 함께 부산 사람이라면 자주 가는 여행지이고 딸도 제법 자주 갔는데 풀빌라는 기분이 달랐던 모양이다.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체크인 시간에 맞출 수 있겠냐며 연신 엄마에게 물었고 가자마자 물놀이를 할 거라고 몇 번이고 선언하듯 말했다.


통 창 앞으로는 광활한 원시림과 멀리로는 오목한 와현 해수욕장이 보이는 풀빌라에 들어서자마자 딸은 탄성을 내질렀다. “와.”, “야”, “너무 좋아.”를 연발했다. 아빠는 그런 딸과 함께 몇 시간이고 물놀이를 해줘야 했고 엄마는 끼니도 잊은 채 노는 딸을 위해 거제도의 가리비와 과일과 컵라면을 간식으로 연이어 내줘야 했다. 그때, 딸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딸이 행복을 말할 때-집

집에서도 종종 딸은 행복하다고 말을 한다. 파주와 의정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빠에겐 만만한 부산의 겨울이지만 부산에서 자란 딸에겐 부산의 겨울도 겨울이다. 영하로 내려가는 날도 몇 날 안 되고 눈도 안 오지만 부산의 겨울도 부산 사람에겐 추운 것이다.


용케도 그 날카로움이 죽지 않은 채 이기대를 넘어온 겨울 바닷바람이 동네까지 밀려오면 나 또한 그 앙칼짐에 놀라 절로 외투 깃을 여미는 날, 겨울 방학은 먼 어느 날 밤, 겨울이면 펼쳐주는 방한 텐트에서 겨울잠자리를 정성껏 정리한 뒤 제일 좋아하는 미키 마우스 이불을 덮고 누우면 딸은 “하이고, 좋다. 따시다.”, “아~ 행복해.”하며, 긴 감탄사를 조용히 연발한다. 잠들기 전까지 어깨라도 다독여 재워줄 요량으로 빈틈으로 아빠가 비집고 들어가 누울 때도 감탄사를 한숨처럼 말한다. “아~ 아빠다. 안아주세요.” 그렇게 꼬옥, 한참을 안아주면 어떤 말로도 설명 안 되는 따스한 숨을 길게 내뱉는다. 그 숨은 한숨도, 운동선수의 호흡도 아니다. 이 긴 숨소리에 이름을 붙인다면, 상투적이지만, 행복의 숨이라고 붙일 수밖에 없다.


소소한 기쁨들

딸을 키우기 전까지, 굳이 행복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만한 건 쾌감에 있었다.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고 입으로 먹는 것들에 있었다. 마감일에 맞춰 힘들게 카피를 써주고 퇴근한 저녁, 혼자 마시는 맥주 한잔. 아내의 부드러운 피부에 코를 박고 한참을 안고 있을 때. 열심히 뭔가를 설명하는 아내의 말을 귓등으로 넘겨들으며 아내의 홍조 띤 얼굴을 유심히 볼 때. 힘들게 프로젝트를 완수한 후 함께 일한 노련한 베테랑들과 회식을 하며 맨 날 하는 이야기를 하며 키득댈 때. 오랫동안 찾았으나 구하기 어려웠던 책이나 그 값이나 내용면에서 살 엄두가 안 났던-예를 들어 존 맥피의 <이전 세계의 연대기> 같은-책을 사들였을 때. 이렇게 읽고 싶었던 책을 차가운 맥주를 홀짝이며 천천히 읽는데, 심지어 아직 몇 캔의 맥주가, 그것도 IPA가 냉장고에 남아 있을 때. 이럴 때 느낀 감정에 이름을 붙이라면, 상투적이지만, 행복의 순간이라고 붙일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걸 먹는 걸 볼 때

딸을 키우면서 경험해 본 적 없던 순간들이 덮쳐 왔다. 기어 다닐 때부터 시작하면 얘기가 너무 길어지니 최근 몇 가지 일만 얘기해 보자. 얼마 전, 앞서도 썼듯이 인테리어 때문에 처남 집에 잠시 신세를 지고 있다. 광안리는 묘한 곳인데 소위 원주민과 젊은 신규 주민, 그리고 관광객이 공존하고 있다. 거칠게 구분하면 바닷가 쪽은 관광객과 젊은 친구들이 주를 이루고 금련산에 가까운 동네일수록 원주민이 많이 산다. 그래서 식당의 조합이 아주 흥미롭다. 아주 고전적인 동네 맛집 식당들이 있는가 하면 당장 인스타그램에 올려도 손색이 없는 쿨하고 핫한 식당들도 넘쳐난다.


이렇다 보니 십 대에 접어든 딸과 맛있는 걸 좋아하는 엄마에겐 광안리 탐방이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어느 날 처남 집과 가까운 마트로 걸어가는 김에 동네를 탐험하는 도중, 송정 해수욕장을 고향으로 하는 송정 핫도그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와 딸은 “아, 맛있겠다.”를 연발했지만, 당장은 생필품 사는 데 집중해야 했기에 꾹 참고 작은 마트에 들어갔다. 그 마트에 들어가니 와플 가게가 눈에 보였다. 이 역시 두 여자 모두를 유혹했지만 용케도 그 유혹을 이겨냈다.


그다음 날, 딸을 데리고 집에 오는 지하철 안에서 딸이 이랬다. “아빠, 엄마가 나중에 집에 오는 길이나 아빠랑 둘이 마트 갈 일 있으면 송정 핫도그 꼭 먹고 오랬어?”, “응? 엄마 지령이야?”,“응”. 마침 이날 오후, 그 마트에 다시 갈 일이 있어서 동네 탐험을 재개했다. 갔던 길이 아니라 지름길을 찾아 동네를 사선으로 가로질러 갔다. 길 건너, 송정 핫도그에 들어갔다.


딸에게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했다. 딸은 기본 맛, 난 매운맛을 골랐다. 점원은 6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핫도그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내가 봤는데 핫도그 막대기 끝에 뭘 감은 다음에 거꾸로 집어넣어서 튀기고 있어.”, “그렇지. 아빠 어렸을 때부터 핫도그는 그렇게 튀겼어.” 딸은 그렇게 좋아하는 핫도그가 튀겨지는 걸 처음 본 모양이다. 따끈한 핫도그가 나왔다. 딸의 핫도그엔 설탕을 뿌려 달라고 했다. 딸은 싸락눈을 뒤집어쓴 듯한 핫도그에 케첩과 머스터드소스를 구불구불 뿌린 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그렇지만 입에 소스가 묻는 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처남집에서 처음 맞은 주말, 치킨을 먹었다. 근처에 아주 전통적인 치킨을 파는 동키치킨이 있어서 직접 테이크 아웃을 해왔다. 치킨을 먹기 좋게 펼쳐 놓자, 딸은 김이 나는 노릇한 닭다리를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애초에 들고 먹기 좋으라고 다리를 주기 시작한 것이 버릇이 됐기도 했고, 그 다리를 들고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치킨을 먹을 때마다 다리를 쥐어 줬더니 다리는 으레 제 것인 줄 안다. 치킨은 그저 맥주의 안주일 뿐인 아빠는 어떤 부위를 먹어도 상관없었고 아내 또한 그런 편이라 뭐라 하지 않았지만, 요즘엔 행여나 다른 데 가서도 그러지 않을까 걱정되어 아내나 내가 하나씩 먹곤 한다.


딸을 바라볼 때 솟아나는 감정

뭐, 이유야 어찌 됐든, 개수야 어찌 됐든 딸의 치킨을 먹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맥주잔 너머로 보이는, 입가에 잔뜩 기름을 묻히고 열심히 치킨을 먹는 딸의 모습을 보면 그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올라온다. 아니, 뭘 먹든, 딸이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렇다. 그건 안도감, 편안함, 느긋함, 만족감, 즐거움, 기쁨, 보람과 같은 단어들이 칵테일 되어있는 기분이다. 이 감정에, 이 복합적인 감정에 이름을 붙이라면, 상투적이지만, 행복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다.


며칠 전,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이었다. 평소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갈 때도 그랬듯이, 처남 집에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학교에서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딸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이날은 선인장을 갈라 본 이야기를 했다. “아빠, 오늘 수업 시간에 선인장을 갈라 봤거든, 와~ 난 그 안이 막 딱딱한 줄 알았거든, 그런데 너무 말랑말랑하고, 풀로 거미줄 만들 때처럼 막 끈끈한 실이 만들어지고, 너무 부드러운 거야.”


이 말을 글로 옮겨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열 살짜리 부산 소녀의 사투리를 글로 옮길 방법은 없다. 딸은 이제, 당연하게도, 사투리를 쓴다는 의식 없이 사투리를 쓰고 있다.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후, 어떤 감정이 밀려온다. 딸의 사투리를 들을 때마다, 그런 사투리를 쓰는 딸과 대화할 때마다 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고향이 없는 아빠가 딸에게만은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소망을 이뤄냈다는 안도감, 자신과 같은 톤의 말을 하는 아이들과 어울려 잘 지내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안심, 어제와 같은 일상이지만 아프지 않고 큰 탈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냈기에 벌써 4학년이 되어서 사투리가 표준어가 된 소녀가 되었다는 감사함, 여전히 아빠에게 시시콜콜 얘기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아빠의 손을 잡고 걷는 걸 당연시하는 딸의 아빠를 향한 사랑을 느낀다. 이 감정, 여러 감정이 뒤섞인, 날 웃음 짓게 하고 딸을 물끄러미 한참 보게 하는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라면, 상투적이지만, 난 행복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다.


귀여운 공범

집에 오는 길에, 엄마는 사주지 말라는 탄산음료를 사달라며 눈을 찡긋거리고 입을 묘하게 벌리며, 마치 범죄를 함께 도모하자는 듯한 싸인을 보내는 딸을 볼 때도 같은 기분을 느낀다. 큰 테이블에 마주 앉아 아빠와 함께 책을 읽을 때도, 퇴근한 아빠가 늦은 저녁으로 편육에 맥주를 곁들일 때, 엄마 몰래 와서 편육 하나 달라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는 딸을 볼 때도 같은 기분을 느낀다.


삼촌 동네를 탐험하며 “와~ 아빠, 여기 육회 집 있어. 진짜 맛있겠다.”, “와~ 아빠, 태국 식당 이름이 태국집이야.”, “오, 여기 와플도 맛있겠는데.”하는 딸을 볼 때도, “은채야 저 카페는 루프탑이 있다.”, “오~ 그러네, 갬성, 갬성.” 하며 반응하는 딸을 볼 때도 같은 기분을 느낀다.


없던 존재의 존재감

불과 십 년 전에는 없던 존재가 세상에 나와서, 기고 말하고 걷고 뛰더니, 가방을 메고 어린이집에 간 뒤 갑자기 사투리를 하더니, 어느덧 초등학교에 간 뒤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고 친구를 돕고 남자 짝의 흉을 보고 3학년 땐 반장을 하고 두세 개의 자격증을 따고 아침마다 “아침 뭐 먹어요?” 물어보고 갓김치와 달걀밥으로 야무지게 아침 식사를 한 뒤 학교에 가고, 주말에는 종종 치킨과 피자를 먹고 엄마를 흉내 내며 맥주 좀 그만 마시라고 아빠에게 잔소리를 하고,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대고 아이돌 비스름하게 춤을 추고 음악방송의 애청자가 되고 친구와 화상통화를 하며 내일 과제와 숙제를 상의하고 샤워를 한 뒤 로션을 발라달라고 종종거리며 아빠에게 와서 로션 통을 내민다. 그런 딸을 본다. 볼 때, 그때 드는 감정을 뭐라고 부르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다들 그런 감정을 행복이라 부른다고 해서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행복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전히 행복이 뭔지 모른다. 다른 이에게 행복을 설명할 수는 없다. 행복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어서일까? 어찌 됐든 여전히 행복이 뭔지, 정확히 모른다. 다만 행복을 알아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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