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썼듯, 집이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는 바람에 잠시 광안리 처남 집에 머물고 있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오십 대 남편은 가구와 같아서 집안을 바꾸든 이사를 하든 집안에 그저 내 자리만 남아 있길 바랄 뿐이지, 인테리어 공사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는 없다. 아내가 고민부터 결단과 실행까지 나아가는 동안 이 대형 프로젝트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함께 가 보자는 데 가고, 인테리어 업체와의 미팅 자리에 같이 가준 것이 전부다.
여하간, 그렇게 신세지 게 된 집주인 처남은 1급 컴퓨터 프로그래머인데 사주에 역마살이 있어서 집에 있는 세월보다 외지에 있는 세월이 더 길다. 군대를 제대한 후 대학에 다닐 때 잠시 집에 붙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도 거의 Lab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졸업 후 수도권의 회사에 취직해서 한참 있다가 고향이 그리워 부산의 회사로 옮겼는데 마침 처남 영입 후 이 회사가 그야말로 터지는 바람에 대구, 광주, 김해, 서울 등지로 장기 출장을 밥 먹듯이 갔다. 그 덕에 조카인 은채도 삼촌을 보러 광주, 대구에 놀러 갔었다.
여하간 올봄, 회사를 관두고 좀 쉬나 싶더니만 제1금융권 기업의 프로젝트에 불려 나갔다. 그 프로젝트 담당자가 처남을 콕 집어서 원했다고 한다. 처남은 막내지만 장손답게, 누이에게 기왕에 궁리 중이던 공사를 이때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조카의 미래를 위해 거금을 쾌척한 후 집까지 내어줬다. 그 결과, 이 글은, 앞서 썼듯 멀게는 광안리 바다를, 오른편에는 황령산을 두고 있는 처남집에서 글을 쓰고 있다.
차라리 이사를 했으면 했지, 이런 한 달 살림살이 이동이 더 피곤하고 힘들었다. 내가 사는 대연동에서는 지하철로 서너 코스, 차로는 십 분 거리밖에 안 되는 곳인 데다가 처남이 내려오면 자주 놀러 오는 곳이니 가족에게 낯설고 먼 곳은 아니다. 특히 삼촌을 잘 따르는 딸은 더 자주 왔던 곳인지라 신나 했다. 심지어 생전 처음 지하철을 타고 등교를 해야만 하는 불편함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우린 다 다르게 생겨 먹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의 세탁기라 우리 집의 것과는 그 용량이 너무 차이 나서 매일 빨래를 하고 있다. 얼마 전에도 아내가 흰 빨래를 해서 말렸기에 내가 개었다. 개다 보니 브래지어 안에 넣는 패드가 남았다. 딱 봐도 딸의 것이었다. 이제 겨우 가슴의 흔적이 슬쩍 나오는 정도지만 제 깐엔 운동할 때, 좋아하는 춤을 추거나 음악 줄넘기할 때는 신경 쓰이는지 엄마에게 스포츠 브라를 부탁했다. 그 몇 개를 가져왔고 거기에 들어있던 패드였다.
저녁을 먹고 패드를 들어 보이며, “은채야 이거 챙겨 넣어야지.” 했더니 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자기 것에는 그런 패드가 없다고 했다. 내 손바닥 반만 한 패드가 C컵에 육박하는 아내의 것일 리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자기 것이 아니라고 우기는 딸이 웃겨서, 그럼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여자의 것은 여자의 답으로 주인을 찾지 않겠나?
아내는, 그 패드는 브래지어 안에 들어있던 것이라 네가 못 봤던 모양인데, 그건 네 것이니 구멍을 찾아 잘 넣으라고 했다. 딸은 브래지어와 패드를 들고 잠시 씨름하다가 내게 왔다. “아빠, 이것 좀 넣어줘.”, 아직 이런 걸 부탁하는데 별 민망함이 없는 나이다. 난 살짝 내어진 구멍에 큰 패드를 조심스럽게 넣는 법을 가르쳐주며 넣어줬다. 딸은 유심히 봤다.
다 넣어준 후, 딸이 불쑥 단짝 친구 지유 얘기를 꺼냈다.
“아빠, 지유는 가슴 커지는 거 싫어한다고 내가 말했었지? 자기는 납작한 가슴이 좋다고 했다고.”
“아, 그래, 그랬었지.”
“그런데, 남자들은 어떤 가슴을 좋아해?”
“응?”
“아니, 그러니까, 큰 가슴을 좋아해, 납작한 가슴을 좋아해?”
“아... 그거야 뭐,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지.”하고 비교적 무난하고 안전하게 대답해 줬다. 그러나 어쩐지 솔직한 대답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아빠가 장담하는데 남자 열 명 중에 한 명 정도? 아니, 백 명 중에 한 명? 아니, 아니 천 명 중에 한 명 정도 납작한 가슴을 좋아하지 않을까?”
“진짜?”
“응.”
다음 날 아침, 딸이 지유가 납작한 가슴을 원한다는 이야기를 아내에게 했다. 그러자 아내는 “넌, 엄마 가슴을 보고 자라서 가슴이 좀 큰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거고, 지유는 엄마 가슴이 작아서 아마 그런 걸 거야.”하고 답해줬다. 언젠간 이런 민망한 대화가 오갈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사람이어서 그냥 좋았다.
이 대화 끝에, 남자들끼리 하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났다. 좋아하는 사람의 가슴이 작을 순 있지만 그 사람의 가슴이 작아서 좋은 건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의 가슴이 크다면 그건 그 사람의 가슴이 커서 그런 거일 수 있다는 말 말이다. 이 말을 긍정도 부정도 못 하겠다. 과거의 연인들을 떠올려 보면 어떤 범주로 묶을 만한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키가 컸고 어떤 이는 작았다. 어떤 이는 가슴이 컸고 어떤 이는 나보다 더 납작했다. 어떤 이는 엉덩이가 컸고 어떤 이는 나보다 골반이 작았다. 어떤 이는 목소리가 컸지만 어떤 이는 작았고, 어떤 이는 날 똑바로 보며 이야기했지만 어떤 이는 내 시선이 스치는 것조차 부끄러워했다. 이들의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나 같은 남자가 뭐가 좋았는지, 한정 없이 사랑해 줬다는 것, 그것뿐이다.
여하간, 이렇게 내외적으로 다양한 조건을 갖춘 사람과 별 탈 없이 해를 넘겨 연애를 할 수 있었던 건 그 고유의 장점과 매력을 찾아 칭찬해 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 그녀들이 자신의 신체를 부끄러워하거나 단점을 그야말로 콤플렉스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사실 제대로 된 남자라면 장점을 칭찬하는 것보다 단점을 긍정해 줄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땀이 많은 연인에겐 촉촉하다고 말해주고 땀이 없는 연인에겐 매끄럽다고 말해줘야 한다. 엉덩이가 크면 육감적이라고 말해주면 되고 엉덩이가 작으면 날씬하다고 말해주면 된다.
다른 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다.
장점이든 단점이든 결국은 제 각기 다른 이미지의 수용과 해석의 문제다. 요즘 애들 말로 개/취, 개인의 취향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연인의 신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입에 맞지 않는 식당에 와서 불평하는 것과 같다. 부산 남천동의, 특이하게 회를 뜨는 것으로 유명한 <연합횟집>에 가서 너무 특이하게 회를 떠놔서 못 먹겠다고 하는 손님이나, 요즘 내가 좋아하는 울산의 유명한 <황태 얼큰 수제비>를 먹으면서 산초가루 때문에 코가 찡해서 못 먹겠다는 손님의 진상 짓과 같다는 말이다.
그 개인의 취향을 잣대로 연인의 신체나 외모를 가늠한 뒤 맘에 안 드는 부분을 고쳐 달라는 이는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성형 수술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염색을 하면서까지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사람 또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사랑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랑에 서툰 사람이다. 우리의 서로 다름이 매력을 만들고, 그 매력에 끌려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 다름엔 인간의 원초적 부조리함이 내재하고 있다. 신체와 지능은 타고나는 것이 절반 이상이다. 애석하게도 그렇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불공평하지만 어쩔 수 없다. 부조리하지만 그게 인생이다. 그러나 이 부조리함 때문에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다름을 긍정하고 서로의 다름을 수용하며 사는 것이, 결국엔 함께 사는 것이다. 때론 그 다름을 결함으로 여기는 사람을 만나면 그건 결함이 아니라 당신이 가진 "고유한 다름"이라고 말해주는 것 또한 다른 이의 사랑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도리다.
받은 것에 대한 감사
난 내 신체에 대해 감사하며 살고 있다. 키도 보통 키고 덩치가 큰 것도 아니지만 그럭저럭 좋아하는 스포츠를 즐길 수 있을 만큼 운동 신경이 있어서 열 살에 막 접어든 이후부터 내 몸을 맘껏 누리며 살아왔다. 지능 또한 수재나 천재급은 아니지만 어지간히 어려운 책도 서너 번 반복해서 보면 뭔 소리인지 이해할 정도는 되어서 그럭저럭 꽤 오래 공부를 했고 대학에서 강사 노릇도 해봤다.
아내 또한 마찬가지여서 작다면 작은 키지만 신체 비율도 좋고 볼륨감도 있어서 왕년에 남자들의 속깨나 태웠었다. 머리도 괜찮아서 공부도 할 만큼 했고 언변도, 처세술에도 능해서 여러 조직에서 꽤 괜찮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아웃사이더 성향이 강한 나하고는 다른 재능이다.
딸의 얼굴은 친척 누구라도 자신을 닮았다고 우길 수 있을 만큼 친가와 외가의 장점이 잘 섞여 있다. 돌 즈음이던가, 처고모님은 은채의 얼굴을 보고 착하게 생긴 데가 한 군데도 없다고 하셨다. 얼핏 들으면 악담 같지만 이 동네에선 칭찬이다. 야무지고 다부지게 생긴 이목구비라는 표현을 극적으로 한 것이라 보면 된다. 그렇게 딸은 외모부터 선택의 여지없이 부모의 장단점을 물려받았다.
신체 또한 마찬가지다. 발은 나를 닮았고 어깨는 나와 아내를 닮아 넓다. 허리는 아내를 닮아 좀 짧은 편이지만 다리는 정말 무지하게 길다. 이것도 아내는 자기를 닮아 그렇다는데 아내의 비율을 보면 무리 없는 주장이다. 거기에 운동 신경도 좀 물려받았고 괜찮은 체력도 물려받았다. 여기에 엄마와 아빠의 입맛이 섞여 음식의 취향이 다채롭다.
엄마와 아빠의 영향
딸은 외모나 꾸미는 것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는 엄마 아빠에게 영향을 받았다. 아내는 누가 봐도 회사의 중견 간부 스타일이다. 화려하거나 튀진 않지만 정갈하게 꾸밀 줄 안다. 상황에 따라, 그야말로 때와 장소에 따라 옷을 입을 줄 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조화를 추구하는 편이다.
반면에 난 한 가지 스타일을 고수한다. 예를 들어 10월 말부터, 2월까진 하이넥 재킷에 폴라티만 입는다. 재킷은 특정 브랜드의 같은 모델이 색깔별로 세 개 있고, 티도 특정 브랜드의 것으로 색깔별로 일고여덟 개가 있다. 미팅이나 회의 때문에 작업실에 출근할 때 신는 신발은 두 개뿐인데 그나마도 한 브랜드의 같은 신발을 색만 다르게 샀다.
아내와 다르게 액세서리는 거의 안 하는데, 그나마 하는 건 아내가 연애할 때 사준 심플한 티타늄 반지 정도다. 시계도 안 찾았었는데 얼마 전에 아내가 차고 다니라고 준 스마트 워치를 차고 다닌다. 은채의 패션엔 이렇게 전혀 다른 부모의 패션 철학이 혼재하고 있다. 편하게 입지만 상황에 따라 입거나 액세서리를 잘 안 하지만 할 때는 화려하고 눈에 띄는 걸 하고,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디자인의 책가방이지만 색은 화려하거나 하는 식이다.
고유한 한 사람
한 몸 안에, 하나의 인생 안에 여러 다른 사람의 유전자와 영향이 섞여 있다. 그러나 그 섞임 속에서 나와 아내, 또는 다른 친척의 것을 찾을 수도, 찾을 필요도 없다. 그것은 이미 어른의 것이 아니고 은채의 것이다. 마치 여러 색이 섞여 다른 색이 만들어졌을 때, 그 다른 색에 과거의 색의 이름이 아니라 새로운 색의 이름이 붙듯이 딸의 개성과 매력엔 그 고유의 이름 “은채”라는 이름이 붙을 뿐이다.
살이 쪘네, 어쩠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다. 거울 앞에 서서 이런저런 연기도 하고 춤도 추면서 노는 걸 보면, 또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노는 걸 보면, 그리고 딸이 털어놓는 심각한 고민 중 외모에 대한 고민은 없는 걸 보면 말이다.
앞서 쓴 글의 내용처럼 우린 정신과 신체를 단련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의 맥락에서 그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기 때문이다. 집이든, 자동차든, 직장이든, 명예든 한 인간이 갖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일하게 하여 얻은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 저 모든 것을 잃더라도 신체와 정신이 남아 있다면 우린 어쩌면 세상에 나올 때 갖고 나온 것 전부를 여전히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상투적으로 표현하면, 건강한 신체와 건강한 정신을 상실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남은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딸에게 직접 말해 본 적은 없다. 그저 평소 책을 가까이하고 글쓰기를 즐기고, 운동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넌지시 말을 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에둘러 말할 뿐이다.
아빠를 닮아 볼이 넓은 발과 큰 손도, 엄마와 아빠를 닮아 넓은 어깨도, 약간 짧은 허리와 긴 다리도, 춤추기 좋아하는 흥과 차분히 글을 쓰는 집중력과 창의력이 혼재된 정신도, 결국은 모두 나의 것, 내 앞에 생의 모든 시간을 헤쳐나갈 최초의 도구이자 유일한 도구이며 최후의 도구라는 것, 그래서 인생에 어떤 시련이 닥쳐와서 많은 걸 잃더라도 절대로 몸과 마음만은 꿋꿋하게 지켜내라는 것, 그것만 온전하게 지켜낸다면 언제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 이런 이야기들을 지나가듯 무심히 반복해 건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