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가 끝났다. 긴 4주였다. 집을 선선히 내준 처남 덕에 계획보다 당겨서 할 수 있었고 신속히 진행할 수 있다. 또 평소에 삼촌집을 좋아하던 딸도, 생각보다 주차 문제는 심각하지 않으면 출근 시간은 좀 짧았던 아내도 큰 불편 없이 보냈던, 몸도 마음도 편하게 지냈던 4주였다.
그러나 딸의 입장에선 제법 길었던 등하굣길이었다. 4주 차에 접어들었을 때, 딸도 나도 피곤을 느꼈다. 그래도 딸은 힘들다는 투정 없이 묵묵히 학교를 오갔다. 지하철역에서 삼촌 집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면서 종종 한숨을 내쉬곤 했지만 모른 척했다. 나오는 한숨은 어쩔 수 없다. 딸이 낳고 자란 대연동은 부산에서도 흔치 않은 평지 동네니까. 황령산이 바다를 향해 낮아지다가 펼쳐지는 평지에 자리 잡은 동네가 우리 동네다. 그렇다고 대연동 전체가 그런 건 아니다. 황령산 밑에 자리 잡은 몇몇 동네와 낮은 언덕에 가까운 우룡산 밑에 있는 동네들은 오르막을 갖고 있다.
삼촌집을 제 집처럼...
여기며 편히 지내는 딸을 보다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난 친척집을 내 집처럼 여겨 맘 편히 며칠 보낸 적이 없다. 방학을 맞아 갈 만한 시골 조부모 집도 없었고 부모에게 반항한답시고 집을 나와 기껏 간다는 곳이 이모나 고모 집이었던 사춘기 시절의 뻔하디 뻔한 스토리도 내 몫은 아니었다. 어쩌면 집을 나와도 갈 곳이 죽으나 사나 집에서 버텼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집에 돌아가기 며칠 전, 삼촌의 실내 자전거 운동기구를 제 것인 양 타며 TV를 보고 있는 딸을 보면서, 그동안 딸을 키우면서 느꼈던 부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줬던, 내가 누린 적도 가진 적도 없던 것을 딸은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얻고 누렸던 몇 가지 것들이 떠올랐다.
연필깎이
그런 감정을 가장 먼저 느끼게 해 준 사물은 은색 기차 모양의 연필 깎이었다. 하이 샤파. 아내도 고등학교까지 갖고 있었다고 한다. 장인어른이 초등학교 입학 때 사준 걸 애지중지하며 사용했고 수많은 이사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삼 남매가 잘 썼다고 한다.
은채도 연필깎이가 있었다. 어린이집 다닐 때, 아내가 사 준 비교적 간단한 것이었는데 학교에 들어가서도 잠시 사용하다가 몇 번 떨어뜨린 후, 망가져 버렸다. 그 후 간이 연필깎이로 잠시 연필을 깎았다. 튼튼한 걸로 하나 사줘야지 생각하던 차에 장인어른이 그 필요를 알게 됐고 손녀가 필요한 것이라면 얼른 사줘야 맘이 편한 외할아버지는 외갓집에 놀러 왔던 손녀와 함께 마트에 가서 사주셨다.
이 날은 화요일이었다. 일 때문에 울산에서 감독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며 미팅을 하고 일 처리를 하고 늦게 집에 들어왔었다. 아내와 딸은 자고 난 맥주 두 캔을 사 들고 들어 왔었다. 거실 탁자 위에 은색 기차가 놓여 있었다. 대충 씻고 차가운 맥주를 잔에 따라 반쯤 들이켠 후 그 기차를 한참 봤다. 잘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백 원짜리 동전보다 더 빛나는 자태를 뽐내던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였다.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것 같았다. 하릴없이 뒤의 손잡이 돌려봤다.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그렇게 한 십 분쯤 구경했다. 다음 날, 딸에게 부럽다고 말해준 뒤 아빠도 좀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딸은 선심 쓰듯 허락했다.
가족/친척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 눈을 맞추고 걸음마를 하고 계단을 내려가고 킥보드를 타는 순간, 모르는 이에겐 당연하지만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지켜본 이에겐 기적 같은 순간을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 부모는 당연히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부모만큼 그 순간의 경이로움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줄 가족이 있다는 건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다. 가족은 가계도나 족보처럼 엄마와 아빠를 시작으로 점점 그 범위가 넓어진다. 나처럼 그 범위가 하나의 선 안에서 끝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딸처럼 외가 쪽으로 4촌, 6촌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외할아버지는, 앞서도 말했듯이 은채의 탈 것을 거의 다 사주셨다. 게다가 수박의 시원한 단맛과 홍시의 감칠맛 나는 단맛을 처음 알려 주셨다. 과일을 좋아하시는 할아버지는 손녀를 핑계 삼아 과일을 더 자주, 많이 사셨고 손녀는 할아버지의 핑곗거리가 될 만큼, 아니 핑계가 진짜 이유가 될 만큼 과일을 좋아하게 됐다.
이제는 봄이면 “아~ 블루베리 먹고 싶다.”하거나, 5월이 오면 자연스럽게 “이제 슬슬 딸기가 맛있을 때지, 아빠?”하고 묻곤 한다. 나야 뭐, 요즘 같은 하우스 농사 시대에 아직도 과일에 때가 있나 하고 생각하지만, “아, 그런가?”하고 질문을 돌려준다. 그러면 딸은 “응, 할아버지가 그러셨어.”하고 답을 한다.
외할머니는 걱정이 많으시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재킷과 점퍼의 지퍼와 단추를 목까지 채워주시고 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날이면 입을 가리고 걸으라고까지 하신다. 아내나 내가 은채의 머플러나 두툼한 방한 마스크를 안 챙겨 가는 날에는 어김없이 한소리 듣는다. 여름 방학 때 놀러 가면 행여나 은채가 더위 때문에 잠들지 못할까 싶어 그 옆에 누워 부채를 부쳐주신다.
은채가 기기 시작할 때는 두툼한 매트에서 발부터 내려가는 법과 벽 짚고 일어서는 법을 가르쳐주셨고, 걷기 시작하자 난간을 잡고 계단 내려가는 법도 가르쳐 주셨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상 차리는 걸 돕게 하셨고 조금 학년이 올라가자 채소를 씻거나 다듬는 것도 가르치셔서 훌륭한 어린이 요리 보조로 만드셨다.
물론 은채에게 가장 임팩트 있는 건 할머니가 주시는 용돈일 것이다. 장모님은 돈을 표 나게 쓰실 줄 아는 분이다. 평소에는 검소하신 분인데 이웃이나 일가친척, 가족에게 돈을 쓰실 때는 예상치 못한 액수를 쓰신다. 은채에게 용돈을 주실 때도 아주 사소한 이유로 제법 큰 액수를 주신다. 이제 그러려니 할 만도 한데, 아직도 난 그 액수를 들을 때마다 놀란다.
삼촌은 조카에게 고기의 맛과 게임의 맛을 가르쳤다. 육식파인 삼촌 집에 놀러 가거나 삼촌이 집에 놀러 오면 어김없이 고기를 먹으러 가거나 배달시켜 먹기에 은채는 고기가 먹고 싶은 주말이면 삼촌에게 전화를 해 놀러 오라고 하거나 가도 되냐고 묻곤 한다.
나 같은 게임 문외한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만큼 게임에 진심인 삼촌은 고등학교 때부터 다양한 기기와 많은 타이틀로 게임을 즐겨 왔다. 그러다 조카가 게임을 할 만큼 컸다 싶었을 때부터 연령에 맞는 게임 타이틀을 사서 조카를 게임의 세계로 살살 발을 들여놓게 하더니 최근에는 닌텐도 게임기까지 사준 뒤 함께 모동 숲까지 하고 있다. 삼촌, 은채, 아내, 이렇게 셋이서 아주 진지하게 모동 숲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뭐랄까, 난 정말 처음 보는 광경이라 진기하기도 하고 세대통합이 의외로 참 싶구나 싶기도 하다.
미국에 사는 이모도 빼놓을 수 없다. 일 년에 한 번 고향에 올 때마다 큰 캐리어에 조카의 선물을 담아 온다. 캐리어를 열면 네 살 터울인 사촌 언니가 입던 옷과 새 옷과 신발 등이 가득 들어 있곤 해서 이모가 올 때마다 은채의 옷장을 새롭게 정리해야만 했다. 은채는 이모가 올 때마다 자기 방을 내주고 이모의 동네 여행, 부산 여행, 한국 여행에도 함께 하는 여행 메이트가 됐다.
이모는 은채에게 도전의 가능성, 그 자체다. 한국에서의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간호학을 낯선 미국에서, 낯선 언어로 공부해서 간호사가 된 이모는 다른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직업도 가질 수 있으며 생활도 꾸려나갈 수 있다는 걸 알려줬다. 은채가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자기는 미국으로 대학을 갈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데에는 이런 이모의 존재가 결정적이다.
물론 미국에 사시는 친할머니와 그 가족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때마다 커다란 택배 박스를 보내시는 할머니는 은채가 유학 올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겠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미국 할아버지도 말도 안 통하는 손녀를 위해 선물을 직접 고르시고 화상 통화할 때마다 “I Love you."를 연발하신다. 은채는 종종 아빠가 영어로 카톡을 보내거나 미국에 갔을 때 미국 할아버지와 대화하는 엄마와 아빠를 보면서 영어 공부의 동기를 더 강하게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방과 후 교실과 정규 수업 시간에만 영어를 배우지만 은채의 영어 실력은 많이 좋아졌다. 아마, 올 연말에는 영어로 화상통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는 힘과 결여
가족에 대한 기억은, 앞서 말했듯이 사는 힘이 된다.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함께 만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나서 일상의 활력이 된다. 은채는 벌써 그런 힘에 대해 알고 있다.
난 초등학교 1학년 때 양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친할머니는 중학교 이후로 본 적이 없고 외할머니도 그렇다.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친할머니는 서류를 떼어보고 알았고 외할머니 장례식엔 가지 않았다. 두 분이 돌아가신 걸 안 뒤에도 이렇다 할 감정이 오진 않았다. 각별하거나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추억 한 조각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추억이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고 어른으로 사는 데도 문제가 없지만, 분명 그 삶은 정서적으로 빈곤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는 뭔가가 내게 없다는 건 상대적 빈곤이다. 모르면 넘어갈 수 있지만 알면 그건 결핍이다.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지만 있었다면 삶이 어떻게 됐을지, 얼마나 풍요로울지 알 수 없기에 “그런 건 없어도 돼.”라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할머니와, 고모나 이모, 삼촌과의 추억이 없어도, 다시 말하지만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다. 그러나 그 추억이 가득한, 특히 친할머니와의 추억이 많은 아내와 살다 보니, 그 없음의 동공은 싱크홀처럼, 삶의 어느 순간에 큰 공허함을 만든다. 오랫동안 위태롭게 덮여 있어서 그 뒤의 블랙홀을 인식하지 못하고, 보지 못할 뿐이다. 분명 결핍은 결여를 만든다.
결여의 사전적 뜻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이면서 “있어야 할 것이 모자람”이다. 가족에 대한 추억은 꼭 있어야 할 것이면서, 동시에 모자라기보단 풍성할수록 좋은 것이다. 이걸 딸을 키우면서 알았다. 풍성한 관계와 추억은 사람을 풍성하게 한다. 마주 앉아서 나눌 얘기가 넘쳐나고 웃음이 많아진다.
결국 있어야 할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넘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어쩌면 그럭저럭 하자 없는 어른이 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난 하자 있는 어른에서 이제 겨우 하자를 수습하고 있는 중년으로, 아빠로 “성장”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