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19

by 최영훈

며칠 전,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셨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기억해 내려고 며칠 동안 기억 속을 헤집었다. 아빠만 보면 쫑알쫑알 말을 하는 딸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집에 오다가 불쑥 궁금했다. 난 아버지랑 이렇게 대화를 한 적이 있던가? 찾아보기로 했다. 어디 잘 둔 것 같은데, 어디 뒀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나는 물건을 찾을 때처럼 그렇게 기억 속을 뒤적거렸다.

기억이 돌아갈 수 있는 지점까지 가 봤다. 초등학교 1, 2학년? 파주의 작은 마을, 광탄면 신산리의 한 벌판에서 아버지에게 축구와 검도를 배운 기억은 있다. 그러나 대화를 한 기억은 없다. 인생의 교훈 같은, 아들을 둔 아버지라면 한 번쯤 했을법한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3, 4학년? 5학년, 6학년? 의정부에 살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도 없이 이사를 다닌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여러 집들은 생각해 냈다. 그러나 대화를 한 기억은 끝내 못 찾았다.


중학교 때? 아버지를 못 본 건 2학년 때부터다. 그러니 대화를 한 기억이 있을 리 없다. 아버지가 나가고 나서 아버지가 두고 간 신발과 옷을 입고 다녔다. 없는 살림에 새 신, 새 옷을 살 수는 없었다. 남겨진 것에 발과 몸을 맞춰 살았다. 아버지는 새 집, 새 옷, 새 신발을 샀을 것이다. 새 여자와. 그때, 아버지는 행복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때의 아버지는 어렸다.

고작 삼십 대 중반, 그 나이 때의 나를 생각해 보면 철이 없을 나이다. 난 그 나이 때 겨우 결혼했고, 마흔에서야 딸을 낳았다. 아버지는 스물 하나에 여자랑 살기 시작해서 애를 낳았고 스물둘엔 이미 두 아이의 아빠였다. 내가 결혼할 때쯤 삼십 대 중반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를 생각한 뒤, 그의 서투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미술을 공부했지만 무도가의 삶을 선택했던, 그러나 돈도 명예도 얻지 못했던, 건달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대통령 경호실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거절했던, 그래서 아이들은 크는데 계속 단칸방을 전전해야 했던, 비루한 삶에 어울리지 않게 180이 넘는 키에 근육질 덩치였던 제법 잘 생긴 남자. 사람들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조금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어영부영 하다 삼십 대 중반이 된 남자에 대해 생각했었다.


이해했던 아버지를 다시 이해할 수 없게 된 건, 딸을 키우면서부터다. 딸이 크면 클수록 이해할 수 없게 됐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자식을 키우면서 철이 든다. 자식이 커서 한 명의 어른으로 자리매김하는 걸 보고 싶기에 자식의 건강뿐만 아니라 자신의 건강도, 삶도 돌아보고 챙긴다. 모험은 줄이고 위험은 피하고 일상은 지키려 한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번은 자식의 얼굴을 보고 싶기에 잠든 얼굴이라고 보고 잔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딸의 시시콜콜한 일상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내 어깨만큼 큰 딸이 남아 있는 잠 기운을 안고 거실로 나올 때마다 놀라곤 한다. 이건 일종의 경이로운 사건이다. 정확히, 2012년 1월만 해도 없었던 존재가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존재가 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기고 가벼이 여기거나 사람보다 다른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거나 그것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이나 기업, 세상을 비인간적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자식 귀한 줄 알면 남에 자식 귀한 걸 안다는 이 당연한 얘기를 더 특별하게 여기게 된다. 딸을 낳은 후 대학 강의실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달라 보였다. 이 녀석들을 이 나이 때까지 키우느라 저 부모님들이 얼마나 갖은 애를 썼을지 생각했다. 밤마다 깨어 젖을 먹이고, 분유를 먹이는 수고는 저 긴 수고의 여정에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절감했다. 자식이 크는 순간순간, 고비고비마다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깊이 마음을 졸였을까? 그 이후, 카피를 좀 못 쓰고, 시험을 망쳐 F가 확실한 녀석에게도 크게 뭐라 하지 않았다. 할 건 해야만 하고, 부족한 건 채워야만 한다는, 업계 선배라면 의례히 해줄 법한 말만 해줬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가 생각난다.

대학원 다닐 때, 어떻게 알았는지 고모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암에 걸렸으니 한 번 만나 보라는 권유였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지레짐작하고 만날 약속을 했다.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내가 다니던 대학원의 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병원 1층 로비에서 만났다. 근육이 사라져 몸에 가죽만 붙어 있었고 키는 줄어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버진 불과 쉰 줄에 막 접어들었을 때였다. 지금의 내 나이쯤. 그러나 이미 쇠잔해 있었다.


무슨 대화를 했더라? 베드로와 바울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이 병이 신이 준 시련이라고 여겼다. 자신을 신의 사도와 동일시하는 것 같았다. ‘아직, 살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남자로서, 한 사람으로서, 아직 바닥까진 가지 않은 것 같았다. 벌써 20년도 더 된 장면이다.


아버지는 내가 크는 과정을 보지 못했다. 연애를 하는 것도, 음악을 하는 것도, 대학을 가는 것도, 대학원을 가는 것도, 당연히 결혼도, 며느리도, 손녀도 보지 못했다. 내 기쁨도, 슬픔도, 환희도, 고통도 모른다. 자식의 희로애락을 보며 늙어가는 것, 자식의 자식을 볼 수 있는 것, 손녀에게 딸 몰래 달달한 걸 사준 후 그걸 먹는 손녀를 보면서 흐뭇해하는 것, 그건 복이다. 엄청난 복이다. 장인어른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복을 누리지 못한 채, 늙어가고 있다. 여전히 살아 있다. 어떤 의미, 어떤 힘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는 걸까?



10월 넷째 주 일요일 오전, 딸은 주산/암산 대회에 참가했다.

집에서 벡스코까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갔다. 부담 갖지 말고 벡스코 구경 왔다 생각해라, 그냥 놀다 온다고 생각해라, 말도 안 되는 응원을 하며 갔다. 대회장에 들어가기 전, 엄마가 잘 챙겨준 이름표를 왼쪽 가슴에 붙여줬다. 넓은 컨벤션홀엔 아이들과 부모들로 가득 찼다. 이번이 두 번째여서 자리는 좀 쉽게 찾았다.


두 번째 봐도 진기한 광경이다. 넓은 홀에 빈틈없이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진지하게 주산/암산 대회에 임한다. 그것도 무려 두 시간 동안. 부모들은 그동안 로비에 있거나 벡스코 광장에 있다. 난 길 건너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사노 신이치의 논픽션 <도쿄전력 OL 살인사건>을 읽었다. 딸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짬이 나면 중고 서점에서 찾아 읽는 책 중 하나다. 딸이 진지하게 주산/암산 대회에 임하는 동안, 기다리는 아빠가 읽을 만한 책으로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지루함 없이 딸을 기다릴 수 있었다.


열한 시 사십 분쯤, 딸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가 기다리라는 데서 기다리고 있다고. 컨벤션 홀 정문 앞에 서 있는 딸을 만났다. 만나자마자 딸은 대회에서 있었던 일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라도 한 잔 하자고 했다. 딸은 포도맛 탄산수를 골랐다. 그걸 마시면서도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연습 문제보다 문제가 더 많았다. 오십 문제는 통째로 날렸는데, 앞의 백 문제는 기존 내 기록을 깼다. 암산도, 주산도 선생님의 전략대로 잘 풀어서 시원하다. 이런 얘기를 쫑알쫑알 댔다. 난 그동안 딸과 눈을 마주치면서 얘기를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줬다. 기록을 깼다는 부분에서 “오호, 대단한데.”하며 감탄도 해줬다.


엄마가 궁금해할 테니 전화해 주라고 했다. 엄마가 전화를 받자 딸은 내게 했던 이야기의 대부분을 엄마에게도 해줬다. 아내는 때로는 놀라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감탄사를 섞어가면서 딸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집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아빠는 쫄면, 딸은 우동, 엄마는 김밥을 시켜 먹었다.


딸은 1학년 때 초급반으로 대회를 나갔는데, 이번엔 중급반으로 출전했다. 음악 줄넘기도 이제 고급 단계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번 주 토요일, 방과후 교실 음악 줄넘기 선생님께서 “은채, 너 이제 동작 하나만 완성하면 되겠다.”하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묵묵히 앞으로 가고 있다. 하루하루, 매일매일 크고 있다. 애가 닳도록, 손이 부르트도록, 진을 뺄 만큼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큰 변화를, 이렇게 큰 행복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난, 덕분에, 이제 좀 사람 구실을 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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