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품 광고가 그러하듯 광고에 나오는 상품의 색은 그 상품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색이 선택된다. 자동차도 그렇고 옷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누군가 광고에 나오는 상품을 산다고 그러면 난 무조건 광고에 나오는 색을 사라고 한다. 상품 디자이너와 CF 감독, 그 밖에 다수의 관계자들이 심사숙고해서 고른 색이니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물론 내 조언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고에 나오는 색이 아니라 무채색을 산다. 광고에 나오는 상품은 모델과 함께 할 때, 그 광고의 공간에 있을 때 아름답다는 걸 그 상품을 직접 체험해 본 뒤 절감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후에도 광고는 계속되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때 그 색을 살 걸 하고 후회하곤 하지만.
매년 이맘때면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앞 다퉈 겨울 아우터 광고를 한다.
덕다운이니 구스다운이니, 우주인을 위해 발명된 신소재나 깃털보다 가벼운 첨단 소재로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디자인은 심플하고 색상은 화려한 데다 모델은 요즘 잘 나가는 K팝 스타들이 맞다 보니, 몇 년 전부턴 딸도 그 광고들을 유심히 보곤 했다. 어느 팀에 누가 나왔는지 금세 알아보고, 화보나 다른 매체에 실린 광고도 찾아본다. 예쁘다는 말도 하지만, 제 나름 검색해 보고 그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걸 확인할 뿐, 사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이 나오기 전에 엄마가 알아서 괜찮은 디자인에 무난한 가격대의 아우터를 사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야, 앞선 글에도 썼듯이 11월 말부턴 색만 다른 같은 디자인의 하이넥 점퍼 세 개를 돌려가며 아우터 삼고, 안에는 역시 색만 다른 폴라 티를 예닐곱 개 돌려가며 받쳐 입는다. 이십 년 전부터 내 신체 사이즈는 크게 변함이 없기에 튼튼하고 좋은 소재로 만든 옷들은 십 년을 훌쩍 넘겨 입는다. 심지어 좀 깨끗해 보이는 반팔 티셔츠도 언제 샀는지 아내와 헤아려보면 5년 이상 된 것들이 제법 있다. 그래서인지 지난가을과 올 가을의 사이즈가 다를 정도로 빨리 크는 딸에게 소위 등골 브레이커라 불리는 비싼 아우터를 사줄 이유를 찾지 못했었다. 그러나 요즘, 좀, 마음이 다르다.
이번 주 월요일(작년 10월 말), 모처럼 마트에서 장을 보자고 해서 집에서 지하철로 몇 정거장 떨어진 센텀시티에 갔었다. 아내가 올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았기에 딸과 함께 오랜만에 신세계 백화점 지하층을 둘러봤다. 요즘 애들이 입고 다니는, 요즘 광고에 자주 나오는 짧은 기장의 두툼한 점퍼가 얼마나 하는지 궁금해서였다. 내가 어림짐작하는 가격과 맞는다면 그 자리에서 하나 사 입힐 생각이었다. 입구에 있는 저렴한 SPA 매장에 들어가서 가격을 봤더니 십오만 원이 넘었다. 광고에 나오는 유명한 브랜드도 아니고 색도 화려하지 않은데 이 정도 가격이니, 광고에 나오는 브랜드의 상품이라면 그 가격이 얼마나 될까. 그날은 그렇게 마트 장이나 보고 집에 왔었다.
요즘엔 주로 수요일에 울산 작업실로 출근한다. 이번 주도 오전엔 집에서 써 온 카피와 구성한 콘티를 갖고 감독과 짧게 회의를 하고, 오후엔 지역 구의회에 촬영을 따라가서 구의원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예술회관으로 넘어가서 홍보 담당자와 영상 관련 회의를 했다. 퇴근하긴 이른 시간, 감독은 집에나 가라며 날 태화강 역에 데려다줬고 그렇게 집에 오니 일곱 시 반이 좀 넘었었다. 집엔 누나의 부름을 받은 처남이 와 있었다. 애초의 부탁은 조카를 픽업해 달라는 거였는데, 마침 이공계의 손재주가 필요한 제품 하나가 배달되어서 처남이 조립을 했던 모양이다. 고급 인력의 손을 빌렸으니 수육을 배달시켰고, 고기가 좀 남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손을 씻고 나오니 딸의 티가 눈에 띄었다.
“어, 그거 못 보던 건데?”
“응, 엄마가 사줬어. 엄마가 내 겨울옷을 십오만 원 어치나 샀대. 점퍼도 완전 예뻐.”
말을 듣고 궁금하여 딸 방에 가서 옷장을 열어 봤다. 낯선 옷이 없다.
“새 옷은 어디 갔어?”,
“아~, 은채 사이즈가 없어서 주문해 놨어. 나중에 매장에서 찾아와야 돼.”, 아내가 대답했다.
티셔츠 몇 벌, 두툼한 트레이닝 복 세트, 두툼한 점퍼 하나를 구매했다고 한다. 그 브랜드 홈페이지에 들어가 점퍼의 이미지 컷을 보여주는데 딸이 좋아할 만한 색과 디자인이었다. 잘 샀다는 말을 남기고 전통주를 반주 삼아 남은 수육과 막국수를 다 먹었다.
아이를 재우고 TV를 틀었는데 아우터 광고들이 나왔다.
딸이 좋아하는 여자 아이돌 그룹인 아이브의 장원영이라는 아가씨가 형광 레몬색의 짧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팔다리가 긴 딸이 입어도 예쁠 것 같았다. 가벼운 소재로 된 스카프나 머플러를 한두 개 사볼까 검색을 하다가 광고에 나온 점퍼를 검색해 봤다. 가격을 봤다. 삼십만 원이 넘었다. 그런데 사 주고 싶었다. 후회를 했다. 하반기에 책 좀 그만 사들일걸, 맥주 좀 작작 마실걸, 하고 후회를 했다. "이렇게 비싼 옷은 한참 크는 애들한테 필요 없어.", "매서운 추위가 없는 부산에선 저런 점퍼는 필요 없어."와 같은, 예전에 했던 생각 대신 이 옷을 미리 알지 못한 채, 돈을 허투루 쓴 나 자신을 먼저 책망했다.
누이동생은 스무 살에 결혼했다.
나랑 연년생이니 그때, 내 나이 고작 스물 하나, 처남 될 사람은 서른 살이었다. 그다음 해 동생은 딸을 낳았다. 그 후론 안 오던 본가에 자주 오기 시작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조카는 서너 살이었다. 주말이나 방학 때, 조카가 본가에 오는 날과 내가 집에 오는 날이 겹치면 조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빵빵한 볼에 내 메마른 뺨을 비비고 뽀뽀를 하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아들. 조카 예쁘지? 네 새낀 더 예쁘다.”, 그때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딸이 새 옷을 사기 전 주 금요일, 오래간만에 후배를 만났다. 강사 시절 제자로 맺은 인연을 후배로 이어간 녀석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녀석 조카 이야기가 나왔다. “와, 진짜 선배님, 조카 너무 예뻐요. 진짜 얘가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제가 직접 찾아가서 싸울 것 같아요.”, 그때, 내가 그랬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어. 조카도 예쁘지만, 네 새끼가 훨씬 더 예쁘다고.”
헤어질 때쯤, 잠시 같이 길을 걷다 물었다.
“너 올해 몇 살이지?”
“서른여섯입니다.”
“결혼 안 하냐?”
“모르겠어요.”
“연애는 하냐?”
“그것도 딱히...”
“야, 너도 알다시피, 남자는 나이만 처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존재가 아냐. 결혼하면 그나마 좀 철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도 뭐, 사람 따라 다르지. 철이 안 드는 놈이 더 많지. 솔직히... 후후.”, 녀석과 마주 보며 웃었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애를 키우면 남자는 애랑 같이 커. 그러면서 철이 들어. 네가 좀 사람이 되는 거 보고 싶으면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키워 봐.”, 늘 바른 소리만 하고 타협할 줄 몰라서 여기저기 부딪히며 사는 통에 마음 여기저기에 상처와 멍을 달고 사는 녀석에게, 그렇게 마지막 당부 아닌 당부를 하고 헤어졌다.
막연했다. 어른이 되는 법을 가르쳐줄 어른이 없었다.
십 대 후반부터 아버지 없이, 삼촌 없이, 일가친척 어른과 마주함 없이 크다가 그렇게 서른이 됐고 아내를 만났다. 길게 연애를 하면서도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건 어른의 일이었다. 난 어른이 아니었다. 형편없는 월급을 받는 카피라이터 초년병이었지만 그 일 자체가 좋아서, 직업을 바꾸거나 직장을 바꿀 생각도 하지 않았던, 세상 물정에 어두운 애였다.
아내가 먼저 결혼하자고 말했다. 먼저 말한 사람이 책임을 지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러자고 했고, 예상했듯이 아내는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우스갯소리로 결혼식 준비할 때 남자는 오라는 데 오고 가라는 데 가고 하라는 대로 한 뒤, 결혼식장에 제 때 나타나면 된다고들 하지만, 내가 진짜 그랬다. 심지어 신혼여행까지 아내가 다 준비했다. 그때가 내 첫 해외여행이었고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다. 서른다섯이었다.
그 뒤로 6년, 애 없이 살았다.
결혼하기 전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합의를 봤기에 큰 갈등 없이 흘러갔다. 아내는 다른 커리어를 쌓으면서 대학원을 다녔고 나도 카피라이터 커리어를 쌓으며 욕심을 내어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박사과정을 다녔다. 둘 다, 소진되다시피 에너지를 썼던 시기였다. 그 후 아내는 자신의 뜻대로 새로 개원한 병원의 원하던 자리로 이직했지만 내 공부엔 진척이 없었다. 공부는 어려웠고 학교는 멀었으며 논문은 진도가 나가지 않았으며 학회는 갈 때마다 어색했고 공부의 끝에 정말 교수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는지 확신도 없었다.
그 무렵, 아내가 애를 낳고 싶다고 했다.
그때도, 결혼 제의에 오케이 했던 심정과 같은 심정으로 그러자고 했다. 아내의 직장이 좋으니 어떻게든 낳기만 하면 키우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육아에 관련된 책을 읽는 건 고사하고 관련 정보도 검색하지 않았다. 아내가 임신 기간 동안 건강하기만을 바랐고 어떻게 키울지에 대한 고민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어떤 아빠가 좋은 아빠인지,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선 뭘 해야 하는지, 좋은 아빠의 조건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며 알아보지도 않았다. 여전히 내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밤잠을 설쳤고 들어오는 일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렇다. 이기적이었다.
딸이 태어난 후에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예뻐만 할 줄 알았다. 아내가 육아휴직을 좀 일찍 끝내고 복직한 후, 낮 동안의 육아를 맡은 후에도 엄청난 책임감이나 가장의 무게감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내가 돌보는 동안 딸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별 탈 없이 커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놀이나 자극 같은 걸 찾아보고 함께하는 그런 아빠는 아니었다. 다행히도 딸은 무탈하게 잘 커줬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의 무게를 실감하고, 한 사람에게 아빠로 불리는 사건의 중대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딸이 나를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할 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딛고 일어설 때쯤 휘청대다가 보행기에 부딪혀 입술 안쪽이 살짝 찢어졌을 때, 살짝 흐르는 피를 보고 엄청난 공포심, 그전까지 단 한 번도 엄습해 온 적 없던 공포심을 느낀 후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말을 하기 시작한 후, 어느 저녁, 소파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와 “아빠 눈에 은채가 있어요.” 하고 말하며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본 이후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밥을 먹기 시작한 후, 인터넷을 검색해 조리방법을 찾아내어 아욱국, 시금칫국, 연한 된장국을 번갈아 끓여주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그때가 언제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내 이름보다 은채 아빠로 불리는 것이 행복했다. 딸이 잘 자고 잘 먹고 안 아프고 잘 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마음고생 끝에 박사 수료에서 공부를 접었다. 그때 마침, 공부하는 내내, 육아를 하는 내내, 내게 프리랜서 일거리를 주면서 카피라이터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준, 그 일이 없었으면 어쩌면 진즉에 우울증 때문에 정신 병원에 갔을지도 몰랐기에, 제정신으로 살도록 큰 힘이 되어준 감독이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했다. 은채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 해, 그즈음이었다. 일주일에 하루만 출근하고 나머지는 재택근무를 하는 조건이었다. 급여는 많이 줄 수는 없지만 작가님이 자기 직원이 되면 뭔가 사업에 전환점이 올 것 같다고 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은채는 아직 내 손길이 필요했고 나도 일과 일정한 수입이 필요했다. 거짓말처럼, 내가 출근하던 그 해 봄부터 감독의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생전 못해본 시청의 일을 하기 시작하더니 그 뒤로는 여기저기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팬데믹 시국에는 더 바빴다. 내가 농담조로 그랬다. 우리의 전성기는 지금인 것 같다고.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는 동안, 딸도 4학년이 됐다.
어른이 되는 순간은, 자신을 용서한 뒤에야 찾아오는지 모른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생명이 스스로 뒤집고, 일어나고, 밥 먹고, 사탕이나 뽀로로 주스를 사달라고 조를 줄도 알고, 제 덩치만 한 가방을 메고 어린이집에 가고, 그렇게 학교에 가기까지 크는 걸 보면서 내가 내 자식에게 그러했듯, 이 세상의 모든 어른에겐 그 어른의 시간을 맞기까지 그를 생존케 한 부모의 수고가 있었음을 인식하게 된 후에 찾아오는지 모른다.
그 앎에 이어 저 평범한, 나와 모르는, 오늘 내 곁을 스쳐간 무명의 한 사람에게 수많은 이들의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 이후에 찾아오는지 모른다. 그 앎과 깨달음으로 인해 한 사람, 한 사람이 꾸려가는 삶에 대해, 그 존재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갖게 된 이후에 찾아오는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 어느 순간, 나보다 연약한 존재, 나보다 어린 존재, 나보다 어떤 필요가 더 시급한 존재에게 내 몫의 무언가-시간, 자원, 돈, 순서, 자리-를 양보하고 양도하고 심지어 이미 내 몫이 된 무언가를 떼어 서슴없이 줄 수 있게 된 이후부터, 스스로를 부끄럼 없이 어른이라 부를 수 있게 된 이후에 찾아오는지 모른다. 어른이 되는 순간은...
하굣길, 학교 후문에서 만나, 딸을 데려 왔다.
딸은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찾아 먹었다. 슬쩍 그 점퍼에 대해 물었다.
“장원영이 광고하는 점퍼 알아?”,
“응? 우리 언니들이 광고를 하도 많이 해서... 음... 박보검하고 같이 하는 거?”
“그런가? 아이더 같던데.”, 검색을 해서 보여줬다.
“아, 예쁘다. 입고 싶다.”
“그러게, 아빠도 네가 입으면 입을 것 같아서 검색해 봤는데... 삼십만 원이 넘더라.”
“헤~ 진짜?”
그렇게 혀를 내밀고 긴 감탄사를 뱉은 후,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난 마음을 돌리기가 어렵다. 올해 유달리 많았던 외부 심사비를 좀 “삥땅”쳐 놓을 걸, 몇 번의 강연료 중 일부는 아내 몰래 좀 “킵” 해 놓을 걸, 하고 후회에 후회를 이어가고 있다. 아내 몰래 사주려면, 아내 이름으로 발급받은 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사주려면 그랬어야 했는데, 미리 생각했어야 했는데, 하면서, 그렇게 후회에 후회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