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18
딸의 롱 보드는 광안리에 있는 전문 매장에서 샀다. 부산에서 보드 좀 탄다는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한 매장이라고 한다. 앞서 썼듯이 롱 보드는 외할아버지가 사주셨다. 나야, 워낙 걱정이 많은 아빠라 사주길 망설였지만 손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당장 눈앞에 대령해야 직성이 풀리는 외할아버지가 덥석 사주기로 하셨다.
그날, 매장에서 보드와 함께, 헬멧과 보호 장구도 샀다. 헬멧은 검은색으로 뒤통수에 보드를 타는 노란색 용이 그려져 있다. 뒤에 들꽃이 그려진 것도 있었는데 뭔가 연약해 보였다. 딸이 직접 용이 그려진 걸 골랐고 나 또한 “네가 용띠니 이래저래 잘 어울린다.”라고 했다.
스케이트보드를 갖고 싶었다. <백 투 더 퓨쳐>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다. 미군 부대 앞에서 보낸 어린 시절, 십 대 시절, 보드를 타는 젊은 미군의 모습이 멋있었다. 우연히 낡은 보드를 얻어 타 본 적도 있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즐거웠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자전거도 미군이 새것을 사고 남은 걸 얻어 탔고 옷도 그런 식이었다.
뭔가 나를 위한 것을 새것으로 산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십 대 후반까지, 옷은 대체로 얻어 입었다. 양말은 양말 공장에 다니던 친할머니가 불량품을 잔뜩 모아 갖다 주셨다. 최근까지도 양말을 사서 신는 것이 힘들었던 이유다.
지금도 거창한 도구나 장비가 있는 운동은 웬만하면 안 한다. 아니, 한 적이 없다. 대학 때 했던 축구, 농구도 운동화와 공만 있으면 되던 것이고 카피라이터 초년병 시절 했던 마라톤과 스포츠클라이밍도 장비가 크게 필요 없다. 물론 클라이밍의 경우엔 산에 있는 자연 암벽에 가게 되면 이런저런 장비가 필요하지만 인공 암장에서 할 경우엔 암벽화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다. 최근에 하는 수영도 마찬가지다. 수영복에 수경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고 오리발은 중급반이 되어서야 겨우 신는다.
골프를 한 적도 없고 요즘 유행하는 테니스를 친 적도 없다. 당연히 캠핑이나 드라이빙 같은 취미도 없다. 그것들은, 그러니까 뭔가 거창한 도구들이 필요하고 그 도구들의 가격이 비쌀뿐더러 그 목록 또한 끝이 없으니까. 여하간 이런저런 이유로 현재까진 아주 간편하고 간단하면서도 바로 할 수 있는 취미를 갖고 있다. 독서와 맥주 마시기와 수영.
“어린 시절의 기억은 목에 박힌 칼과 같다.”는 영화 <그을린 사랑>의 대사처럼 과거의 기억이 오늘의 삶들을 지배한다. 그 지배는 누군가의 표현처럼 부드러운 지배다. 학연이나 지연처럼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말하기 전엔 알 수 없는 과거이기에 공식적인 삶에도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다 나았지만 비만 오면 쑤시는 부러졌던 다리처럼, 이미 잘라져 없어졌지만 불쑥 간지럽거나 아픈 환지통처럼, 과거의 기억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 측정할 수 없는 통증을 발생시킨다.
하루의 삶에, 다가오는 내일에, 타인과 마주하고 관계를 맺을 때, 연애를 할 때, 헤어질 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울 때, 삶의 어떤 순간에 그 통증이 사고처럼 고개를 내민다. 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심지어 일부러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았던 사건과 경험이 오늘 일어난 사소한 해프닝과 에피소드로 인해 어제 일처럼 기지개를 켜고 깨어난다.
그 오래된, 그러나 불쑥 선명해진 기억은 내 머릿속에 있던 것이 아닌 것 같다. 아주 먼 친척이,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친척이, 촌수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먼 친척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 거액의 유산을 물려준 것처럼, 과거의 기억은 그렇게 느닷없이 내 머릿속을 채운다.
아이를 키우면서 이런 순간들이 자주 찾아왔다. 용서할 수 없었기에 잊고 지냈던 사람이 생각나서 괴로웠던 적도 있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다시 이해할 수 없게 되어서 분노의 밤을 보낸 적도 있다. 물론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과 일이 이해 간 적도 있고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한 적도 있었다.
회전 교차로에 들어와 나가는 자동차처럼 어떤 감정은 저 길로, 어떤 감정을 그 길로 갔다. 그 가운데 딸이 있었다. 애초에 딸이 없었다면 감정의 교차로에 진입하지도 못했을 사건과 사람들이다. 딸을 낳고 키웠기에 많은 것들이, 과거들이, 사람들이, 감정들이 정리됐고 그렇게 조금은 더 성숙한 인간이 됐다.
선배나 스승이 없는 삶은 가이드 없이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과 같다. 집을 나서면 보이는 황령산조차 그 길을 잘 아는 누군가와 함께 가면 훨씬 편하다. 처제가 부산에 올 때면 황령산을 오르는 데 그때마다 내가 가이드를 하는 이유다. 등산처럼, 어쩌면 인생의 많은 경험들 또한 먼저 겪은 이와 함께하면 조금 수월할지 모른다.
중학교 졸업 이후 독학의 길을 걸었다. 대학도 학과의 1기였다. 졸업을 앞둔 전 해에는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그러나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청춘이 이런 경제 불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말해 줄 사람이 없었다. 사실 대부분의 어른들도 이런 글로벌한 경제 위기를 처음 겪었거나 잘해야 석유 파동 이후 두 번째 겪는 것이었다. 그러나 석유 파동이 원자재와 관련된, 어쩌면 가시적인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된 것이라면 이 위기는 모두에게 낯선 국제 금융의 흐름이 만든 태풍에 온 국민이 말려 들어간 위기였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미래에 대한 확실한 조언을 해주질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린 예언이라도 듣고 싶은 것이 불안한 미래를 앞둔 사람의 마음이다. 틀린 예언이라도, 섣부른 전망이라도, 경험 없는 재난 속에서의 생존 방법이라도 알려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 도망치듯 대학원에 들어가서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2000년, 2001년, 2002년에도 경제는 안 좋았다. 졸업 이후 수 없이 많은 언론사에 응시했지만 다 떨어졌다. 정보도 없었고 루트도 없었다. 대학원 선배들은 나하고 인연도 접점도 없었고 교수들은 너무 먼 사람이었다. 운명처럼, 우연히 카피라이터가 됐는데, 이 역시 사수, 그러니까 선임자가 없었다. 버티며 지금까지 왔다.
그렇게, 혼자 공부하고 읽고 쓰면서 살았다. 누가 간 길을 따라가면 좀 수월했을 것이다. 가이드가 있었다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화내 봐야 소용없다. 위로를 받을 곳도, 그럴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 인연이 닿아 대학에서 제법 오래 강의를 했다. 내가 어렵게 간 길, 제자들은 좀 쉽게 왔으면 해서 열심히 강의를 했다. 그 강의를 통해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았다. 어렵게 온 길의 훈장 같았다.
더 큰 위로는 딸과 함께 도서관과 서점을 배회할 때 받았다. 딸에게 직접 한글을 가르쳤다. 아이가 글을 읽기 시작하자 아내는 이런저런 책을 사들였다. 놔두었다. 그 시기에 꼭 읽어야 하거나 다들 읽는 책이 있나 보다 했다. 직원이 몇천 명 되는 회사의 위치가 해운대다 보니 이런저런 육아/교육 정보들이 아내에게 쏟아졌다. 당연하게도 내 주변엔 그런 정보를 줄 사람이 없으니 아내가 기준이 됐다.
조금 큰 후, 그러니까 여섯, 일곱 살 때부터 단골 중고 서점에 함께 갔다. 딸은 그 서점의 어린이 코너를 오가며 몇 권의 책을 뽑아와 자리에 앉아 읽었다. 난 제 수준에 맞는 걸 갖고 왔는지 확인만 했다. 이런 방식의 책 고르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가에서 방황하다 책을 고르고 그 수준을 가늠해 보고 읽을 만한 건 읽고, 살만한 건 산다.
딸은 오래전부터 셜록 홈스 전집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연애할 때 아내가 선물한 것을 잘 갖고 있었다. 1학년 때 한번 도전했다가 포기하더니, 올 가을 다시 도전하고 있다. 과연 <주홍색 연구>를 다 읽을 수 있을까?
난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책을 누구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책은 자기만의 세계여서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하면 못 이기는 척 몇 가지 조언을 해주지만 직접적으로 이 책을 읽어라, 저 사람을 읽어라 하진 않는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이 말했듯이 서가에서 운명처럼 책과 만나는 경험을 하길 바랄 뿐이다. 그 경험을 통해 그 경험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책과 사랑에 빠져버린 사람이 되길 바랄 뿐이다. 딸에게도 그걸 바라고 있다.
학교에 입학해서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대출할 때도, 동네 주민센터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할 때도 스스로 판단하고 고른 책을 대출했다. 구립도서관에서 도서관 회원증을 만든 것도 자신이 원해서였다. 딸은 그렇게 스스로의 책 세상을 만들고 있다. 그 경로와 단계는 온전히 자신이 만든 것이기에 그 길과 세상 또한 자기 것이다.
물론 아이의 그 세계와 내 세계가 언제, 어느 순간, 어느 부분 겹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니체를 읽는다거나, 한병철이나 백상현, 고병권이나 권택영, 이정우 선생의 글을 읽을지도 모른다. 사회학이나 철학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고 미술이나 음악, 고고학이나 역사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여도 상관없다. 겹치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저 견고하면서도 유연한 자기만의 지적 세계를 만들어서 세상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세상과 유연하게 소통하는 어른으로, 그런 썩 괜찮은 어른으로,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는 그런 어른으로 커주길 바랄 뿐이다.
내가 가을을 처음 본 건 이십 대에 접어들어서다. 벚꽃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대학에 들어간 후다. 입시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어머니 집에서 점심을 먹고 창밖을 내다봤다. 감나무가 있었다. 교회 권사님 댁이었다. 그 집 형제들과는 친하게 지냈던 터라, 십여 년 간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집을 드나들었을 텐데 가을의 감빛이 그렇게 예쁜 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감을 보고 집을 나서서 좀 걸으니 늘 보던 논이 나왔다. 추수가 끝난 논엔 짚과 흙의 향기만 남아 있었다. 평야에 부는 바람은 아주 멀리서부터 향을 가져올 수 있기에 그 벌판에서 마주친 향이 그곳의 향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향은 평택의 향으로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고향이 없어 향수병은 없는 나도 가을만 되면 그 벌판이 그리웠다. 바다가 만들 수 없는 향기가 그 벌판에 있었다.
들어간 대학의 건물은 오래됐다. 기숙사도 당연히 낡았다. 한국 전쟁 직후 지어진, 일본식 구조의 낮은 1층 건물이 학교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있었다. 입학 후, 어수선한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기숙사 동료들과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올라가는데 꽃이 피었다. 벚꽃이었다. 그 몇 주 후 축제가 열렸다. 운동장엔 간이 천막이 세워졌고 천막들은 주점으로, 강의실은 나이트클럽이 됐다. 기숙사 동료들은, 당연하게도 다들 과가 다르다 보니 품앗이하듯 서로의 과주점에 몰려가 줬다. 벚꽃이 휘날리고 테두리엔 굵고 큰 소나무가 둘러쳐진 운동장을 빈틈없이 메운 천막들을 오가며 술을 마셨다. 그야말로 꽃에 취한 건지, 봄에 취한 건지, 술에 취한 건지 모르던 봄날이었다.
딸이 걷기 시작하면서 동네 산책을 자주 했다. 박물관과 평화공원, 유엔 기념 공원이 있고 황령산과 마주하는 동네에 사는 딸에겐 계절을 보여줬다. 2월부터 봄이 시작된다. 동백이 겨울을 제치고 솟아오르면 목련과 매화, 모과꽃, 삼색병꽃이 그 뒤를 이었다. 벚꽃이 피면 잔디만큼 키가 작은 앵초와 꽃잔디가 뒤를 따랐고 5월로 이어지면 이팝나무와 흰금강초롱, 낮달맞이꽃이 곳곳의 화단과 박물관 정원, 평화공원 뜰과 가로수를 가득 메웠다. 딸은 그 사이를 걷거나 유모차로 지나면서 꽃의 이름을 물었고 우리는 함께 꽃과 함께 계절을 음미하는 법을 알아갔다.
여름에는 능소화와 무궁화, 장미가 피었다. 딸이 다니는 학교 담과 앞집의 담은 능소화의 오렌지색과 장미의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나비를 닮은 백접초와 홍접초는 그 연약한 모양새와 어울리지 않게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버텼고 어느덧 선선해지면 빌라 화단에선 금목서가 그 진한 향기를 뿜어냈다. 금목서가 서서히 지고 일기예보에선 쌀쌀한 시월 중순의 날씨를 긴박하게 알리면 은목서의 향기가 등굣길에 동행한다. 그렇게 우리는 꽃과 함께 계절을 음미하는 법을 알아갔다. 아빠는 스물이 넘어서야, 아니 어쩌면 딸을 낳은 후, 마흔이 넘어서야 알게 된 계절의 참모습을 딸은 벌써 깊이 알고, 보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계절을 맛있게 먹고 있다.
언젠가 썼지만, 딸은 좋은 여행 파트너다. 여행을 좋아하고 즐길 줄 안다. 박물관도 좋아하고 놀이 공원도 좋아한다. 바다도 좋아하고 산도 좋아한다. 경치가 좋은 카페나 펜션, 전망 좋은 호텔에서 망중한의 시간을 보낼 줄도 안다. 어지간한 카페는 바다가 보이는 부산이지만 유달리 그 경치가 남다른 카페들이 있다. 딸은 그런 카페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곱씹을 줄 안다. 그 풍경을 보면서 달디 단 디저트와 따듯한 음료를 마시며 엄마, 아빠와 수다를 떨 줄도 안다. 낯선 도시에서 낯선 음식을 먹고 낯선 잠자리에서 제 집처럼 잠들 줄도 안다.
아빠에겐 여전히 어렵고 힘든 것들이지만 딸에겐 자연스럽다.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으로, 익숙한 자리에서 낯선 자리로, 거리낌 없이 이동하고 적응한다. 경험이 경험을 만든다는 걸 아이를 키우면서 알았다. 흔한 말로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어본다는 말이 맞다. 낯선 것에 대한 경험은 다른 낯선 것을 향한 디딤돌이 된다. 어느 날 갑자기 탐험가가 될 수는 없다. 세상의 모든 등반가들의 첫 등산은 동네 뒷산이었다. 작은 경험, 사소한 체험들이 더 큰 경험과 체험으로 이어진다. 부산 인근의 울산, 김해, 경주 여행은 강원도와 서울 여행으로 확장되고 국내 여행은 해외여행으로, 유명한 대도시와 관광지 여행은 소도시의 여행과 목적과 의미가 있는 여행으로 이어진다.
내가 살면서 겪은 경험과 딸이 살면서 겪은 경험의 양과 질은 다르다. 딸은 이미 나보다 가 본 나라도 많고 그 나이 때의 나보다 읽은 책도 압도적으로 많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배운 영어를 이미 배워 익혀 읽고 말할 줄 알고 뉴스에서 나오는 어려운 단어들 중 절반 정도는 대충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그 나이 때 알고, 듣고, 본 직업과 직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직업, 직장, 전문 분야를 이미 알고 있다. 딸의 최근 꿈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동물학자, 또는 생물학자다.
이 좁힐 수 없는 간극을 갖고 있는 두 개의 직업이 한 아이의 미래 희망 직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재주가 내겐 없다. 두 직업 다 내가 그 나이 때 없었거나 상상조차 못 한 직업이었다. 내 경험, 내 상식으로 딸의 오늘도, 내일도, 먼 미래도 가늠해 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지. 나이를 먹을수록, 해가 바뀔 때마다, 카피라이터의 연차가 더해 갈 때마다 다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