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은 맨 몸 운동이다. 오리발을 끼고 하는 핀 수영이 있지만 근본적으론 맨 몸 운동이다. 아마 취미로 하는 운동 중에서 장비에 드는 돈이 제일 적지 않을까? 내가 오랫동안 했었던 운동, 그리고 내 또래 남자들이 현재 많이 하는 취미 몇 개랑 비교해 보겠다.
축구나 농구는 신발이 중요하다. 요즘 알만한 브랜드에서 신을 만한 걸로 사려면 십만 원은 당연하고 이십만 원이 넘는 것도 흔하다. 축구화는 또 어떤가. 나이키나 아디다스, 요즘 뜨고 있는 뉴발란스에는 삼십만 원짜리 축구화도 있다. 그런데 이게 또 어디 한두 켤레 갖고 되나? 농구화를 코트 성격에 따라 두 개 이상 구비하고 있는 사람도 흔하다. 축구화는 말할 것도 없다. 천연잔디와 인조잔디용으로 나뉘고 여기에 수중 경기에 적합한 축구화가 또 따로 있다. 여기에 공과 장비를 넣고 다니는 가방, 트레이닝복, 각종 액세서리까지 포함하면 한번 경기하러 갈 때마다 몇십 만 원어치를 몸에 지니고 움직여야 한다.
그나마 마라톤이 좀 저렴한 스포츠인가? 뭐, 운동화만 있으면 일단 달릴 수는 있다. 그러나 뛰는데 이력이 붙으면 러닝화의 종류가 확 늘어나고 가격 또한 뛴다. 요즘 같이 첨단 소재가 들어가는 마라톤화는 축구화, 농구화 가격과 별반 차이가 없다. 뛸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나고 기록도 좋아지고 슬슬 대회를 기웃대기 시작하면, 기능성 의류에 눈이 간다. 여기에 기록을 재는 좋은 시계, 그리고 마라톤용 고글까지. 여하간 난 마라톤 할 때 산 윈드브레이커와 고글을 아직도 입고 쓰고 있다.
스포츠클라이밍은? 일단 암벽화만 있으면 시작은 할 수 있다. 그러나 클라이밍 하기 좋은 바지가 필요하다. 이게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입어보면 움직임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벽에서 안 떨어지고 오래 붙어있다 싶으면 손에 습기를 없애 건조하게 해주는 마그네슘 가루를 넣는, 허리에 두를 수 있는 작은 가방이 필요하다. 여기에 야외의 인공암장이나 천연 암벽을 타기 위해선 로프와 카라비너, 헬멧도 필요하다. 로프와 내 몸을 이어주는 하네스도 필요하고 도르래처럼 줄을 이용해 내 몸을 올릴 수 있는 등하강기도 필요하다. 여기에 빙벽에까지 눈을 돌리면 피켈도 필요하고 당연히 배낭, 물통.... 그만하자.
내 또래 남자들은 골프를 한다. 이게 또 돈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고 하지? 클럽 세트와 가방, 장갑, 골프공, 여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라줘야 되는 골프 웨어까지. 그뿐인가. 골프를 배우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 필드에 나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다. 뭐, 남자에 따라선 커다란 골프백을 넣고 다니겠다고 차를 큰 차로 바꾼다는 사람도 있다니, 이 역시 만만치 않은 운동이다. 낚시 얘기는 하지 말자. 골프는 낚시에 비하면 경제적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슬쩍 들었던 것 같기도.
수영이 장비 탓을 할 수 없는 이유
수영은, 다시 말하지만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된다. 다른 글에 쓴 것 같은데 삼만 원대에 파는 초보자용 남자 세트도 있다. 그러니까 수모, 수영복, 수경이 포함된 세트를 말이다. 다 따로 산다 해도, 글쎄 십만 원이 넘을까? 일단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수영복은 삼만 구천 원이다. 계산하기 어려우니, 뭐 일단 사만 원으로 하자. 수경이 얼마였더라... 검색해 보자. 아, 내건 좀 고급이었구나. 그래서 생일 선물로 사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오만구천 원이다. 육만 원이라 퉁치면, 합하면 딱 십만 원이다. 수모는 대략 만원 안팎이다. 초보자 용 수경은 대략 이삼만 원 대니 수영의 초기 비용은 앞서 말한 운동에 비하면 아주 저렴한 편이다.
결국 이런 이유로 다른 운동은 못하면 장비 탓을 할 수 있다. 좋은 장비가 나오고 신기술이 들어간 신제품이 나오면 눈이 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수영은 아니다. 거듭, 거듭 말하지만 수영은 못하면 온전히 내 탓이다. 초급반 시절 도저히 수영이 늘지 않는 건 온전히 내 저주받은 몸뚱이 탓이다. 중급반에 올라갔는데도 여전히 접영이 안 된다면 그건 내 뻣뻣한 관절 때문이다. 평영이 안 되면 주인 말을 안 듣는 발목과 고관절, 그리고 형편없는 내 박자 감각 때문이다. 고급반 회원이 수영이 잘 안 되는 건 어제 마신 술 탓이고, 잠을 못 잔 탓이거나 몸이 안 좋은 탓이다. 고급반이 됐는데 오히려 살이 찌는 건 슬슬 꾀를 부리고 요령을 부리며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무슨 반에 있든 수영이 안 된다면, 무조건 내 탓이다.
아 물론, 핑곗거리를 찾을 수 있다. 잘 생기고 멋진 남자 강사에게 정신이 팔려 수영에 집중 못할 수도 있다. 드물게 왕림하시는 여자 강사의 완벽한 역삼각형 몸매에 정신이 팔려 딴 궁리(?)를 많이 하는 바람에 강사의 말이 귓등으로도 안 들려서 그럴 수도 있다. 이번 달에 새로 합류한 미모의 여자 회원과 가까이 붙어 수영을 하려고 일부러 뒷줄로 물러나서 수영 실력이 답보상태에 빠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도 읽었다시피 그건 순전히 내 눈과 정신머리 탓이다. 그들에겐 잘 못이 없다.
수영 실력을 키우고 싶어서 수모를 새로 사고 수경을 업그레이드하고 이십만 원이 넘는 - 여자 수영복에서 십만 원이 넘는 걸 찾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비싼 순으로 정렬하면 물론 십만 원이 넘는 제품이 제법 보이지만 인기순으로 정렬하면 오만 원대부터 보인다 - 수영복을 샀다는 여자 회원이나 오만 원이 넘는 수영복을 새로 구입했다는 남자 회원을, 난 아직 본 적이 없다.
수영은 결국 안 돼도 내 탓, 잘 돼도 내 탓이다. 그래서 - 앞선 글에도 썼지만 - 수영을 잘하고 싶으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최대한 자주 나와서 강사가 시키는 대로 묵묵히 하는 수밖에 없다. 물속에서 더 멀리 갈 수 있도록 몸의 스트림라인을 철저히 만들고 더 많은 물을 잡을 수 있도록 손을 멀리 뻗고 손바닥을 펴고 물을 끌어당길 수 있도록, 그런 스트로크를 해도 팔의 무리가 오지 않도록 반복해서 훈련하는 수밖에 없다.
언젠간 만나게 될 인생의 진실
수영을 배우는 수영장에선 래시가드를 입을 수 없다. 아주 가끔 상체에 문신이 많은 사람에게만 특별히 허락된다. 내가 수영을 하는 동안엔 딱 한 사람 봤다. 그 외의 사람들은 수영복을 입어야만 한다. 수모를 쓰고 수경을 써야만 한다. 옷으로 커버됐던 신체의 단점도, 헤어스타일로 완성시켰던 외모도, 피부를 가리고 눈을 크게 보이게 했으며 입술의 색을 바꿨던 메이크업도, 블링블링한 팔찌나 호랑이 눈을 닮은 큰 알을 박은 반지나 목에 담이 걸릴 것 같은 굵은 순금 체인도 수영장 밖에 두고 와야한다. 머리를 가리고 맨 얼굴을 드러낸 채 적나라한 내 신체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곳이 수영장이다.
살다 보면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다.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외모와 신체조건, 두뇌는 기초공사다. 여기에 학벌도 무시 못 한다. 직장은 말할 것도 없으며 당연히 돈도 중요하다. 살면서 생기는 패션 감각이나 스타일도 중요하다. 좀 나이가 들면 명품도 중요하고 자동차도 중요하고 사는 아파트도 중요해진다. 미모도 사라지고 젊음도 가 버린 뒤, 어느 순간 이것들로는 커버가 안 되는 생의 순간이 온다. 나이가 들면 그 어느 것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타인의 민낯이 보인다. 내 민낯 또한 보여줘야 하는 순간이 온다.
어느 정도 경력이 되면 직함이나 직위로는 설명이 안 되는 내공을 보여줘야 할 때가 온다. 고급 자동차의 열쇠나 고급 아파트의 길고 긴 브랜드로는 드러낼 수 없는 인격의 깊이를 느끼게 해줘야 할 때가 온다. 학벌이나 학위가 아닌 인생의 파도와 역경을 건너온 사람만이 전해주는 인생의 지혜와 연륜을, 그것을 기대하는 후배와 젊은이에게 보여줘야 할 때가 온다. 오직 듣기만 했고 이렇다 할 조언을 하지도 않았는데 선배를 만나면, 그저 선배의 미소만 보면 불안한 마음이 잠잠해진다는 말을 들어야만 하는 때가 온다.
수영을 하는 것만 봐도 그 사람이 수영장에서 보낸 시간을 가늠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앞에 말한 이런 인생의 민낯을 보여줘야 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당당하고 아름답고 눈부시고 곁에 두고 싶은, 그래서 아랫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동년배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을지 짐작할 수 있다.
사족....
이 글을 쓰면서 난 아직 멀었음을 새삼 확인했다. 인격이 수영 실력만큼만 돼도 좋으련만... 오늘, 처음 온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고급 A반에 처음 등장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던 사람이다. 7월도 중순으로 접어드는 이 시점에 낯선 반에 첫 출석이라. 이래서야 어디.... 다음 주에는 다음 달 등록을 하는데 이 사람도 등록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