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의 독서, 어쩌면 평생의 독서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42

by 최영훈

책 때문에 바쁜 사람들

종종 했던 얘기지만 책은 안 팔린다고 하고 출판사도 창업하는 곳보다 망하는 곳이 더 많다고들 하는데 이상하게 내 주변엔 책 이야기 하는 사람이 많다. 지난봄, 이직을 한 처남의 회사에선 매달 3만 원 정도 도서 구입비로 책정해놨다고 한다. 역사 분야 외에는 관심이 없는 처남이라 누이와 나, 조카에게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말하라고 해서 달에 한두 개 정도 말해주고 있다.


아내도 요즘 책 때문에 나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얼마 후 미국에 사는 처제를 보러 가는 데 처제가 언니 편으로 읽을 만한 책을 몇 권 사 오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한 것이다. 아니, 그깟 국산 책 대충 아마존에 주문하거나, 이 K 컬쳐의 시대에 미국의 대형 서점만 가도 살 수 있지 않나 싶겠지만, 그게 또 아닌 모양이다. 우선, 한국 도서를 파는 대형 서점은 그야말로 이름만 대면 어디 있는지 알만한 대도시나 한인들이 밀집해 사는 몇 몇 도시에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간호사로 바쁜 처제가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할 시간도 없고, 그런 사이트를 통해서는 도대체 어떤 책이 읽을만한 책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내처럼 책 모임을 기웃거리든가 이런저런 블로그나 SNS를 들락거리면 그나마 감을 잡을 수 있겠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고 말이다.


여하간...이런 이유로 언니에게 부탁을 했는데...읽을 만한 책이라... 이런저런 책 목록을 보는 아내가 안쓰러워 물었다. 처제가 좋아하는 분야가 뭐고, 어떤 책을 원하는지를 말이다. 아내가 말하길 읽어보고 읽을 만한 책 몇 권을 사 오라고 했단다. 이거야 말로 어려운 주문 아닌가? 네가 먹어보고 맛있는 걸로 사 오라는 주문, 네가 입어보고 예뻐 보이는 걸로 사 오라는 주문만큼 난해하지 않나?


게다가 아내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처제는 간호학을 전공한 사람이어서 각기 익숙한 분야와 관심사 또한 다를 텐데 그 책의 호불호를 어떻게 다른 사람이 맞출 수 있겠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책 몇 권을 들춰보고 있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책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는 처제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내를 지켜보는 요즘, 이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게 된 김에 책 읽는 아이로 키우는, 뭐랄까, 나만의 비법 아닌 비법을 써보기로 했다.


책을 멀리하기 시작하는 나이

EBS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책맹 인류>다. 내가 본 것은 2부였다. 내용이 마침 초등학교 5학년의 독서를 다루고 있어서 잠시지만 유심히 봤다. 내용은 간단하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 그 이유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는 독서가 숙제처럼 되어버렸다는 것, 다른 하나는 보상 체계에 의해 독서를 한다는 것. 그러니 독서가 일종의 해야만 하는 숙제이자 이겨야만 하는 시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면 독서가 즐거울 리 없다. 이러면 독서의 깊이가 있을 리 없다.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읽어야 한다면 누가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겠는가. 당연히 쉽고 얇은 책을 읽게 된다. 숙제로써 읽는다면 당연히 완독을 목표로 삼지 정독이나 숙독을 목표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독서는 책의 권수가 곧 실적이다. 이 책과 저 책의 연결을 통해 자신의 지식의 망을 구축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아니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선 위와 같은 초등학교 5학년이 책을 읽지 않는 여러 이유와 함께 부모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약간의 암시를 줬다. 물론 그 암시가 구체적으로 어찌하라는 행동을 명시하지 않아 답답한 부모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지 몰라 우리 가족 최초로 공공도서관 회원증을 발급받아 활발히 도서관을 드나들고 있는, 현재 초등학교 5년인 딸이 있는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가 꾸준히 책을 읽게 하는 방법 몇 가지를 적어보려 한다.

이상한 아빠의 팁 - 헤매게 해라.

다큐멘터리에도 나왔지만 많은 부모들이 권장도서 목록을 들고 책을 사 오고, 나름의 바람을 담은 책을 사들고 온다. 그런 책을 아이한테 내밀면 읽을 리 없다. 아니, 상식적으로, 중국집에 가서도 먹고 싶은 메뉴를 스스로 고르는 애들이 남이 권해준 책을 읽을 리가 있겠나? 다큐멘터리에도 나왔듯이 아이 스스로 서가를 헤매게 해라. 필자는 딸이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자주 가는 동네의 중고 서점에 데리고 다녔다. 물론 미취학 아동일 때는 적절한 책을 권해주기도했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읽고 싶은 책을 골라오라고 했다. 아빠는 여기에 있을 테니 세 권만 골라 오라고 했다. 잘 골라오면 바로 사주겠다고 약속을 하며 말이다. 딸은 심사숙고해서 세 권을 골라 왔다. 난 저자와 번역가, 출판사, 책의 물리적 상태, 내용의 깊이 등, 다각도로 책의 품질을 가늠하여 한두 권을 선택한 뒤, 선택받지 못한 책은 제 자리에 다시 꽂아두고 다른 책을 몇 권 더 찾아오라고 시켰다. 이걸 반복시켰다. 그렇게 딸은 서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자신이 끌리는 책을 찾아다니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게 됐다. 이후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관련 분야의 서가를 찾아 관련 책을 찾는 것도 자신이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고 말이다. 덕분에 요즘에 난 딸과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보호자나 결제하는 역할 정도만 하고 있다.


뭐 하나에 미치게 놔둬라.

우리는 교양 필독서, 권장도서에 익숙하다. 그러나 아이들의 관심사는 순식간에 바뀐다. 뽀로로가 최고였던 아이가 어느새 프리파라나 시크릿 쥬쥬에 빠졌고 열 살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아예 만화를 보지도 않았다. 책도 마찬가지다. 3학년 때는 환경 관련 책을 열심히 읽더니 4학년 때부터는 판타지 소설을 곁들여 읽기 시작했다. 5학년 들어서는 사회 시간에 헌법을 배우더니 갑자기 헌법 관련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런 변덕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꿈이 어제와 오늘 다른 것처럼 관심사가 바뀌는 건 당연하다.


정말 중요한 건 그 관심사에 대해 깊이 알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인터넷으로 간단히 검색해서 알 수도 있고, 유튜브의 영상을 통해 알 수도 있다. 아이가 책을 통해 그 분야의 지식의 깊이를 갖추고자 한다면 당연히 부모로서는 환영해야 한다. 변덕은 당연한 것이다. 관건은 어떻게 접근하느냐이다.

표지와 이 사진 속 책들은 최근 딸이 도서관에서 빌린 법에 관한 책들이다.

다 읽지 못했다고 책망하지 마라.

아이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내가 난이도를 조절해주지 않는다. 딸은 자기 스스로 수준에 맞는 책에서부터 조금 어려운 책, 아주 어려운 책을 골고루 빌린다. 얇은 책, 두꺼운 책을 섞어 빌리기도 한다. 그 모든걸 일일이 가늠하고 알고 빌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관심 분야의 서가에 가서 끌리고 궁금하고 읽고 싶은 걸 가져오는 것이다. 당연히 어렵거나 두꺼워서 반납 전까지 읽지 못하는 책이 발생한다. 아니 그런 경우가 흔하다. 아이가 책을 빌리는 순간 감이 온다.


그러나 그때 난 왜 다 읽지도 못할 책을 뭐 하러 빌렸냐고 잔소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가 도서관에서 대출하면서, 다 읽지 못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대출을 망설이거나 대출 후 불안해 하면, 도서관은 원래 그러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빌렸다가 다 못 읽고 반납하길 반복하면서 자신의 독서 수준을 가늠하고 그 취향을 알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고 말해준다. 덕분에 딸은 가벼운 마음으로 끌리는 책을 빌린다. 한 번 빌릴 때마다 다섯 권, 이주 안에 다 읽고 반납해야 한다. 어른도 만만치 않다. 아이한테 다 읽기를 바라는 건 무리다. 난 그중에 두세 권만 읽어도 다행이라고 본다.


먼저 읽어라.

내가 아이에게 여가시간 가장 많이 보여주는 모습 세 개를 꼽으라면 맥주를 마시는 모습, 스포츠를 보는 모습, 그리고 책을 읽는 모습일 것이다. 아니 사실 이 모습뿐이다. 요즘엔 아예 책을 읽는 자리가 정해져 있다. 새로 단장한 베란다 구석에 캠핑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거기서 책을 읽는다. 내가 책을 읽을 때, 아이가 TV를 볼 때도 있다. 그래도 그냥 놔둔다. 그럴 땐 베란다와 거실 사이의 중문을 닫는다. 조금 있으면 지도 눈치가 있으니 TV를 끄고 거실 테이블에 앉아 숙제를 하든가 책을 읽든가 한다.


마지막으로, 좀 역설적 일지 모르지만 독서는 그저 한갓 취미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 줘라. 부모 스스로 “심심한데 책이나 읽어볼까?”하는 마음으로, 그런 기분으로 가볍게 몇 장 들춰봐라. 일상적으로 책을 읽는 부모가 독서가 일상인 자녀를 만들지 않을까? 난 아무런 책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뭐라도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작정하고 책상이나 테이블에 앉아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책을 읽지 마라. 무슨 엄청난 과업인 것처럼 말이다. 난 종종 맥주를 마시면서 앞서 말한 캠핑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곤 한다. “책을 읽는 것이 뭐 그렇게 심각한 일이냐, 그냥 심심하면 맥주 한 잔 하면서 들추는 것이 책이다.” 이런 메시지를 아이에게 보내고 있다. 덕분에 아이도 심심하고 한가하면 책이나 좀 읽어볼까, 하는 자세를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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