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배우고 깊이 아는 사람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44

by 최영훈

문해력과 단어

아침, 등교 전, 딸은 TV를 통해 유튜브로 이런저런 콘텐츠를 본다(딸이 보기 전까진, TV로 유튜브를 볼 수 있는지도 몰랐다.). 주로 스우파와 제로베이스원에 관련된 것이지만 가끔은, 특이하게도 EBS 다큐멘터리를 볼 때가 있다. 내 자식이지만 참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며칠 전, 골라듄 다큐라는 콘텐츠를 보던데, 그 내용이 중2의 문해력에 관한 것이었다. 단어를 몰라 교과서를 이해 못 한다니....

https://www.youtube.com/watch?v=Em7U-qJfB3c


앞서 말했듯이, 딸은 2학기부터 영어 학원에 다니고 있다. 그 학원에서 영어 단어 시험을 보는데, 딸이 가져온 그 단어의 목록을 보니 만만치 않다. Anarchy, Aristocracy 같은 단어가 당연하다는 듯 들어 있었다. 며칠 전 아침, 영어 공부를 하던 딸이 공부방 문을 빼꼼 열고 날 불렀다. 문제에 포함된 단어의 뜻을 물었다. Positive와 Negative. 흠.... 이게 초등학교 5학년이 알아야 될 단어인가? 잠시 생각하다, 딸의 궁금해하는 표정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알려줬다.

낱말과 낱말, 뜻과 뜻

<동사의 맛>에서인가? 김정선은 낱말은 자신의 의미를 다른 낱말에 기대어 그 의미를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선 다른 낱말과 개념을 끌어올 수밖에 없다는 것. 영어도 마찬가지라는 걸 새삼 알았다. 영어를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단어의 뜻을 아는 것. 맥락에 따라 많게는 열 개, 적어도 서너 개의 뜻을 가진 영어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선, 역설적이게도 한국말을 무지하게 잘 알아야 한다는 걸, 번역가가 극한 직업임을 요즘 딸의 영어 공부를 보며 새삼 느끼고 있다.

실재와 실체

어제, 작업실에서 퇴근한 후, 늘 그랬듯 루틴처럼, 근처 슈퍼에서 맥주와 편육을 사 왔다. <짱구는 못 말려>의 주인공이 모델이 그려진 캔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딸에게 재미있는 걸 보여주겠다며 맥주를 꺼내 보였다. "재미있지 않아?", 딸은 “오, 귀엽다.”를 연발하며 하나를 들고 엄마에게 가서 보여줬다. 아내는 철없는 두 명의 초등학생을 보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이 날 아침 봤던 다큐멘터리에 대해 아내에게 말했다. 단어와 개념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요즘 읽고 있는 이정우 철학자의 책으로 이어졌다. 그 양반은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정말 공을 들인다고 말해줬다. 예를 들어 실재(實在)와 실체(實體)를 설명하는데 대여섯 페이지는 할애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다 불쑥 딸에게 그 두 단어, 실재와 실체의 의미를 설명해 보라고 했다. 딸은 잠시 가만있더니 실재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으로, 실체는 뭔가 사건의 중심이나 가려져 있던 진짜인 무엇으로 설명했다. 맘에 들었다. 혹시나 해서 이어 물었다. 그럼 실재의 반대말이 뭐라 생각하는지를. 딸은 또 생각했다. 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질문한 아빠는 재촉하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드디어 딸이 입을 뗐다. "환상?", “정답!”, 난 크게 외치며 박수를 쳤다. "야~ 정답이다. 정답이야. 그렇지. 허구, 상상, 환상... 그런 게 답이지.", 이 단어 중 정답으로 생각했던 건 환상이었다. 라캉의 이론으로 봐도,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봐도, 그리고 광고 이론으로 봐도 환상이 가장 적절하다.


뉘앙스

딸은, 세상의 모든 딸들은 뉘앙스에 민감하다. 어찌 보면 동어반복이다. 뉘앙스 안에 민감함이 내포되어 있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딸들은 고민한다. 어떤 단어가 적합할지 심사숙고한다. 썼다 지우고 말하려다 삼킨다. 그 망설임이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럴 때, 아빠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글과 말이 나올 때까지, 그래도 쉽게 꺼내지 못하여 결국 아빠에게 질문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줄 뿐이다. 그렇게 미묘한 뉘앙스의 떨림 속에서 자신만의 사전을 만들면서 자신만의 문해력을 높이고 있다. 어제저녁 영어 공부를 하던 딸이 또 물었다. "아빠, 아나키가 뭐야?", "무정부.", "무정부가 뭐야?", "무정부란....", 그렇게 무정부에 대해 잠시 설명했다.


애가 학교에 가면 부모도 공부해야 한다던데, 다행히 똘똘한 딸을 둬서 아내나 나나 큰 걱정 없이 본업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벌써 초등학교 5학년한테 아나키즘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될 줄이야. 내가 아나키즘이나 하이어라키(Hierarchy) 같은 단어를 알게 된 건 대학에 들어가서, 전공 필수로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사회학>을 교재로 사회학을 들을 때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클 때보다 모든 게 이르고 빠르다는 걸 실감 했지만 요즘엔 더 그렇다. 과거의 공부만으로 아이와 책상을 두고 마주 앉기엔 불안하다. 책을 읽는 이유중 하나다.


많은 걸, 조금은 이르게, 조금은 빨리 공부하는 딸을 보며 이런 걱정을 하게 된다. 그 이름과 빠름 속에서 단어와 개념에 대한 오랜 숙고와 깊은 통찰을 놓치고 가지는 않을지, 그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걱정을 한다. 이런 걱정에 철이 없는 아빠는 하나의 바람을 덧댄다. 느리게 배워도 깊이 알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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