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진짜 자신감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46
이상한 꿈
연휴가 끝나고 작업실에 가니 감독은 열심히 편집 중이었다. 연휴 동안 술 깨나 마셨을 텐데 부은 기색이 없다. 편집 걱정에 과음을 하지 않은 듯. 잠시 일 이야기를 한 뒤 감독이 옅은 걱정을 내비쳤다. "추석 전에 전화도 오고 해서, 연휴 끝나면 미팅을 다녀야 하는데... 올해는 그런 게 없네요."
그런 감독에게 난 9월 초순에 꾼 꿈 이야기를 해 줬다. 난 팀에 중요한 일이 생기기 전에 종종 특이한 꿈을 꾸곤 한다. 몇 해 전, 정초 엔 전통 창호지문 사이로 호랑이 꼬리가 삐죽 튀어나와 내 눈앞에서 살랑거리며 흔들리는 꿈을 꾼 적도 있다. 그 이후로 우리를 찾는 전화가 얼마나 많이 오던지.
그렇게 두 개의 꿈 이야기를 해줬다. 생전 처음 꿔본 내용의 꿈이었다. 그 후 이제 조만간 전화가 올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감독이 “어디 절에라도 갔다 왔는교?”, “손오공 이야기 아닌교?” 하고 농담 반 기대 반을 섞어 말해 함께 웃었다. 꿈의 내용으론 그리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
점심을 먹고 나서 난 칼럼을 쓰고 감독은 VR 회사의 담당자와 CG의 카메라 앵글을 수정하고 있는데 감독의 휴대폰이 울렸다. 감독의 말소리를 들어보니 모르는 곳에서 걸려온 전화인 모양이다. 끊은 후 내용을 물어보니 한 번도 일해 본 적 없는 도시의 시청 기획부서에서 우리가 만든 다른 시의 영상을 보고 일을 맡겨볼까 싶어서 영상 샘플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감독은 잠시 후 샘플을 보내줬고 다음 날 바로 전화 와서 바로 만나자고 했다고 한다. 감독은 상견례 인사차 먼저 혼자 들어갔다.
거짓 자신감/자존감
저녁을 먹으며 딸과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딸이 말했다. 자기가 원래 소심했는데 이렇게 바뀐 거라고 말하면 친구들이 놀라워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넌 소심했던 게 아니라 조심스러웠던 거라고. “그 두 개가 다른 거야?”,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지. 그런데 너 같은 종류의 조심스러움은 준비되면 없어져. 넌 걱정이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공부하고 준비하는 스타일이야. 그래서 네 자신감은 근거 있는 자신감이지.” 그러고 나서 작업실에서 있었던 꿈과 전화 이야기를 해줬다. 이어 말했다.
"이런 전화가 오면, 경험이 없는 젊은 애들은 마냥 좋아하지. 설령 누군가 혹시라도 경험이 없는데 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고 의심하면, 야, 우리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하고 서로 간에 으쌰으쌰 하지. 이런 자신감은 거짓 자신감이야. 반면에 감독님이나 아빠 같은 사람의 담담한 자신감은 경험에 기인하는 거야. 그동안 쌓은 노하우와 실력이 바탕이 되는 거지."
"이런 자신감은 냉정한 자신감이야. 일이 시작되면 얼마나 힘들고 복잡할지가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시나리오를 대여섯 번 고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 모든 걸 헤쳐 나갈 방법을 아는데서 오는 자신감이지. 네가 시험 때가 되면 열심히 공부하고 학원 숙제도 알아서 하고 주산 자격증 시험 볼 때도, 음악 줄넘기 승급 시험 볼 때도 열심히 연습하는 건 결국 이런 종류의, 진짜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야. 넌 그게 뭔지 알고 있는 거지."
주제 파악
그러다 내 학창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반 아이들이 반장인 자기 말을 안 듣거나 따라주지 않아서 속상하다는 딸의 하소연에 대한 내 나름의 위로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빠 중학교 때, 한 반에 60명 정도 됐어. 우리가 7 반인가까지 있었으니까 거의 400명이 넘었지. 그런데 시험을 보면 말이야. 그 전교생의 석차가 통지표에 표시가 됐어. 60명 중에 몇 등, 400명 중에 몇 등. 당연히 애들이 자기 주제 파악이 됐겠지?아빠 때는 반 평균이 떨어지면 단체로 맞고 그랬거든. 그래서 공부 못 하거나 관심 없는 애들도, 너 네 말로 일진 애들도 공부 잘하는 애들이 공부하고 있으면 알아서 조용히 해줬어. 왜? 걔가 시험 못 봐서 반 평균 떨어지면 맞으니까.
그래서 아빠 때는 왕따 같은 거 없었어. 다들 뭐 끼리끼리 놀았지. 서로의 스타일을 존중해 주면서. 그런데 니들은 아직 그런 게 없어. 못 생겨도 예쁜 줄 알고, 공부를 못 해도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자기 포지션을 모르는 거지. 네 친구 지유가 아직도 아이돌이 꿈인 것도 그래서 그래. 그러다 중학교 올라가고 고등학교, 대학 가면 멘붕 오는 거야. 아니 왜 아무도 진실을 얘기해주지 않았던 거야, 이러면서. 그러니까 지금 너 네 반 애들이 나 잘났네, 네가 뭔데 이러냐, 이러는 거 신경 쓰지 마. 때가 되면 알게 되어 있어.”
근자감; 근거 있는 자신감
정자항에 북동풍이 불 때, 감독은 파도를 찍으러 들어갔다. 새로 산 장비에 바닷물이 튀고 염분이 들어가는 것도 개념치 않았다. 큰 덩치를 휘청거리게 하는 거친 파도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게 그 사람이다. 요즘엔 카피나 홍보영상 시나리오나 콘티를 만들 때, “이 사람이 어떻게든 영상으로 만들어주겠지.”하는 믿음으로 마음껏 쓴다. 그는 나하고는 비교도 안될 만큼 꼼꼼하고 영상에 진심인 사람임을 아니까.
딸 친구들 중엔 인스타그램을 하는 애들이 있다. 반면 딸은 카톡만 한다. 인스타그램을 하고 싶어 하는 딸에게 종종 말해준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자랑을 하고 자신감과 자존감을 말하는 건 허상이다. 넌 그럴 필요가 없다. 너 정도 되는 애들은 때가 되면 세상이 알아보게 되어 있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이날 저녁 식사 시간에 말해 줬듯이 내일의 두려움을 이기는 건 오늘의 열심뿐이라고도.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요즘, 딸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