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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Dec 14. 2023

눈부신 네가 멀리서 오고 있으니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05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사라짐은 애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망각도, 그리움도 허락하지 않는다. 끝도 없는 기다림만 있을 뿐이다. 사라지지 말라는 말이 죽지 말라는 말보다 더 절실하게 와닿는 이유다.      


사라짐은 찾음을 유발한다. 사라진 사람은 찾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어딘가에 존재하다 다른 어딘가로 이동했을 때, 그 이동 전의 장소에서 당신을 찾는 사람이 당신의 부재를 인식하면 그때 사라짐이 발생한다. 또, 나갔던 사람이 돌아와야 할 장소에, 제시간에 오지 않으면, 그 귀소의 지연이 누군가에게 길게 느껴져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때, 그때 사라짐이 발생한다.


결국, 다시 말하지만 사라짐은 찾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을 전제로 한다. 결국, 당신이 돌아가야 할 장소가 없다면 당신은 사라질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않고 다른 장소에 있는데도 그 이동을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면 당신은 사라질 수 없다. 사라짐은 타자의 인식으로 발생한다.      


예상되는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다. 물론, 다른 글에도 썼듯이 모든 죽음은 죽은 자의 공백을 남긴다. 그러나 없는 이의 공백은 시간 속에서 수용된다. 살아남은 자에게 정리의 시간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애도의 시간이다. 물론 남아 있는 이마다 그 시간은 다르다. 누군가는 몇 달이면 족할 테지만 누군가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애도가 끝나면 그리움이 남는다. 영화 <코코>에 대한 글에서 썼듯이 그리움은 죽은 자를 소환한다. 죽기 전의 그 순간, 그 사람의 이미지를 소환한다. 그에게 산 자의 옆자리를 허락한다. 실제로 실재하지 않아도 된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대신 내는 사이비 강령술사는 필요 없다. 말이 없어도 된다. 들어주기만 해도 된다. 아니 듣지 못해도 된다. 그러나 산 자들이 죽은 자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그렇게 말하며 그리워하지 않으면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는다. 그리움은, 다시 말하지만 소환이다. 사랑으로 영혼을 부르는 강령술이다.     


그러나 어떤 죽음에 대한 애도는 평생이 걸려도 완료되지 못할 수도 있다. 완료되지 못한 애도는 그리움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그것은 기다림을 남긴다. 납득이 안 되는 죽음, 사라짐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죽음이 있다. 귀소가 예정된 떠남이 귀소로 완료되지 않고 떠나던 길, 떠난 장소에서 떠났던 이가 죽었을 때 우린 그 사람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다.      


일터와 군대와 낯선 여행지로 갔던 사람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돌아와야 일도, 군 복무도, 여행도 완료되는 것이다. 보낸 사람이 돌아와야 할 장소와 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이렇게 당연히 돌아올 줄 알고 기다리던 이들은 영원한 기다림에 빠져버린다. 문을 열고 내 이름을 부르며 들어설 것 같다. 결국 살아남은 사람은 그의 공간을 비워둔 채 평생을 기다린다.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납득되지 않는 죽음은 흉터처럼 남아 있는 자들에게 공백을 남긴다. 공백 같은 큰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 많은 사회를 정상이라 부를 수 있을까? 돌아와야 될 사람은 돌아와야 된다.      


시인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사라짐은 자살인지도 모른다. 돌아갈 곳이 없다고, 날 찾는 이가 없거나,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궁극의 사라짐, 절대적 포기는, 결국 자살이다. 시인은 그걸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단어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라짐”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단어를 통해 “살아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고 살다 보면 결국엔 살아지고, 그렇게 살다 보면 결국엔 저 깊은 산속에서 빛나는 희미한 불빛과 같은 희망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라지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돌아갈 집과 아내도 있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 누가 봐도 힘들 게 없는 사람이었다. 난 힘들었다. 무엇이 얼마만큼 힘든지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선택한 길을 가다 만난 밤은 유독 길고 어두웠다. 그 밤을 지나야 아침이 올 텐데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기다리는 이와 애도할 이가 없으리라 짐작하는 사람은 사라짐과 죽음, 그 뒤의 일을 더 가볍게 생각한다. 내가 죽어도, 내가 사라져도 이 세상은 여전히 온전하게 돌아갈 것 같다. 내 장례식엔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다. 내 부재를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서글프다. 대신 가벼워진다. 훌훌 사라질 수도,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했다. 


남아 있는 몇 사람을 생각했다. 아내는 나보다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다. 나 없이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감독을 생각했다. 내가 없으면 일의 진행이 좀 더디겠지만 어떻게든 꾸려나갈 것 같았다. 다만 나와 연락이 안 되면 답답할 것 같아서 조만간 아내의 명함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나에 부재를 확인해 줄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으니까. 미국에 있는 식구들까진 생각하지 않았다. 거긴 거기의 삶이 있다. 아직 딸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고통은 주관적이어서 타자에게 설명할 수 없다. 내게 가벼운 것이 그에겐 무거운 것일 수 있고 내게 무거운 것이 그에겐 가벼울 수 있다.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그에게 하찮은 것일 수 있고 그에게 소중한 것이 내겐 한 없이 하찮은 것일 수 있다.      


이 접점 없는 다름 사이엔 다리가 없다. 섬과 섬 사이가 다리로 이어지면 섬은 섬이 아니다. 섬은 정의상 바다로 둘러 쌓여 있는 육지이기 때문이다. 사람 또한 섬이다. 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수많은 접점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어느 점도 타자에게 이어지는 완벽한 선이 될 수 없다.      


멀리서 보면 얼핏 실선 같이 이어진 것 같지만 점과 점 사이엔 공백이 있다. 완벽한 이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이해의 결여가 발생한다. 해답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들어주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답하려 한다. 서로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섬과 섬이라도 좀처럼 서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 답은 내 맘에 와닿지 않는다.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이뿐이다. 사라지지 마라. 끝까지 살아남아라. 나도 잘 모른다. 사라지지 않고, 죽지 않고 버티고 살면 좋은 날이 오는지, 나도 모른다. 시인은 희망을 말한다. 깊은 산길 끝에 버티고 서 있는 흐릿한 불빛 같은 희망을 말한다. 난 희망을 말하고 싶진 않다. 내일 뭐가 있는지 난 모른다. 양희은의 <봉우리>라는 노래처럼 봉우리에 오른 뒤에 보니 수많은 봉우리가 펼쳐지는 것처럼 절망의 고비 뒤에도 또 다른 절망이 이어질 수도 있다. 설령 절망이 오지 않더라도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날들이 반복되어 펼쳐질 수도 있다.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삶이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면,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당신이 원했던 그 필연이 이뤄지는 순간, 그 뒤에도 우연의 삶은 계속된다. 삶은 생성의 반복이다. 오늘 삶을 포기하면 내일 태어날 당신의 삶을 볼 수 없다. 물론 그 삶이 어제와 같은 삶일 수 있다. 하지만 아니라면? 그렇다. 우린 모른다. 버티며 사는 것이다. 느닷없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눈부신 내가 미래로부터 오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판본을 봤다. 초판 1쇄는 2010년 10월 16일에 나왔다. 나는 같은 해 11월 3일에 나온 초판 2쇄를 샀다. 날짜를 보니 왜 이 시집을 샀는지 납득이 갔다. 이 시집엔 삼백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인이 12년 만에 낸 시집이니 그럴만하다. 이 시는 시집의 맨 끝에 실려 있다. 시가 길어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 줄 앞과 끝의 몇 연만 실었다. 꼭 전문을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물론 이 시집을 사서 그 시 앞에 있는 시들 또한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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