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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Dec 07. 2023

사랑을 등져야만 했던 가난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4

신경림 -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법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봄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픈 시가 있다. 이 시는 그런 시다.      


부자나 빈자나 노인이나 애들이나 누구에게나 외로움이 공평하게 찾아오듯 사랑 또한 공평하게 찾아오면 좋으련만, 자본주의 사회에선 전자는 공평하나 후자는 불공평하다. 모 결혼 비용 서바이벌 프로그램 제목처럼 2억 9천만 원이 있어야 결혼을 꿈꿀 수 있는 시대엔 사랑 또한 무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선 마음 하나면 충분하던 시절이 있었다. 튼튼한 두 다리와 남아도는 시간만 있어도 사랑할 수 있었다. 그 시절엔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헤어져야만 했던 연인들이 있었다.


일주일에 며칠, 하루에도 몇 시간, 캠퍼스와 강의실에서 스치던 사람이 사랑이 된다. 늘 보던 사람인데 어느 날부터인가 볼 때마다 가슴이 뛰니 환장할 노릇이다. 같은 과이거나 같은 동아리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마주 볼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수백 명이 듣는 채플 - 의외로 많은 대학에서 “예배”가 교양필수다. 필자의 대학에서도 그랬다. - 이나 교양수업 같은 곳에서 스치던 이라면 그 과를 다니거나 그 과에 인연이 있는 이에게 그 사람과의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SNS는 고사하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의 사랑은 마음을 전달하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느닷없이 사랑에 빠진 사람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성씨와 이름, 학과, 성별 정도만 파악하고 시작하는 것 아니겠나? 알음알음으로 사람의 속내를 알 수는 없다. 교통사고처럼 사랑 또한 빠진 후에 그 원인과 전후좌우를 알아갈 뿐이다. 알면 알수록 난 좋다. 사람 하난 제대로 봤다. 나와 생각이 닮은 사람이 있다.   


한두 달 사귀었다고, 심지어 일이 년 사귀었다고 해서 부모한테 소개하진 않는다. 예전엔 그랬다. 졸업할 때 즈음 슬슬 서로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사람도 흔했다. 설령 대학 졸업 후, 일이 년 후에 결혼한다 하더라도 인사는 시켜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들이 있었다. 그렇게 큰맘 먹고 인사를 드리려 한다.


지금과는 달리 개천에서도 용이 나던 시절이다 보니 학생 간의 집안 환경은 천차만별이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까지만 해도 그랬다. 호구 조사 없이 그저 사람이 좋아 사랑에 빠졌고, 이 사람과 평생 하고 싶어 부모님께 소개를 드리려 한다. 그제 서야 이것저것 물어본다.    


부모 마음은 내 마음 같지 않다. 부모들은 생각이 달랐다. 산업화 시대를 힘겹게 건너왔고 소위 보릿고개로 통칭되어 설명되던 가난과 굶주림이 당연시되던 시대를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못 배운 부모는 그것이 한이 되어 자식을 대학에 보냈다.   


사랑하는 마음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다르다. 연애하는 동안 겪었던 모든 일들 속에서 그는 나와 한 사람이었다. 나와 쌍둥이였다. 어쩜 이렇게 잘 맞는지 불가사의했다. 그러나 많이 다르다. 모든 게 다르다. 세상은 나와 그가 다르다고 한다. 부모가 나서서 반대를 한다. 그/그녀의 정보를 알게 된 친구, 친지, 가족, 교회와 절의 식구들이 모두 나서 반대한다. 과거의 것이 오늘의 사랑을 가로막고 서서 미래로 향하는 발목을 잡는다.     


드라마 <모래시계>에서도 봤듯이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검사가 되거나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면 소위 마담뚜라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선 자리의 스케줄이 빡빡해진다. 열쇠를 몇 개 준비할 수 있는 사람만 이들과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시대였기에 더 사랑만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나라와 세상은 자본주의 극단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그 소란스러움과 떨어져서 조용히 사랑하나에 의지해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들은 이야기다. 내가 청춘일 때보다 시인이 청춘일 때 흔한 이야기였으나 내가 청춘일 때도 종종 있었던 이야기다. 서예 동아리에 있던 사람이 선배 이야기를 해줬다. 서울 소재 대학의 지방 캠퍼스 국문과를 다니며 서예 동아리에서 회장까지 했던 사람이 결혼을 했다. 신부 또한 같은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이다. 당연히 양쪽 집안에서 말렸다.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결혼을 추진했고 조촐하게 결혼한 후 캠퍼스가 있던 동네에서 조그만 서예 학원을 차려 거기에 신혼집을 꾸몄다. 가구는 고사하고 이렇다 할 혼수도 마련하지 않은 살림, 두 사람은 사과 궤짝으로 꼭 필요한 가구를 대신했다. 책꽂이와 밥상 같은. 지금은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당시엔 현실이었던 이야기다.     


생각해 보면 80년대만 해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어울려 살았다.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배우지 못했어도 사랑을 할 수 있었고 결혼을 할 수 있었으며 가정을 꾸리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다. 내 막내 이모는 거의 일자무식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제법 유명한 대학에서 경영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과 결혼했다. 결혼하기 전 동거를 하며 그 사람을 뒷바라지하고 취업을 시키고 결혼한 뒤에는 그 사람이 출근할 때마다 정성스럽게 드라이를 해줬다.      


이모와 이모부는 의정부의 달동네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결혼한 뒤에는 외대 근처, 휘경동에 있는 허름한 단독 주택을 사서 이사를 했고 이후엔 일산의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했다. 휘경동에 살던 시절, 이모네 집에 놀러 가면 종종 매캐한 최루탄 냄새를 맡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렇게 이사를 다니는 동안 아들 둘을 낳아 키웠고 이모부는 평사원에서 착실히 승진해서,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그 기업의 임원이 되어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조금씩 함께 삶과 살림을 키워나가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였으나 이 나이, 이 시대, 이 나라를 살다 보니 그 기억 속 풍경이 새삼 찬란해 보인다.


나이가 들수록 후회는 늘지만 후회할 일은 줄어든다. 별일 아니다 하며 돌아섰던 일도, 잘했다 싶었던 일도 세월의 렌즈로 다시 보면 흉하고 못났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참았어야 했다.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 그 일의 결과와 선택이 바르고 옳았으며 좋았다고 해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있다. 그런 일은 줄어들지 않는다. 결국 세월이 지날수록 후회는 는다. 그 결과 나이가 들수록 조심스러워진다. 사람을 대할 때나 일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말과 글을 뱉기 전 목구멍 속에서 단어들을 골라낸다.  

    

말과 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최근 라면을 먹는 횟수가 줄었다. 식구 중에서 라면을 좋아하는 건 딸과 나, 그러나 딸에겐 건강에 안 좋다며 자주 주지 않으니 결국 압도적으로 라면을 먹는 건 나뿐이다. 아내가 집에 쟁여 놓는 라면의 8할은 내 몫이다. 쟁여 놓는다 해도 순한 라면과 매운 라면 한 종류씩, 다섯 개 들이 두 묶음 정도 있을 뿐이다. 이 라면이 줄어드는 속도가 느려졌다. 얼마 전 불쑥 깨달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일주일이나 열흘이면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한 달도 간다.      


젊었을 땐 라면이 부대끼지 않았다. 매운 라면에 매운맛 고추를 썰어 넣어 먹었다. 그 매운 국물에 밥까지 말아먹었다. 그 밥을 먹으며 매운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개운했다. 지금은 라면을 먹으면 몸이 무거워진다. 맵게 먹으면 속이 쓰리다. 연두부나 낫또처럼 가볍고 담백한 음식이 좋아져서인지도 모르겠다. 먹고 나면 후회를 남기는 라면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인생은 실수와 실패, 그리고 후회를 줄이는 사람이 승자다. 모든 스포츠처럼 말이다. 그러나 스포츠와는 달리 인생은 지금 오늘의 선택이 실수인지, 실패로 연결되는지, 평생에 후회를 남을지 알 수가 없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후회는 늘어나고 후회할 일은 줄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난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걸 알아서, 가라고 말했으나 끝내 가지 않던 사람과 부둥켜안고 삶을 헤쳐 가던 시절이 있었다. 이 시가 나온 80년대만 해도 그런 연인들이 있었다. 그런 시절에도 끝내 사랑을 버려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가난했던 것일까?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가난을 이유로 사랑을 보낸 사람이나 그 이유가 납득이 되어 떠난 사람이나 후회가 남을 것이다. 맘에 맞는 사람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큰 복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요즘, 그런 동반자를 얻기 위해서라면 젊은 시절의 가난은 기꺼이 감수할만한 고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고통을 감수한 후 안온한 일상을 맞이할 수 있는 시대는 이제 끝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일까, 이 시는 지금 더 어울리는 시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가?


내겐 신경림 시인의 시집이 없다. 시 선집이 몇 권 있는데 거기에도 실리지 않았다. 대신 <시인을 찾아서> 1권과 2권이 있다. 1권의 판본을 보니 1998년 10월 20일에 1판 1쇄가 나왔다. 난 2003년 1월 15일에 나온 1판의 13쇄 본을 샀다. 2권은 2002년 9월 18일에 1판 1쇄를 했는데, 난 2003년 3월 5일에 1판 4쇄 한 것을 샀다. 2003년 봄에 두 권을 함께 샀거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사지 않았을까 싶다. 출간 시기를 기점으로 1권은 작고한 시인들을, 2권은 생존 시인의 시와 생애를 다뤘다. 이 책을 읽은 후에 신경림 시인의 시를 찾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2003년 봄이라면 부산에서 힘든 시기를 보낼 때였다. 이럴 때에도 시와 시인에 대해 읽을 한 줌의 여유가 있었나 보다. 그 덕에 지금까지 버티고 살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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