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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Nov 23. 2023

사람은 때론, 시로 기억된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2

수선화 - 김동명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르는

애달픈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다시 죽는

가여운 넋은 아닐까.     


부칠 곳 없는 정열을

가슴 깊이 감추이고

찬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그대는 신의 창작집(創作集)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의 소곡(小曲)     


또한 나의 작은 애인이니

아아, 내 사랑 수선화야!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


나의 의미는 타자에게 있다. 그것은 나에 관한 것일 뿐 내 것은 아니다. 나와 상의 없이 타자가 만들어낸 것이기에 난 그 탄생 또한 막을 길이 없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 없다. 타자의 마음속에서 그 의미가 점점 커져가는 것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타자도 모른다. 왜 커져만 가는지, 이유를 모르기에 설명할 수도 없다.       


의미의 사라짐 또한 어찌할 수 없다. 피어날 때처럼 사라짐에도 예고는 없다. 그렇기에 타자는 당황한다. 어느 날 문득 죽어가는 의미를 발견하고 놀란다. 이럴 리 없다고, 이렇게 소중한 사람의 의미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을 수 없다고, 난 그렇게 경박한 사람이 아니라고, 누군가를 쉽게 마음에 품고 쉽게 내보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뇌까려보지만 그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마치 동정녀처럼 어느 날 문득 한 사람의 의미를 잉태한 이후 키워온 것처럼, 거짓말처럼 그 의미가 사라진다. 사랑이 논리의 국경 밖에 있는 이유다.     


타자에서 내 의미가 사라지면 난 죽는다. 우리는 타자로 인해 의미가 발생한다. 사랑이 아니어도 그렇다. 자존감이든, 자신감이든 정체성이든 마찬가지다. 스스로 만들어 혼자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누군가 나를 알아채지 않으면 난 없는 존재다. 사람의 외로움과 고독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사랑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듯하다. 내 이름을 불러주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내 신체의 모든 부위와 내 목소리, 담아낼 수 없는 눈빛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사랑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사랑이 사라져도 삶은 남아 있다. 울면서 밥을 넘겨야만 한다.     


나의 의미는 사라졌는데 사랑의 죽음, 죽어버린 사랑의 시체는 남아 있다. 나의 의미를 죽인 타자는 사랑의 장례식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난 여전히 그 무덤가를 서성이며 타자가 남긴 애도의 꽃향기를 맡는다. 유령인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영혼은 사랑의 잔해를 수습하며 떠돈다.


나를 불러주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린다. 날 뭐라고 불렀더라? 이 글을 쓰면서 나를 사랑했던 연인이 날 뭐라 불렀었는지 생각했다. 나에겐 애칭이나 별칭이 없었다. 오빠나 자기 정도? 다들 그렇게 무난하고 무던한 사람들이었다. 사랑의 기억은 뜨거운데 사람의 기억은 담백하다. 담백한 사람들이 씁쓸한 사람을 만나 한껏 사랑을 줬다. 철이 없던 남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의미를 물었다. 왜 나여야 하는지. 당연히 답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마르고 쓸쓸한 남자의 움푹 들어간 뺨을 만지며.      


사람은 가질 수 없다. 가질 수 없어서 상징을 갖고 준다. 날 너에게 주고 싶다. 스물네 시간 너의 소유물이고 싶다. 그 바람을 담아 뭔가를 준다. 그 주고받음의 역사는 사랑만큼 오래됐다. 가락지, 거울, 목걸이, 손수건, 시와 그림, 심지어 머리칼과 손톱. 내 또래들은 학창 시절 종이학이나 별을 접어 줬다. 의미는 쓸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는 행위 그 자체, 그것을 만든 시간에서 나오기에 모두들 망설임 없이 줬고 당연하다는 듯 받았다. 요즘엔 생일에 이런 걸 주면 차일런지도.     


이런 사물들은 나를 대신한다. 사랑이 죽고 나의 의미가 죽은 뒤에도 이 사물들은 남는다. 남길지 버릴지 아예 태울지... 이 또한 타자의 몫이다. 요즘엔 비싼 선물은 돌려달라고들 한다던데 우리 땐 돌려받을만한 비싼 선물을 할 수 없어서였는지 돌려받을 생각을 못했다. 나에 대한 기억의 처리만큼 그 사물의 처리 또한 타자의 몫이었다.      


나에 대한 기억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날 이렇게 기억해 달라고 강요할 순 없다.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으로 인식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만큼, 어제의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막연하다.


대학에서 서예부 - 예전엔 이런 동아리가 실제로 학교에 있었다. - 였던 그녀는 내게 글씨를 선물하곤 했다. 그야말로 글씨 그 자체를. 그것은 해석 이전에 존재 자체가 의미였다. 거기에 담긴 글은 글씨에 이어 말을 했다. 글은 글씨 없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시는 4절지만 한 액자에 담겨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액자를 받기 전까지 이 시에 대해 전혀 몰랐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이 시인의 다른 시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당연히 시집도 없다. 이 시에 곡을 붙인 가곡도 있다던데 난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자신이 만들고 오랫동안 키우고 품어온 나의 이미지와 의미를 이 시 한 편으로 말했다. 난 첫째 연과 셋째 연을 좋아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녀가 나를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르는 애달픈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부칠 곳 없는 정열을 가슴 깊이 감추이고 찬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후반부는 그녀의 것이다. 그녀는 “신의 창작집(創作集)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의 소곡(小曲)”이었다. “나의 작은 애인”이었다. 함께 눈길을 걷고 싶은 사람이었다.      


시 한 편에서 두 사람을 봤다. 하나의 사랑에 두 사람이 있듯이. 다시 읽어도 시는 두 사람의 이미지와 하나의 사랑의 기억을 담고 있는데 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름뿐이다. 이 시와. 한 사람이 시로 기억된다. 나 또한 시로 기억될까? 아니면 다른 것? 무엇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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