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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Dec 21. 2023

잔치는 언젠간 다시 열리지 않는다.

그날의 시로 너를 위로한다 6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이 시를 처음 읽은 건 대학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고백하건대 최근 다시 맨 앞장을 펼쳐보기 전, 난 이 시집을 내가 샀다고 생각했다. 펼쳐보니 1994년 8월 21일에 선물 받았다. 그 안, 흰 종이에 글이 쓰여 있다.      


“잔치가 끝나기 전에

모든 걸(?) 해치워야지.

기왕이면 기록에 남는

도박사가 되자구.     

생일을 축하해.      

94, 8, 21 지혜로부터”     


저 잔치판으로의 초대를, 저 위험한 도박판의 초대를 알아채고 먼저 선수를 쳤더라면 사랑은 반년 이상 일찍 시작됐을 것이다. 그렇다고 뭐, 크게 달라질 게 있었겠냐마는. 사랑의 수명이 길면 뭐가 더 남을까? 추억도, 상처도, 흔적도 더 많이 남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무게로 인해 조금 더디게 그 사람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파라락, 시집을 넘겼다. 그녀의 글씨가 있다. 그녀는 여백이 있는 페이지 곳곳에 생각을 남겼다. 글들은 95년 6월 14일에 썼다. 95년, 막 사랑에 빠졌던 봄날, 그녀의 속내를 오갔던 수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담겨 있다. 그녀가 이 글을 쓰는 동안 난 집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솔직히... 이 시집을 다시 펴보기 전까지 이 글들이 있는지 새까맣게 까먹고 있었다.  


난 선운사에 가 본 적이 없다. 선운사에 대해 안 지도 얼마 안 됐다. 저 시를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모르는 곳도 검색만 하면 알 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낯선 도시로 여행을 가면 지도책을 잘 보는 사람이 조수석에 앉던 시절이었다. 선운사의 동백꽃을 알기 전까지, 난 시 속의 꽃을 벚꽃으로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본 꽃이 벚꽃이어서 그런가? 물론 그전에도 이런저런 꽃을 봤다. 그러나 벚꽃을, 그것도 무리 지어 있는 벚꽃을 본 건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오래된 학교의 정문은 고등학교를 사이에 두고 왕복 2차로의 좁은 길을 향해 나 있었다. 그 정문 옆에 나지막한 기숙사 건물이 두 개, 조금 올라가서 이층으로 지어진 신학생 기숙사동이 하나, 조금 더 올라가서 다시 나지막한 기숙사 동이 하나 있었다. 기숙사는 울창한 가로수에 가려져서 등굣길의 학우들에겐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다면 기숙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정문에서 시작한 오르막길은 대충 15도 각도를 유지하며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꺾였다. 그 꺾인 길은 좀 더 가파르게 올라가다 본관 광장에서 평탄해진다. 그 광장을 마주 보고 오른쪽엔 신학관, 정면엔 본관과 도서관, 왼쪽엔 채플이 있었다. 이 광장까지 오르는 길 양 옆으로 벚나무가 촘촘히 있었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꽃이 폈다. 4월쯤이었을까? 기억이 맞는다면 5월 초 축제가 열릴 때까지도 벚꽃이 남아 있었다. 우린 그 벚꽃을 벗 삼아 축제 때마다 많은 술을 마셨다. 대학 생활 내내, 벚꽃이 질 때마다 이 시를 생각했다.


화려하게 펴서 사람의 마음을 흔들던 꽃이 바람에 날려 지고, 지면서 날린다. 중 3 때, 교실 바로 앞에 목련 나무가 있었다. 그 꽃이 지는 걸 보고 참 허망하게 진다는 생각을 했다. 목련은 끝이 너무 안 좋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벚꽃은 그 끝조차 여운이 길다는 생각을 했다. 산산이 부서져서 누가 누구인지 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흩날리며 지는구나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이 시를 떠올렸다.


부산에서 통영까지, 바다와 맞닿아 있는 동네마다 동백꽃이 흔하다. 심지어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앞 공원엔 백 미터 정도 줄을 지어 서 있을 정도다. 이 지역에선 새로 공원을 조성할 때마다 동백나무를 빼놓지 않고 심기 때문이다. 거제도에 가족이 가끔 가는 풀 빌라가 있는데 그곳 산책로는 그야말로 동백나무 밭이다. 오직 동백나무만으로 숲길을 만들었다. 내 키를 훌쩍 넘기는 동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그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거제도의 와현 해수욕장이 일품이다.  


빽빽한 동백나무 숲은 새를 숨긴다. 동박새가 동백꽃에 코를 박고 먹다가 동백나무 잎 뒤로 몸을 숨기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라면 직박구리 같은 제법 큰 덩치의 새도 은폐해 준다. 분명히 코 앞에서 동박새와 직박구리 소리가 나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이제 동백꽃 이야기를 해보자. 동백꽃은 오랫동안 펴 있다. 일찍 피는 것은 겨울이 오기도 전에 펴서 벚꽃과 맞교대할 때까지 버틴다. 그래서 지는 것이 잠깐이라는 말이 얼핏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꽃 전체가 아니라 한 송이 꽃을 보면 납득이 간다. 동백꽃은 뚝 떨어진다. 꽃들은 대개 툭툭 떨어진다. 봄에 피는 목련도, 여름에 피는 능소화도, 가을에 피는 국화도, 겨울에 피는 동백꽃도. 버틸 때까지 버티다 떨어진다. 이 시에서 말하는 꽃은 그래서 모든 꽃이다. 그 꽃이 사랑을 말한다면 모든 사랑 또한 그렇게 툭 떨어진다.      


사랑이 툭 떨어진 후 시인은 선운사에 갔다. 선운사에서 갔더니 그 사람이 생각났다. 애써 피운 사랑이 손 쓸 새도 없이 저버렸다. 황망하다. 초점을 잃은 눈은 사랑이 사라진 공간과 미래에 시선을 던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볼 수가 없고, 볼 수도, 볼 것도 없으니 초점이 없는 것이다. 초점이 없는 눈은 어떤 것에도 시선을 던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모든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며 봐야 할 것, 보고 싶은 것을 찾는 눈이자 시선이다. 사랑을 찾는다.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찾는다. 없다. 찾을 수 없다. 아니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없다. 초점 잃은, 넋을 잃은 눈빛이 이어진다.      


사랑이 진다고 다시 사랑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꽃이 져도 우리가 슬퍼하지 않는 건 애타게 기다리던 그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다시 꽃이 피기 때문이다. 모든 꽃은 자기의 계절을 기다린다. 아무 때나 피는 꽃은 없다. 잡초도, 들꽃도 자기의 계절이 있다. 세상의 모든 꽃은 그만의 때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 동백꽃이나 삼색병꽃처럼 오래 피는 꽃이라도 그 “절정”의 때가 있다. 


피는 계절, 절정의 순간이 올 때까지 꽃은 기다린다. 묵묵히 만반의 준비를 하며 안으로 웅크리고 응축한다. 꽃이 피는 것은 이 웅크림과 응축의 폭발이다. 지천에 널린 동백나무는 차나무와 비슷하다. 윤기 나는 이파리를 잔뜩 달고 있는  어정쩡한 크기의 나무에 불과하다. 동백나무의 녹음 진 시간은 꽃을 기다리는 응축의 시간이다.


다시 돌아온 계절에 핀 꽃은 그전에 핀 그 꽃과 다르다. 닮았을 뿐이다. 매번 사랑이 끝날 때마다 아쉬워하는 건, 꽃이 질 때마다 서글퍼지는 건 모든 사랑도, 모든 꽃도 피는 순간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어떤 사랑과도, 어떤 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그녀는 몇 개의 시에 밑줄을 그었다. <속초에서>라는 시에는 제목에 밑줄을 긋고 맨 마지막 줄에 홑낫표를 남겼다. 「네가 내게 기울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로 기울어가리」     


<먼저, 그것이>라는 시에는 제목에만 밑줄을 그었다. 표시한 행도, 연도 없지만, 마지막 네 줄이 눈에 들어온다.  

   

망설이는 마음 한복판으로

어제의 사랑을 키우며

더듬거리며 오늘, 사랑이 내게로 온다

주저하는 나보다 먼저, 그것이 내게로 온다    

 

그녀의 메모가 남아 있는 마지막 시는 <내 속의 가을>이다. 이 시의 마지막 세 줄이다.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가 ― 을     


그 밑에, 오늘을 예견한 듯 한 메모가 있다.      


“오빠가 언제 다시 이 시집을 펼칠지는 모르는 일이고,

기분 나쁘지 않길 바래.

주인 허락 없이 책에 낙서 함을.     

글쎄,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이지만,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보고 싶다는 것은 분명해.

6,14”     


다른 메모들을 읽어보니 그즈음의 일들이 생각난다. 그녀의 마음이 왜 어지러웠는지, 왜 힘들었는지,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 사랑 밖의 일, 특히 이 사랑을 뜯어말리던 자기 가족 때문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사랑이 사랑만으로 그 수명을 다하면 좋으련만, 철 모르는 폭우와 바람에 때 이르게 꽃이 떨어지듯, 그렇게 아직 질 때가 오지 않은 사랑이 사랑 밖의 것에 흔들리다 지쳐 쓰러질 때가 있다.


사찰은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곳이다. 붉은 동백꽃이 있어야 될 자리도, 그 꽃을 앞세워 기세등등하게 등장하는 계절이 머무르기에도 좋은 자리가 아니다. 그런 자리, 이 오래된 절에 꽃이 있는 건 그 꽃의 피고 짐을 통해 인생의 허망함을 깨우치기 위해서다. 꽃도, 꽃을 몰고 온 계절도, 그 꽃과 계절을 만끽하는 사람 또한 언젠간 지나가는 존재라는 걸 깨닫기 위해서다.      


사랑도, 청춘도 꽃이고 계절이다. 피었다 지고, 머물다 간다. 잡을 수도 말릴 수도 없다. 애써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인생은 애쓴 만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걸 아는 나이가 되면 사랑에도, 계절에도 초연해진다. 나 자신에게도 조금은 너그러워진다.      


꽃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에 놀라 꽃에 등을 돌리고 그 사람을 생각 속에서 애써 떨쳐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앞서 보지 않았나? 시집 안에 메모가 있는 것도, 그 시집을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새까맣게 잊지 않았던가? 그러니, 요즘은 꽃이 웃자고 할 때 웃고 놀자고 할 때 논다. 꽃이 불러오는 추억 속 사람과도 반갑게 해후한다. 그런 나이가 되었기에 이 시와 시집과 메모를 다시 담담히 읽었다.      


꽃이 지는 것은 언제나 아쉽지만 기꺼이 보내고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어느 해, 어느 계절인가에는 이 꽃을 보는 것이 마지막이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 것이다. 어느 계절에 무슨 꽃을 마지막으로 볼까?   

 

저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땐 서른 이후엔 잔치 같고 꽃 같은 사랑이 더 이상 오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왔다. 꽃처럼 잔치처럼,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정성을 들여야 겨우 피어나는 사랑이었지만 드문드문 그런 사랑이 왔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잔치 같은 사랑이 버거운 때가 온다. 꽃을 피울 힘이 없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 그렇다. 서른 이후에도 잔치는 열린다. 그러나 언젠간 다시 열리지 않는다.


판본을 보니 1994년 3월 30일에 초판이 나왔다. 그녀는 1994년 6월 25일에 나온 초판 10쇄를 선물했다. 불과 몇 달 만에 10쇄를 찍었으니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팔린 시집이다. 참고로 발문은 김용택 시인이 썼다. 제목이 재미있다. “응큼떨지 않는 서울내기 시인”.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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