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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Dec 28. 2023

늑대와 마주쳐도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한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07

자기 연민 -  D. H. 로렌스  

   

나는 결코 야생의 존재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걸 본 적이 없다.

얼어 죽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작은 새조차도

자신을 불쌍히 여기진 않으리라.   


Self-Pity - D. H. Lawrence

 

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A small bird will drop frozen dead from a bough without ever having felt sorry for itself.     

   

-영화 지아인 제인(1997) 중에서


한 번 더 싸움 속으로...

내가 아는 마지막 멋진 싸움으로.

이날에 살고 죽으리...

이날에 살고 죽으리...    


Once more into the fray...

Into the last good fight I'll ever know.

Live and die on this day...

Live and die on this day...     

 

- 영화 더 그레이(2011) 중에서


<지아이 제인(1997)>에 나온 시는 보다시피 그 유명한 D. H. Lawrence의 시고 <더 그레이(2011)>에 나온 시는 존재하지 않는 시다. 일설에 의하면 감독이 썼다고 한다.  영화 두 편, 시 두 편, 이 중 오리지널은 하나뿐이다. 그러나 모두, 삶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생존, 선택

인생은 던져진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피투(彼投) 된 삶이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낯선 도시에 떨어지는 전사와 사이보그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떨어진다. 부모도, 사는 곳도 선택할 수 없다. 인간의 부조리는 여기서 출발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양육된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오래 양육되는 존재다. 사회에 나가 제 구실을 할 때까지 최소한 이십 년 넘게 걸린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지점은 양육에만 있지 않다. 부모의 곁을 떠나 사회에 나왔을 때 사회와 국가라는 시스템은 구성원이자 국민인 한 인간을 보호한다. 자신의 존재를 법으로부터 인정받은 존재는 그렇게 보호되어야만 한다. 푸코가 말했듯이 국민은 국가의 일종의 자산이며 권력의 토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자본주의 사회와 국가는 자본의 논리 앞에 무력해지곤 한다. 이제 경우 세상에 나온 존재는 제 한 몸을 움직여 생존의 조건을 갖춰나가야만 한다. 요즘 친구들 표현을 빌리면 독립을 하는 순간부터 숨만 쉬고 있어도 돈이 나간다.    

  

영화 <더 그레이>와 영화에 나온 시는 이 냉혹함의 은유다. 우리는 주인공의 회상을 통해 그가 알래스카라는 냉혹한 땅을 스스로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땅에 오기 전 안온한 일상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에게도 부모와 고향이 있었으며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이 있었다. 보호받는 존재에서 보호자로 나아갔던 삶은 어느 순간 야생의 세계로 나아갔던 것이다.     


최후의 야생과 마주하기 전, 그는 야생과 문명의 경계에서 문명을 지켜내던 사람이었다. 총 한 자루로. 그라는 존재 자체가 그 시스템의 최후의 보루였다. 비행기가 추락한 뒤 그는 경계와 시스템 밖에서 살아남은 이들과 함께 야생에 맞선다. 총도 없다. 시스템도 없다. 그저 냉혹한 아생만이 있을 뿐이다. 검은 늑대 무리와.    


야생에 떨어진 비행기처럼 피투 된 존재에겐 기투(企投)의 선택이 남아 있다. 이 선택의 순간 우린 무한한 가능성에 직면한다. 더불어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갈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도 느낀다. 추위와 늑대 무리를 피해 비행기의 잔해를 거처 삼아 구조를 기다릴 수 있다. 이 또한 선택이다.


구조의 기다림이 막연하다면 우린 또 선택해야 한다.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문명의 세계로 나아가 스스로를 구조하기 위해 애쓸 것인가.  영화 속 인물들은 후자를 택했다. 관객은 전자의 가능성에 대해 알 수 없다. 당연히 그 인물들 또한 알 수 없다. 선택하지 않은 삶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고 선택한 여정 또한 불투명하다. 그들은 모두 죽었다.   

   

홀로 살아남은 주인공은 늑대 무리와의 마지막 결투를 준비하며 이 시를 읊조린다. 우리 또한 주인공처럼 언젠간 아무런 도움 없이 인생의 진실과 마주할 때가 있다. 삶의 냉혹함 앞에서 무기력을 느낄 때가 있다.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하고 묵묵히 걸어온 끝에 실패와 절망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도 아직 최후의 무기가 있다. 그 길을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우리의 마지막 무기다.  


여기서 우리는 상품사회, 부르주아 사회의 중요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앞 장에서 말한 것처럼 이제 공동체는 없습니다. 생존은 철저히 개인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아무도 곁을 돌보지 않습니다. 누군가 굶어 죽는다면 그 자신의 책임입니다.... 생존은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데 운명은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각자 도생하라, 그러나 운명은 함께 맞는다! 이런 겁니다. 고병권, 북클럽 자본 3권, 화폐라는 짐승, PP.120-121


투쟁

살아남은 자의 투쟁은 끝이 없다. 얼핏 보면 <지아이 제인>은 성공의 서사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렇다. 그런가? 아니다. 성공한 사람이 다른 형태, 다른 차원의 성공으로 이동하기 위한 겪는 하나의 도전, 그 관문을 통과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른 맥락이 보인다. 그 훈련소에 온 군인들은 각자의 소속이 있다. 각자의 부대에서 에이스들이다. 결국 통과하지 못해도, 그 영화에서처럼 훈련을 견디다 못해 연병장의 종을 치고 퇴소를 해도 다른 방식의 성공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 이 훈련에 목숨을 거는 것인가? 선택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잃지 않는 도전에서도 잃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선택을 가능케 한 자유 의지, 그 의지로 획득할 수 있는 명예다. 나다움이다. 나에 대한 의심의 극복이다.


그러나 로렌스의 시는 이러한 명예나 도전의 성공을 말하지 않는다. 자기 연민의 불가능함, 야생의 존재에겐 없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성공한 사람에게, 시험에 통과한 사람에게 왜 이 시인가. 투쟁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지속되는 한 투쟁은 지속된다. <더 그레이>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 여정을 따라붙는 고난, 나에 힘듦과 하소연과 휴식의 시간을 아랑곳하지 않는 야생의 존재. 삶은 애초에 그런 것이다. <지아이 제인>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훈련소에서 훈련을 통과한 이들이 결국엔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네이비씰이 하는 것이 무엇이냔 말이다. 고난도의 투쟁이다.


미래

이 글을 업로드할 때쯤이면 감독의 딸은 대학을 선택했을 것이다. 11월, 감독의 딸은 악기로 대학 입시를 치렀다. 지역의 여러 대학에 합격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 한 곳도 예비 합격자 명단 상위에 있을 때, 감독은 어느 대학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업계(?)에서 제법 유명한 딸의 레슨 선생님이 예비합격자 명단에 오른 서울의 모 대학은 이래저래 경쟁도 치열하고 생활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라며, 설령 합격 하더라도 올라가지 않는 것이 낫겠다며 말렸기 때문이다.      


학생으로, 대학 강사로 서울에서부터 대전, 부산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학을 경험했었던 난 최대한 솔직하게 의견을 말해줬다. 딸이 음악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음악에 열정을 쏟아부으며, 내 앞에 놓인 젊음의 시간을 음악에 한번 받쳐보겠다는 결심이 섰다면, 그래서 지금도, 그러니까 입시가 끝나서 더 이상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도 몇 시간씩 악기를 연습한다면 서울에 보내서 차원이 다른 도전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      


물론 그 도전은 성공의 확률보다 실패로 끝날 확률이 훨씬 높은 도전이다. 고향에 내려와 음악 학원을 차려 생계를 이어갈 수도 있으며, 심지어 음악과는 상관없는 직업을 갖거나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해서 그야말로 음악을 취미로만 하는 음악전공자의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도전을 선택한 자식에게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도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가려하는 자식에게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지지와 응원과 지원 밖에 없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음악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래서 음악에 대한 열정도 없으며 입시가 끝나자마자 악기는 뒤로하고 놀러 다니고 집에서 빈둥대기만 한다면 어느 대학에 보내도 상관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음악과 악기가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다고 폼이나 잡을 게 뻔 한 진학은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감독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대학을 가든 그것이 인생 전체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어떤 전공을 선택하든 그 공부가 내 미래를 안전하게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좋은 대학 나오면 사는 게 더 편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 들린다. 편해지긴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삶은 불확실하다. 지금 내가 한 선택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언제 알 수 있을까?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예상할 수 있을까? 대학뿐만 아니라 직장도, 배우자도 마찬가지다. 모든 선택의 결과는 미래에 있다.


아내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지금도 연락하고 있다. 이 친구들 가정 중에 문제없는 가정은 없다. 누구는 자식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고 다른 가정은 남편이 주식 투자에 실패해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다른 친구는 애가 안 생겨서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으며 한 친구는 이혼했다. 이들이 연애할 때 이 미래의 배우자들을 다 만났었다. 한 남자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공대를 나와 굴지의 제약회사에 취직했었으며, 한 남자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으며, 한 남자는 수입 자동차 회사의 능력 있는 엔지니어였다. 현재도 다들 그렇다. 직업도, 사람도 그대로인데 가정은 달라졌다.


내 아내를 포함해서 아내의 친구들 모두 심사숙고해서 남편감을 골랐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만큼 잘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참고 살아왔지만 고난은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 내가 아플 수도 있고 배우자가 아플 수도 있다. 자식이 결혼을 못할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평안한 날이 언젠간 오리라 기대하며 참고 살고 있지만 그런 완벽하게 평안한 날은 오지 않는다. 사는 동안 내내 우린 자잘한 걱정과 반복되는 선택과 크고 작은 도전에 직면한다. 삶은 살아내는 것이다.


마지막 질문과 답이 남았다. 이런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힘으로 살아야 하는가? 연대다. 사랑이다. 이 두 영화의 공통된 대답이다. <지아인 제인>에서 군인들은 함께 싸운다. 낙오된 전우를 위해 기다리고 구출하러 간다.


이 영화에선 공동의 적을 아주 심플하고 선명하게 정했지만 우리의 삶에선 그 적의 모습이 다종다양하며 그 모습 또한 흐릿하다. 그 적은 나의 적일 뿐만 아니라 너의 적이기도 하다는 걸 아는 순간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전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쓰러지면 이 세상의 선한 귀퉁이 하나가 무너진다는 걸 알 때, 그 위기를 감지하고 공감할 때 우리는 기꺼이 연대할 수 있다. 아니 연대할 수밖에 없다.    

  

<더 그레이>를 생각해 보자. 주인공의 가슴에 최후의 순간까지 온기를 불어넣는 건 사랑에 대한 기억이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의 추억으로 살아왔고 지금의 사랑으로 오늘을 살며 그 사랑이 함께하는 동안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사랑의 실패는 우리의 삶을 멈추게도 하지만 그 사랑 없이는 그 멈춘 삶을 다시 일으킬 수 없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부모든 자식이든 사랑의 종류는 많다. 돌이켜보면, 그리고 지금 내 삶에 들어온 사랑을 생각해 보면 사랑은 일종의 짐이자 빚이다. 때로는 벗어던지고 싶은 것이면서 때로는 감수해야 할 것이지만 결국엔 미래에 대한 생각을 겨우 가능케 하는  무엇이다. 이것이 빚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갚으라는 사람은 없다. 그저 서로 더 많이 서로에게 빚을 내며 살자는 사람만 있다. 그래도 갚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이가 들어 약간이나마 철이 든 탓일까? 누군가 하늘을 날고자 할 때 아래에서 위로 불어주는 바람이 되어주고 싶은데, 참 마음대로 안 된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2-13

비결

교회를 안 다닌 지 20여 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제일 궁금한 건 “일체의 비결”이다. 비결은 나만이 알고 있는 방법이다. 남들은 모르는 차원이 다른 문제 해결 방법이 비결이다. 이 비결을 얻기 위해서는 살아내야 한다.


재미있는 건 비결을 얻었다고 해서 문제가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 뿐이다. 남과는 다르게. 결국 남과 다르게 살아온 사람은 남과 다른 삶의 비결을 갖고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은 앞으로도 그 비결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며 더 많은 비결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비결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바로 니체가 말한 영웅 아닐까?      

영웅들의 조건 - 누군가 영웅이 되고자 원한다면, 먼저 뱀이 용으로 변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적당한 적수가 그에 없는 셈이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498.

결국, 우리의 하루가 어떠했는지는 해 질 녘이 되어야만 알 수 있듯이 인생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 그레이>에서처럼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두려움 없이 생의 진실을 응시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지아이 제인>의 네이비 씰처럼 스스로를 동정할 새도 없이 난관을 헤쳐가며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직 평가는 이르다. 언제 평가해야 할까? 마지막 순간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용기를 북돋아 주는 시를 읊조리며 전의를 불태우며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다.

참되고 진정한 것은 세상에서 좀 더 수월하게 세력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자들이 그것의 유행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세상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질식당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방해받고 제지당하는 이유는 그러한 사정 때문이다. 나의 경우 내 나이 갓 서른에 이 책이 나왔지만 일흔둘이 되어서야 제3판이 나오는 것은 그러한 결과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관해 나는 “하루 종일 달리다가 저녁이 되어 목적지에 이르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페트라르카의 글에서 위안을 얻는다. 나도 마침내 그 나이에 도달하여 이제 내 생애의 막바지에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만족감을 느끼며, 옛날의 통례에 비추어 볼 때 뒤늦게 시작된 만큼 오랫동안 지속되리라 희망을 품는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 판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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