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Jan 04. 2024

내일의 그리움을 오늘의 사랑으로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더라     


내 정령(精靈) 술에 섞여 님의 속에 흘러들어

구곡간장(九曲肝腸)을 마디마디 찾아가며

날 잊고 님 향한 마음을 다스리려 하노라   

  

기러기 산 채로 잡아 정들이고 길들여서

님의 집 가는 길을 역력(歷歷)히 가르쳐주고

한밤중 님 생각날 제면 소식 전케 하리라     


등잔불 그무러갈 제 창(窓) 앞 짚고 드는 님과

오경종(五更鐘) 나리올 제 다시 안고 눕는 님을

아무리 백골이 진토(塵土)된들 잊을 줄이 있으리

    

내 가슴 흐르는 피로 님의 얼굴 그려내어

내 자는 방안에 족자 삼아 걸어두고

살뜰히 님 생각날 제면 족자나 볼까 하노라


-매창梅窓 (선조 시기, 부안 기생)


말로는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리움도 마찬가지다. 사랑한다는 말도, 그립다는 표현도 상태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당연히 그리움과 사랑의 깊이가 온전히 전달될 리 없다. 그러니 상대방이 묻는다. 물어도 이을 말이 없다. 단어가 없다. 적절한 표현이 없다. 간편한 방법을 찾는다. 그런 방법이 있나?     


마음의 징표, 선물을 주기도 한다. 사물의 크기와 가치에 사랑을 담는다. 그 가치와 크기가 사랑의 가치와 크기를 드러내주길 바라며. 여전히 사랑은 억울하다.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을 줘야 사랑이 전달되겠는가? 작고 가치 없는 것에는 사랑하는 마음을 담을 수 없단 말인가? 사랑은 말과 사물, 그 안에 담기길 거부한다. 야생의 존재다. 길들일 수 없는.     


아는 말, 떠도는 단어 안에 사랑을 어르고 달래어 담아 본다. 모국어의 한계 속에서 내 사랑을 겨우 전달한다. 가 닿을까?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그 의미가 새어 흐르는 걸 본다. 구멍 난 물병에 담긴 물처럼 입에서 떠난 말과 글로 써진 문장엔 사랑이 다 담기지 않는다. 담긴 것마저 차고 넘친다. 찰랑거리는 사랑을, 출렁거리는 그리움을, 넘쳐흐르는 내 마음을 담을 수 없다. 새어 흐른다. 안타깝다.


매창의 시는 저 첫 연만 아는 사람이 많다. 나 또한 그랬다. 저 세줄 만으로도 충분히 아팠으나 후에 나머지 부분을 읽은 후 더 아팠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그를 향한 마음은 더 커진다. 없는 사람이 선명한 추억이 되어, 해결할 수 없는 그리움이 되어, 가시지 않는 고통이 되어 내 곁에 있다. 안을 수도 만질 수도, 가서 볼 수도 없으니 커지는 마음을 무력하게 바라만 본다.     


봄에 떠난 사람, 가을까지 보질 못했다. 과실나무 꽃은 대부분 봄에 핀다. 내가 봄에 볼 수 있는 나무들을 보면 매화가 먼저 나서고 그 뒤를 이어 살구꽃, 모과꽃, 만첩홍도 등이 핀다. 배꽃은 4월에서 5월 사이에 피니 그나마 찬바람을 제치고 가장 먼저 서둘러 찾아온 이른 봄기운은 함께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이 갔다. 낙엽이 다 떨어졌다면 11월의 끝이다.      


봄부터 가을까지의 시간을 은유로 해석하면 당연하게도 긴 세월이다. 날 제외한 모든 생명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그렇게 생의 한 나절을 불태운 뒤 서서히 쉴 준비를 하려 한다. 그만큼 긴 세월, 길게 느껴지는 세월이다. 세월이 긴 만큼 그리움 또한 사무친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나머지 연 안에 이 긴 세월 사무친 그리움을 어떻게든 견뎌내 보려는 몸부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그에게 갈 수만 있다면, 내가 그의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하고 싶다. 육신은 보내지 못하니 영이라도 끄집어내어 님이 마시는 술 속에 녹아들고 싶다. 소식을 전할 길도 없으니 대륙과 대륙을 넘나드는 기러기를 길들여 멀리 떨어지는 님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다.   

   

보고 싶다. 그리운 마음에 몸서리가 쳐진다. 밤이면 슬며시 찾아오던, 한밤중 날 안아주던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으니,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다. 지금이라면 사진이라도 꺼내 봤을 것이다. 화상 통화라도 했을 것이다. 초상화도 흔치 않은 시절, 오직 기억에 의지해 그 사람의 얼굴을 그려서라도 그 사람을 보고 싶다. 도대체 이 정도의 그리움은 어느 정도의 그리움인가.


그리운 사람과 그리운 마음, 그 사이에 가로 놓인 거리와 세월이 애간장을 녹인다. 애간장이 녹고 속이 타는 그리움은 만나야 해결된다. 그 마음을 전할 수 있어야 그나마 진정이 된다. 모든 게 느리던 시절, 그리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설령 걷는 것이 연인에게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시대였다 하더라도 가지 말란 법이 있었을까? 시간이 오래 걸리고 몸이 피곤할 뿐, 맘만 먹으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가는 동안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가는 길이, 그 여정이 험하고 멀수록 그리움은 더 사무친다. 그리운 이를 향한 여정은 그리움을 더 선명하게 한다. 그 여정 속에서 사랑도, 그리움도, 그리고 그 사람의 모습도 더 커지고 선명해진다. 마치 순례를 하는 동안 신에 대한 경외감이 더 솟아오르고, 신이 내게 주신 사명이 더 선명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운 사람은 눈앞에 있던 사람이다. 그리울 사람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다. 상실의 아픔이 실재(實在)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내 삶에, 내 눈앞에 있는 것들만이 그리움의 예감을 품고 있다. 그러니 갖지 못했던 것, 눈앞에 있어본 적 없었던 것, 실재하지 않았던 무엇, 내 시야에 없었던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지금 실재하는 모든 것들, 나에 애정과 관심을 받는 모든 것들, 모든 사람은 그리운 것, 그리운 사람이다. 그리움의 잠재성을 응축하고 있다. 사물은 언젠가 소멸되고 사람 또한 언젠가 죽는다. 소멸과 죽음이 오기 전, 그와 함께 당도할 미래의 그리움을 미리 앞당겨 오늘의 사랑의 에너지로 쓰면 어떨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내 눈앞의 사람이 얼마나 애틋하겠는가? 오늘, 그리움을 먼 미래에서 불러내어 눈앞의 사람에게 사랑으로 쏟아부어보자.


말은 이렇게 해도 그립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 본 지 오래됐다. 아내와는 1999년에 만나 21세기를 함께 했다. 그래도 결혼 전엔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나 지금은 잘 안 한다. 그저 농담처럼 슬며시 지나가듯 던질 뿐이다.     


예뻤던 아내는 귀여워졌다. 그렇다. 사십 대 중반인 아내는 요즘 귀엽다. 아내가 나와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나 친구나 동료 이야기, 쇼핑 리스트에 관한 이야기와 같은 자잘한 이야기를 재잘 되는 걸 보고 있으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그러면 아내가 “왜 웃어?”하고 묻는다. “당신 하는 짓이 은채랑 똑 닮아서.”     


딸도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아니 하굣길에 아빠를 만나자마자 쉴 새 없이 말을 한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학원에서 있었던 일, 친구 이야기, 급식 메뉴에 대한 불평 등등. 이런 딸하고 닮았다고 말하면 아내는 “내가 걔를 닮은 게 아니라요. 걔가 날 닮은 거거든요.”하고 답한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간다. 중요한 이야기는 없다. 심각한 이야기도 없다. 그저 들어줄 사람이 앞에 있어서 나오는 말이고 듣고 싶은 사람의 말이기에 나 또한 듣고 있다.      


욕심이 없다. 더 큰 바람이 없다. 여기서 뭔가를 더 바라면 그건 욕심, 그것도 과욕일지 모른다. 이런 말을 아내에게 하면 “별로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 별소리를 다한다.”라고 타박할지도 모른다. 안 보면 보고 싶고 집 밖에 있으면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두 여자가 있다. 내가 살아온 거에 비하면, 그동안 애쓴 것에 비하면 정말 큰 복이다.  

    

그리운 것은 지금 내 앞에 있다. 그렇기에 지금 내겐 그리운 것도, 그리운 사람도, 보고 싶은 사람도 없다. 지금의 축복에 감사할 뿐이다. 


그리운 것과 그리운 곳과 그리운 사람이 있는 사람은 축복이다. 누군가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축복이다. 누군가 나와의 시간과 나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여겨 나를 끝끝내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세상에 없을 때, 그러니까 내가 죽고 나면 누군가는 나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소중한 사람이 되어 존재해 주는 것 또한 그리워할 사람에겐 축복이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서로를 그리워할 가능성을 품고 있는 두 사람 모두에게, 서로가 앞에 있기에 축복이다.


이 시는 <기생시집>에 실려 있다. 기생 일흔일곱 명의 시와 기생을 노래하고 기생을 주제로 하여 쉰한 명의 남정네들이 쓴 시가 실려 있다. 이 시집은 문정희 시인이 엮었다. 실려 있는 한시(漢詩)의 대부분은 문정희 시인이 한글로 풀어썼고 일부는 신석정 시인이 풀어쓴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판본을 보니 2000년 10월 25일에 초판이 나왔고, 난 2001년 2월 20일에 나온 초판 6쇄 본을 갖고 있다.  이 시집은 2001년 6월 2일, 아내에게 선물 받은 것이다. 표지 안쪽에 짧은 글이 있다.      


당신에게 하는 첫 번째 책 선물이에요.

당신이 좋아하는 작은 것들을 챙겨줄 수 있어서...

행복해요.

사랑해요. 

2001. 6.2 


이전 07화 늑대와 마주쳐도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