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둘째주- 방학 때는 어디든 가야 한다.
방학 때는 어디든 가야 합니다.
스물 몇 개의 선택 과제 중에선 박물관이나 유적을 갔다 온 뒤 쓰는 견학문, 가족 여행을 갔다 온 뒤 쓰는 여행 일기도 있습니다. 은채는 여름방학 때 고령을 갔다 온 뒤 한 가족 신문 만들기가 재미있었는지 겨울 방학에도 어디라도 여행 가는 걸 당연하게, 그리고 꼭 하고 싶은 과제로 선택했습니다. 방학 전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엄마 친구가 사는 포항을 갈지, 김해를 잠깐 갔다 올지, 전통의 경주에 갈지, 아니면 딸은 한 번도 안 타본 KTX를 타고 좀 촌스럽지만 서울 여행을 갈지. 솔직히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를 보다보면 엄마 아빠도 안 가본 서울의 명소가 많기에 서울 여행도 괜찮은 대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도 1980년대 중반, 그러니까 예전 조선총독부 건물이자, 한때 중앙청 건물이었던 곳에 있을 때 지하철 중앙청역에서 내려 가본 후 한 번도 안 가본 터라 얼마나 규모가 큰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서울 여행 결정.
엄마는 일사분란하게 KTX를 예매하고, 숙소를 정했습니다. 숙소 후보는 마포, 4대문 안쪽, 강남 코엑스 인근 등 세 군데를 놓고 또 회의를 했습니다. 가격, 동선, 맛집, 핫플레이스 등을 두루 고려해서 마포로 결정했습니다. 마포는 제가 서울에서 석사 과정을 할 때만 해도 직장인을 위한 술집이 밀집해 있는 약간 올드 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경의선이 지하화 되고, 용산 지역에 박물관들이 들어서고 TV에서 공덕역 인근의 족발 골목이며 전 골목을 소개해주는 바람에 아주 유명해지고 세련되어졌죠. 그 유명세에 연남동의 연트럴파크가 기름을 부었고요. 바뀐 마포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해서 아빠가 마포를 밀었습니다. 강북의 동서로 움직이기에도 편하고 4대문 안쪽과 강남으로 이동하기에도 편리했으니까요.
은채는 출발하기 전 주 일요일, 아빠 곁에 찰싹 붙어서 공부방의 컴퓨터를 켜 놓고 여행 계획을 짰습니다. 보고 싶고 가고 싶은데, 삼시세끼 투어를 할 맛 집, 부산보다 대 여섯 배는 복잡한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서 이동경로와 환승 방법을 메모했죠. 그래서 크게 3일 동안 4대문 안에서 보고 싶은 곳, 용산의 박물관 투어, 강남의 코엑스 투어로 결정했습니다. 맛 집도 은채가 먹고 싶은 거, 아빠가 먹고 싶은 거, 엄마가 먹고 싶은 거 골고루 선정했고요. 은채는 서울에서 육회를, 엄마를 위해서는 유명한 생선 구이집을, 아빠는 전과 족발 골목, 그리고 유명한 수제 맥주 집을 검색했습니다.
엄마는 일부러 옛 경로로 가는 열차를 예매 했습니다. 지금의 KTX는 부산역에서 출발하면 금세 지하로 들어가서 금정구쯤에 이르러서야 지상으로 나와서 대구까지 가는 동안 보이는 거라곤 산밖엔 없죠. 반면 옛 노선은 부산진역쪽으로 나가서 사상을 끼고 돌아 구포, 원동, 삼랑진, 밀양 등을 지나는 내내 지상으로 가니 왼쪽으로는 낙동강의 풍경을 두고 갈 수가 있죠. 또 오른쪽으로는 아주 잠시지만 철길 옆에 붙은 외가댁과 그 동네도 볼 수 있고 말이죠. 엄마는 은채에게 기차 여행의 참맛을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다른 KTX보다 삼십분 늦지만 풍경의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저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은채는 플랫폼에서 인증샷을 찍고,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엄마랑 수다도 떨고, 객실내에서 사진도 찍고, 차창 밖 풍경도 보면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있던 홍익회 아저씨들의 카트가 없던 터라 아빠와 함께 스낵 자판기에 가서 과자와 음료수도 뽑아 왔고 말이죠. 서울역에서 공덕역까지는 공항철도로 한정거장. 호텔에 짐을 맡기고 덕수궁에 갔습니다.
엄마가 미리 해설사와 함께하는 석조전 투어를 예약해 놨거든요. 은채는 처음 보는 궁궐의 모습에 반했습니다. 또 서양식 궁전인 석조전 내부를 거닐면서, 내부 곳곳에 담긴 가슴 아픈 근대사도 조용히 들었죠. 만찬장과 고종 황제가 황금색 곤룡포를 입고 있는 어진 앞에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덕수궁 앞에서 유명하다는 와플을 사먹고 바쁘게 명동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명동성당에 다다랐을 때 해는 벌써 많이 기울었습니다. 덕분에 성당의 붉은 색은 더 진해졌고, 무게는 더 깊어졌습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그 침묵의 공간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아빠는 오른쪽 벽에 있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조각을 오랫동안 들여다봤고, 은채는 엄마와 함께 뒤쪽 의자에 앉아 고요히 성당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아빠는 은채에게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과 정면과 양측면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여줬습니다. 나오는 길에 은채와 엄마는 신도님들이 파시는 식혜 한통을 숙소에서 마시겠다며 샀습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마침 엄마 직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저동 백병원이 보여서 그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죠.
숙소에 도착해서 잠시 쉰 뒤 시장에 있는 생선 구이 식당을 찾아 나섰습니다. 쉽게 찾아서 생선구이를 시키고 앉아 있는데 뭔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부산 사람이 서울까지 와서 생선구이를 먹는 거야?” 아빠가 한마디 했더니 모두 빵 터졌습니다. 그러면 어떠랴. 모두들 맛나게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