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둘째주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코엑스까지
둘째 날엔 미세먼지가 최악이었습니다.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안 나오기로 결정. 전 그 규모에 감동했습니다.
열린 마당 사이로 보이는 남산의 풍경도 멋있었습니다.
“여보, 이거 왜 이렇게 해 놨을까?” 아내가 물었습니다.
“글쎄 이게 창문이라면 강북을 보면서는 한국의 과거를, 강남을 보면서는 한국의 미래를 보라는 건가? 우리 조상들은 창문으로 집 밖의 산수를 안으로 들여와 내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뛰어났으니까. 중국 사람들은 산수가 좋으면 똑같이 만들어서 담을 쌓고, 일본 사람들은 그걸 축소해서 정원을 만들고, 한국 사람들은 그 산수를 향해 창을 냈지.” 은채는 엄마 아빠의 이런 대화를 귀담아 들으며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인산인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죠. 정말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초등학생들이 해설사와 함께 여기저기 모여서 관람을 하면서 열심히 그리고 메모하고 있었습니다. 은채는 브로슈어를 펼쳐 들고 그 위에 설명 된 문화재는 다 보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서 선사 시대는 건너뛰고 삼한 시대부터 시작했습니다. 신라 금관, 가야 목걸이, 고려의 청자어룡모양 주자, 반가 사유상 등을 관람하며 연신 감탄했습니다. 회랑 끝에 전시 된 경천사지 십층 석탑의 규모에 아빠와 함께 놀라기도 했죠. 엄마는 다리가 아파 2층에서 쉬는 동안 3층의 불교 미술실과 공예실에 아빠와 함께 했습니다. 열시 반에 들어가서 벌써 두 시가 넘어 있었지만 은채는 이집트 전시관의 미이라까지 보고 내려가자고 했습니다. 결국 은채는 브로슈어에 표시 된 건 다 봤습니다. 기념품점에선 반가사유상이 그려진 볼펜을 하나 샀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니 너무 피곤한데다가 미세 먼지 때문에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냈죠. 결국 마포에서 순두부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쉬다가 샐러드를 사서 저녁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 했습니다.
마지막 날 아침엔 살짝 눈발이 날렸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쳐서 은채는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서울에 온 이유 중 하나가 눈 구경이었으니까요. 조식을 먹고 코엑스로 향했습니다. 은채에게 보여주고 싶은 커다란 도서관이 있는 곳이죠. 별마당 도서관에선 다른 나라 관광객들처럼 설정샷도 찍었습니다. 은채는 자연스럽게 잡지 한권을 펴 들고 포즈를 취하더군요. 아쿠아리움도 갔습니다. 은채는 이곳에서도 스탬프를 찍는 브로슈어를 하나 들고 충실히 코스 미션을 수행했습니다. 도장이 다 찍히면 특별히 주는 엽서가 있었거든요. 우리 모두 신기하게 구경했습니다. 부산 아쿠아리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어류도 있었고, 코스도 있었으니까요. 은채는 늑대 거북과 뱀목 거북이 제일 신기하다고 했습니다.
그날 점심은 은채가 꼭 먹어보고 싶다던 육회로 했습니다. 한 번도 안 먹어 본 음식이 왜 먹고 싶은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은채로서는 익히지 않은 소고기의 맛이 어떤지 궁금했나봅니다. 아빠나 엄마나 은채 덕에 오랜만에 육회를 먹었습니다. 은채는 육회에 얹어 나온 배채는 거들떠도 안 보고 육회만 열심히 먹었습니다.
“배는 왜 안 먹어?”
“그냥. 아닌 것 같아서.”
우린 납득했습니다. 은채는 스테이크에도 소스를 잘 안 뿌려 먹고 연어도 훈제 연어보다 생연어를 좋아하기 때문이죠. 처음 밥을 먹었을 때부터 재료 본연의 맛을 더 좋아하지 거기에 뭔가 첨가되거나 얹어져서 맛이 변하거나 바뀌는 건 싫어해 왔습니다. 결국 배는 육개장을 시킨 아빠와 육회 비빔밥을 시킨 엄마가 다 먹고 은채는 육회의 대부분을 혼자 먹었습니다.
은채는 좋은 여행 파트너입니다. 낯선 호텔 잠자리에서도 쿨쿨 잘 자고, 늦잠도 안 자고 일찍 일어나 함께 조식을 먹고, 낯선 여행지에서 처음 먹어 보는 음식도 망설이지 않고 도전합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미션 수행 의지가 너무 강력하다는 것이죠. 박물관이든 쇼핑몰이든 은채가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봐야하고, 브로슈어나 팸플릿에서 강조한 장소나 문화재, 공간은 꼭 보고, 가봐야 합니다. 게다가 엄마랑 알콩달콩 쇼핑도 잘 하니 어느 곳에 가도 동선도 길어지고 머무는 시간도 깁니다. 내일 모레 오십을 바라보는 아빠로서는 참 미안하지만 정말 체력을 바닥나게 하는 여행 파트너죠.
박물관에서 잠깐 쉬면서 혼자 중얼거리며 은채에게 사과했습니다.
“아빠가 늙어서 미안하다.” 아내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웃더군요.
그리고 꼭 다짐 했습니다. 어디로 어떤 여행을 가든 호텔 조식은 꼭 챙겨 먹는 걸로.
조식을 든든하게 몇 접시 먹고 길을 나서도 은채와 동행하는 동안 체력이 버틸까 말까니까요.
내려오는 기차는 빠른 노선을 탔습니다. 은채와 엄마는 나란히 붙어 앉아 여행 사진을 보면서 스크랩 할 사진을 고르며 내려 왔습니다. 아빠는 은채의 방학 숙제 두 개를 해결했다는 안도와 함께, 은채에게 다른 세상,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줬다는 만족감에 기분 좋게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