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둘째주 - 은채도 알고 있다.
주말에 삼촌 집에서 놀고 오면서 새 식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은채 베개만한 시바견 인형 쿠션. 은채는 집에 와서 이 말랑말랑한 인형을 한참 조물락 거리더니 갑자기 자기 공부상에 앉아 뭔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뭐해?”
“임명장 만들어.”
“임명장?”
“응. 이 인형이 이제 우리 가족이 됐으니까 임명장을 줄려고.”
임명장 내용은 간단합니다.
임명장
이름 : 시바짱
위 시바견은 우리 가족이 되었으므로 이 임명장을 수여합니다.
2020. 2.9 가족 최은채
특징 : 꼬리가 통통해서 귀엽다.
아빠가 이 임명장을 보고 한마디 했습니다.
“야. 딸. 아빠는 무슨 임명장 하나 못 받고 계속 아빠 했는데.”
“알았어. 아빠도 하나 만들어 줄게.”
은채는 다시 부지런히 쓱싹 거립니다. 그렇게 아빠 임명장이 만들어졌습니다.
-은채 아빠 임명장-
이름 : 최영훈 / 가명(은채 아빠)
위 어른은 이제 은채 아빠가 되었으므로 이 아빠 임명장을 수여합니다.
2012.2.21. 신생아 최은채. 사랑합니다.
은채아빠/은채(하트 모양)
우리 부녀는 임명장 수여식처럼 연출도 하고 악수도 하고 임명장을 건네받았습니다. 지금의 시점으로 임명장을 만들어 줄줄 알았더니 마치 타임 슬립이라도 한 것 마냥 신생아 때로 돌아가서 임명장을 만들었습니다.
잠시 멍하니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언제부터 아빠 노릇을 해 왔는지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런 장난스러운 서류 하나 만드는데도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해서 썼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잠시 후 다시 상 앞에 앉더니 뭔가를 또 끄적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상 하나를 엄마에게 줬습니다.
상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특별상-
이름 : 정미란/ 가명(은채 엄마)
위 엄마는 8년 동안 나를 잘 돌봐주고 간호해주고 잘 놀아 주었고 내 취향을 저격 했으므로 이 특별상을 수여합니다. 2020.2.9.
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 최은채
아내는 잠시 깔깔대더니 이내 고요해졌습니다. 아마 무지하게 감동을 받았을 겁니다.
아내는 이 특별상을 침실 문에 떡하니 붙여 놨습니다.
아이가 알아주길 바라며 아이를 키운 적은 없지만 막상 알아주니 그 어떤 큰 상이나 대가보다 크게 다가오고 뿌듯합니다. 아내나 저나 업계에서 그럭저럭 위치를 잡아 먹고 살고, 아내는 사회에서 나름 지위도 있고 대외 활동을 해서 이런저런 임명장이나 공로상도 많이 받았는데 딸이 주는 이 상 앞에서 잠시 말을 잃을 정도로 감동했습니다. 물론 저도 그 상을 보면서 뭉클했고요.
은채는 우리 집을 말할 때, 그 소유격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만큼 컸습니다. 얼마 전 저녁을 먹다가 하영이가 내 집에 왔으면 좋겠어, 하기에 “야, 이 집이 왜 네 집이야. 우리 집이지.” 했습니다. 그러자 은채는 “아빠, 하영이랑 둘이 얘기하는데 우리 집이라고 하면 하영이와 나에 집이 되는 거잖아.”라고 대답하더군요.
문법적인 소유격과 발화 상황에서의 통상적인 소유격의 차이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있었지만 은채의 논리적인 설명에 감탄하고 칭찬해줬습니다.
“그렇지. 네 말이 맞다.” 아내와 저는 순대국밥 먹던 것을 잠시 멈추고 자기 말을 끝내자마자 자기 순대국밥에 코를 박고 먹고 있는 딸을 물끄러미 봤습니다. 우리가 어쩌자고 이런 예쁘고 똑똑한 딸을 낳았나 하는 표정으로 말이죠.
아이가 잘 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주말에 예능 프로그램에 쏙 빠진 딸의 옆얼굴을 맥주잔을 홀짝이면서 보고 있노라면 참 용케도 이렇게 행복한 순간을 맞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냥 불러봅니다.
“딸.”
“응?” 잠시 아빠가 말없이 보고 있으면 은채는 싱긋 웃어주고 다시 TV를 봅니다.
그러다 다시 “딸.”하고 부르면 다시 아빠를 보고 “왜?”합니다.
그래도 아무 말이 없으면 “아~쫌.”하고 부산 소녀 특유의 짜증 멘트를 날리고 다시 TV를 봅니다.
엄마가 한마디 합니다. “아빠가 은채 예뻐서 그래.” 그러면 은채는 싱글대며 TV를 봅니다.
내 어머니께서 이름 대신 “아들”이라고 부르셨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