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1일-종업식과 은채의 아홉번째 생일
통지표를 보지 않아도 압니다.
1학년은 충분히 눈부셨습니다.
열한시쯤 데리러 가니 코로나19의 여파로 졸업식에 온 부모님들은 학교에도 못 들어가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은채는 운동장 벤치에 앉아 아빠를 기다렸죠. 은채를 데리고 나와 바로 엄마 차에 태웠습니다.
며칠 전, 결국 경주 여행은 취소했습니다. 잡힐 것 같았던 바이러스는 대구에서 산불처럼 퍼져 나갔고 부산에서도 제법 큰 불을 일으키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병원 직원인 엄마는 당연히 이런저런 관련 정보를 병원 외부인보다 빨리, 많이 알게 되니 여행 취소는 당연한 수순이었죠. 손녀 걱정이라면 아빠에 뒤지지 않는 외할아버지도 연일 전화해서 말리셨고요.
대신 휴게소 투어를 하기로 했습니다. 또 경주의 한 리조트의 워터 파크 어린이 연간 회원권을 사주기로 했습니다. 은채는 이 회원권만 있으면 일 년 중 아무 때나 갈 수 있다는 엄마의 말에 설득 돼서 결국 여행 취소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 큰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아빠 한번, 엄마 한번 보며 억울한 마음을 말없이 호소했지만 말입니다.
날씨는 눈치 없이 좋았습니다. 은채는 미국 할머니가 보내주신 생일 선물 박스에 들어있던, 꽈배기 패턴이 들어간 아이보리 색 스웨터와 정강이 부분에 자잘한 모조 크리스털이 박혀 있는 자주색 레깅스, 얇은 더플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전혀 추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코트는 가방과 함께 던져졌고 엄마는 은채가 안전벨트를 하는 걸 확인하자마자 부드럽게 차를 몰았습니다.
일부러 경부 고속도로를 탔습니다. 점심을 아직 못 먹었다는 핑계로 조금 지나 나타난 양산 휴게소에 들어갔습니다. 각자 좋아하는 메뉴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잠시 가다 다시 언양 휴게소에도 내렸습니다. 여기서는 간식을 먹기로 했습니다. 은채는 먹고 싶다던 강냉이도 한봉지 사고, 탄산음료도 사서 마시면서 소떡소떡도 하나 먹었죠.
엄마는 은채에게 이날 하루 치팅데이를 줬습니다. 은채가 내민 통지표를 보지 않아도 은채가 일 년 동안 얼마나 열심히 학교생활을 했는지 정말 잘 알기에 엄마는 하루 동안의 자유 시간을 준 것이죠. 간식을 먹고 난 은채는 자잘한 장난감을 뽑는 자판기들이 열 개 넘게 무리지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빠, 현찰 있어?”
“당신 현찰 있어?”
전 다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아내는 오천 원을 건넸습니다. 동전으로 교환해서 자판기 앞에 섰습니다. 은채는 신중하게 고르더니 세 개의 자판기에서 장난감을 뽑았습니다. 없어도 되는 것이고, 몇 주 지나면 까맣게 잊겠지만 뽑을 때의 즐거움은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큰 가 봅니다. 은채는 경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싱글벙글하며 장난감을 만지작거렸습니다.
경주까지 왔는데 달랑 회원권만 사가긴 뭐해서 보문 호숫가에서 커피를 한잔하고 잠시 산책했습니다. 오늘 길에도 휴게소에 들렀습니다. 올 때는 부산-울산 고속도로로 왔기에 휴게소라고는 딱 두 개 밖에 없으니 경주 휴게소에 들르기로 했습니다. 그곳에서도 간식을 사 먹고 집 근처의 생활용품점에 들르기로 했습니다. 엄마가 2만원 한도 내에서 은채가 사고 싶은 건 다 사게 해주겠다고 했거든요.
차를 엄마가 다닌 부경대학교 주차장에 세우고 비가 오락가락 하는 붐비는 길을 잠시 걸어 생활용품점에 들어갔습니다. 은채는 몇 개 고르더니 더 예쁜 것을 사고 싶다며 근처에 있는 다른 문구점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은채는 자잘한 것들을 몇 개 샀습니다.
엄마는 그냥 넘어가기 서운하다며 두 번째 생일 케이크를 사자고 했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 그러니까 은채 생일 일주일 전에, 여행을 가면 생일을 못 챙겨 준다면서 감전동 외가댁에서 생일잔치를 했고, 그때 첫 번째 생일 케이크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줬죠. 그러나 진짜 생일은 오늘이고, 그 생일에 계획대로 리조트에서 제대로 물놀이도 못하고, 그 좋아하는 숙소에서 숙박도 못하게 됐다는 걸 안 딸이 얼마나 섭섭해 했을지, 그 대신 경주까지 드라이브하기로 한 걸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그 섭섭한 마음을 얼마나 잘 다스렸을지, 이런 어진 면모를 크면서 얼마나 많이 보여줬는지 잘 아는 엄마로서는 그냥 넘어 갈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이 주 연속, 생일 케이크에 촛불이 켜졌습니다. 엄마, 아빠의 생일 축하 노래 속에서 은채는 환하게 웃었고 힘차게 촛불을 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식적인 1학년의 여정은 마무리가 됐습니다.
그리고 봄 방학이 시작됐습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봄 방학은 늘어났습니다. 은채는 쇼핑몰도, 서점도, 야외 운동도 어려운 탓에 봄방학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고 있으면서도 재미있게 보내고 있습니다. 집에 있던 단순한 보드 게임으로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아빠랑 해보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1학년의 흔적이 여기저기 잔뜩 쌓여 있는 자기 방도 치우면서 말이죠. 그러는 틈틈이 끼니때마다 삼시세끼 밥도 챙겨 먹고, 그 사이 간식도 챙겨먹으면서 말이죠. 그렇게 봄방학 동안 잘 먹고, 엄마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어리광도 실컷 부리면서 에너지 충전을 한 은채는 2학년을 씩씩하게 맞이할 것입니다.
1학년의 마지막 날, 아이들은 2학년 몇 반인지 알게 됐습니다. 어떤 친구와 한 반이 될지도 알게 됐죠. 2학년 “마”반인 은채는 윤여준, 박민서(남자 민서)와 한반이 됐습니다.
선생님은 은채에게 이렇게 말하셨다고 합니다.
“은채는 우리 반 대표니까. 2학년에 올라가서도 민서랑 여준이 많이 도와주고 친하게 지내야 해.”
이날 하루 종일 아내의 학부모 단톡방엔 불이 났습니다. 누가 누구랑 한반이 됐는지 엄마들은 열심히 정보를 모았고, 같은 반이 된 친구 엄마에게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졸업할 때까지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만났다하면서 학교 동기로서, 친구로서 우정을 쌓아 나갈 겁니다. 은채가 첫 번째 어린이집부터 친구였던 박지유와 드디어 같은 반이 된 것처럼 말이죠. 이 사실을 문자로 알게 된 모녀가 차 안에서 어찌나 기쁨의 비명을 질러대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