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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n 05. 2024

헤테로토피아 - 미셸 푸코

동해선에 읽은 책 88

푸코와의 만남

내가 푸코의 책 중 가장 처음 읽은 책은 <지식의 고고학>이었다. 아직 있기에 꺼내어 판본을 보니 1998년 8월에 출간된 1판 8쇄를 샀다. 1992년 8월에 1쇄가 나왔으니 얼마나 팔렸으려나. 아무리 민음사라고 해도 이런 책의 1쇄가 몇 천부를 넘지를 못 했을 것이다. 잘해야 천 부 정도 아닐까? 그 이상이려나? 넉넉하게 2천 부로 잡는다고 해도 6년 동안, 만 부 좀 넘게 팔리지 않았을까? 그중 한 권이 내게 있다.      


아마 폼 좀 잡아보겠다고 샀을 것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학의 대학원에 갔는데 이 정도는 읽어줘야지 하는 심사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대학원 동기, 선후배들이 액세서리처럼 들고 다니던 책이 장 코르미에가 쓴 <체 게바라 평전>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책, 표지가 멋있었다. 마른 피 색 바탕에 판화처럼 그려진 체 게바라의 얼굴....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 책은 아이폰의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 ^^     


여하간, 난 또 그게 꼴 보기 싫어서 이 책을 샀을지도 모른다. 그때 산 책들의 절반 이상은, 아니 엄밀히 말하면 교재가 아닌 책들의 대부분은 다 그렇게 있어 보이기 위해 심사숙고하여 고른 책들일 것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읽을 당시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지도 못했다.      


-다시 푸코에게로 돌아오면.... 그 뒤로, 삼십 대 중반, 어쩌면 그 이후에 다시 푸코를 읽었다. 그 유명한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그러다 최근 들어 푸코의, 또는 푸코를 다룬 책들을 몇 권 읽었는데, 특히 푸코의 책 중 얇은 책을 사고 읽었는데 샀으나 읽지 못한 책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이고, 읽은 책으론 두 해전 읽은 <담론의 질서>와 이 책이다.


“나는 거기서 당시 내가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르던 것, 즉 주어진 사회 공간에서 발견되지만 다른 공간들과는 그 기능이 상이하거나 심지어 정반대인 독특한 공간들을 다루었다.”, P121(레비나우와의 인터뷰 중에서)     
“서로 구별되는 이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 그것은 일종의 반反공간이다.”, P13.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해 신화적인 동시에 현실적으로 일종의 이의제기를 하는 상이한 공간들, 다른 장소들....”, P.48     
“테이소가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활용하는 방식은 푸코가 1966년 강연에서 제안한 체험된 시간의 이질성과 불연속성, 삶의 분기점들, 생물학적 과도기(성인으로서의 입문, 사춘기, 처녀성 상실), 에로스와 타나토스와 같은, 인간 존재의 총체성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공간성이라는 차원을 조금도 옮겨놓지 않는다.”P117(다니엘 드페르의 해제 중에서)     

헤테로토피아라는 단어의 매력

아주 논리적이면서 어려운 말만 하는 아주 까칠한 선배가 있다고 하자. 대화를 하다 보면 나에 무식을 아주 “독보이게”하는 그런 선배 말이다. 이 선배, 세상 일에는 도통 관심 없고 내가 경험하고 체험한 세상엔 별 관심 없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나 술 한잔 하는데, 웬걸, 이 선배 많이 편해졌다. 선배가 달라진 건지, 내가 달라진 건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만 어째, 마주 앉아 있는데 불편하지 않다. 선배의 말에 맞장구를 칠 정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이 양반, 알아듣게, 이렇게 핵심만 탁 추려서 말할 줄도 아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또 당연한 것이 푸코가 이 헤테로토피아에 대해 처음 말한 곳이 1966년 12월, 라디오 강연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푸코라도, 설령 이런 강연을 들을 각오가 되어 있는 불특정 다수라 하더라도 그 다수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을 터. 그래서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말”을 했는지 모른다. 유사한 내용을 다음 해 봄, 한 건축 학회에 초대되어 이야기했는데, 이 내용은 약간 더 학문적이다.  

    

자, 본론(그렇다. 이제야 본론이다.)으로 들어가자. 이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네 개의 단락을 제시했다. 당신은 저 글을 읽고 어떤 공간을 떠올렸는가? 푸코는 여러 예를 들었는데, 난 그 예에 백 퍼센트 공감했다. 과거 유럽에서 제법 있는 집 아들이 열 살만 넘으면 들어갔던 다양한 기숙학교들(수도사들이 세운 학교, 군사 학교), 사람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된 사람들이 가는 곳들(앞서 언급한 푸코의 책에 나오는 감옥과 정신 병원, 요양원), 내가 사는 사회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일상에선 허락이 안 되는 뭔가를 할 수 있는 휴양지, 성적 일탈의 장소들(매음굴, 아편굴, 사창가), 마지막으로 우리 곁에 있지만 세상과 단절되고 시간의 흐름이 사라지는 곳(극장, 박물관)과 집 안에 있지만 누군가에겐, 또 어느 순간엔, 다른 무언가와 접합되어 의미가 달라지는 공간(침실, 욕실)과 사물(침대, 아이들의 작은 텐트와 아이들이 각종 사물로 임시로 만드는 은신처들)들....     


결국, 헤테로토피아는 사회에 있지만 사회의 금기가 작동되는 곳, 일상에 있지만 일상에 균열을 발생시키는 곳, 시간의 흐름을 공유하지만 과거의 시간을 집요하게 쌓아 놓은 곳이다.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으로 지금, 이 장소에 대비되는 이상적(理想的) 시공간이라면 헤테로토피아는 이 현실의 반 태제로써,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의 멀쩡함을 유지시켜 주고 그 멀쩡함을 견뎌내게 하며 더 나아가 그 멀쩡함을 돋보이게 하고 가치 있게 하는, 멀쩡한 시간과 일상에선 금기시되고 동시에 노골적으로 그 멀쩡함의 허위성과 제도적 성질을 고발하는, 아울러 동일한 인간에게 하나의 경계로 작동하여 그 인간에게 다른 존재가 됐다는 훈장을 달아주는 곳으로 지금, 여기 존재하는 공간이자 장소다.      


“헤테로토피아들 사이에는 아마도 거울이라는, 어떤 혼합된, 중간의 경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거울, 그것은 유토피아다. 장소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거울 안에서 나는 내가 없는 곳에 있는 나를 본다.”, P. 47     


이곳과 저곳의 사이 - 거울의 특이성

나는 47페이지 하단에서부터 48페이지에 걸쳐 있는 거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으며 약간 소름이 돋았다. 이전에, 난 내 브런치북 <사물의 우연>에 담긴「거울」이라는 글에서 거의 유사한 생각을 나열했었기 때문이다. 거울의 이쪽과 저쪽에 동시에 존재하는 나. 특히 섹스를 하는 나를 보는 나를 보는 섹스를 하는 나를 보는.....  https://brunch.co.kr/@eunchaepapa/208    

 

푸코가 말했듯이, 미국에서의 모텔처럼 일본과 한국의 모텔도 누구나 다 그 용도를 알지만, 심지어 그 용도의 불건전한 활용 또한 알지만 묵인하는, 그 공간의 거기 있음을 용인하는 헤테로토피아다. 심지어 많은 모텔“촌”은 주택가나 대학가 근처에 존재하면서 일상의 지루함을 냉소하고 있다. 이 모텔에서 거울은 헤테로토피아 안의 헤테로토피아를 창조한다. 공간 안에 공간, 장소 안에 장소, 나를 보는 나를 창조하는 평면 아닌 평면, 깊이 없는 입체...눈이 마주치면... 거기에 있는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다른 곳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이 여기에 존재한다. 내 몸, 그것은 유토피아의 정반대다. 결코 다른 하늘 아래에 있지 않은 그것은 절대적 장소이며, 말 그대로 내가 일체가 되는 공간의 작은 조각이다.”, P.28.     


"원초적인 유토피아,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유토피아, 그것은 바로 형체 없는 몸의 유토피아일 것이다.”P29.     


"몸이 장소를 점유하고 있음을 우리에게(적어도 그리스인들에게, 그리고 지금은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시체와 거울이다. 거울, 그리고 시체야말로 심층적이고 원초적인 몸의 경험에 공간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스스로를 되찾은 자신의 몸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침내 몸이 모든 유토피아의 바깥에서 자기 밀도를 온전히 가지고서 타자의 손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을 가로지르는 타자의 손길 아래서, 보이지 않던 당신 몸의 온갖 부분들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사랑 역시 거울처럼, 그리고 죽음처럼 당신 몸의 유토피아를 누그러뜨린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침묵시키고 달래주고 상자 안에 넣은 것처럼 가두고 닫아버리고 봉인한다. 그래서 사랑은 거울의 환영, 죽음의 위협과 사촌지간이다. 사랑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이 위태로운 두 형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나 사랑 나누기를 좋아한다면, 사랑 안에서 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P39     


몸이라는 부피, 그것의 무거움과 가벼움

어떤 운동이든 해 본 사람이라면 자기 몸을 저주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암벽 등반을 배울 때 난 내 몸의 무게를 실감하며 저주했다. 그래서 푸코가 29페이지에서 예를 들었듯이, 가벼운 나비를 꿈꿨고 긴팔원숭이를 부러워했으며 “요정” 같이 부피 없는 존재가 되길 바라기도 했다.      


결국, 몸의 부피와 무게는 뭔가를 하는 동안, 몸이 고통을 호소할 때만 실감된다. 마라톤을 하거나 수영을 할 때처럼. 그전까지 우리의 몸은, 그렇다, 거울 앞에서만 그 부피를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시체로. 다른 순간이 있다면, 푸코가 말했듯 섹스를 할 때이다. 누군가의 탐욕과 탐닉의 대상으로 기꺼이 내맡겨진 육체가 됐을 때, 우린 무기력감과 함께 신체를 절대적으로 체감한다. 가벼운 존재, 부피 없는 존재, 고통 없는 존재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고 달래진다. 무게와 부피가 있기에, 난 타자에게 먹이가 될 수 있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시체와 가장 가까운 순간.      


이 책에 실린 푸코의 글들은 경험적으로 수용됐다. 그러니까 머리로 독해하고 이해한 것이 아니라 푸코가 펼친 이론이 내 인생의 경험의 장에서 실천됐던 적이 있었기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앞서 말한 그 선배의 예처럼 이론과 난해함이라는 문턱 없이 전달되었는지도. 이 책에 실린 그의 말과 글은 논문이 아니라 산문 같다. 이 또한 내 경험 때문인지도.     


이 책엔 그의 연인이자 동반자였던 다니엘 드페르의 해제가 실려 있다. 이 해제를 통해 그의 두 글이 어떤 경로를 통해 세상에 나왔고 수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 과정이 의외로 흥미롭다.      


책을 펼쳤는데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서울 종로에 있는 <보안여관>이라는 곳의 한 장 짜리 팸플릿이다. 이 책을 울산에서 샀으니 아마도 울산 사람이 서울에 갔을 때 이 책을 들고 갔던 모양이다. 책의 내용과 팸플릿을 봤을 때 건축학과나 도시계획학과 학생이 아닐까?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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