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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n 13. 2024

아침, 종아리의 경련을 겪은 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31

찾고 있는 시가 있다. 애초에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 중 하나다. 첼로(어쩌면 콘트라베이스일지도)를 연인의 몸에 비유한 시를 읽은 적이 있다. 언제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게 기억이 났으면 누구의 시였는지도 기억이 났겠지. 여하간 별의별 키워드로 그 시의 행방을 추적했다. 한글로 할 수 있는 검색어의 조합을 다 해 본 뒤 영어로도 해 봤다. 유명 시인이든, 아마추어 시인이든 영어권 나라들의 시인들은 첼로를 소재로 많은 시를 쓰는 걸 알았을 뿐, 내가 찾는 시는 없었다. 그 시를 찾는 과정에서 다양한 시를 읽게 됐다. 특히 아주 유명한 시인이 쓴, 연인의 몸에 대한 시를 읽었다.      


그녀가 또한 말하기를     


                                                  D H 로렌스

    

그녀가 또한 말하기를, “왜 부끄러워하세요?

당신 셔츠 사이로 보이는

가슴을 왜 감추세요?

다리와 튼튼한 사타구니가

거칠고 털이 없을 이유가 없잖아요?

- 그래서는 나는 좋은 걸요?

부끄러워하다니. 당신은 바보, 부끄러워하는 바보.

사내들은 부끄러움을 제일 많이 타는 인간.

옷을 벗지 않으려 하거든요. 뱀이

낙엽 속으로 빠져들어가듯, 당신은 항상 옷 입기 바쁘죠.

정말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남자의 육체는 꼿꼿하고 깨끗

하고 전체가 하나의 조각이에요.

훌륭한 도구, 삽이며 창이며 노예요,

나에게는 끝없는 환희예요”

그녀는 손을 내려 내 옆구리를 눌렀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내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하기를 “당신의 몸은 훌륭한 도구!

다른 무엇과도 완전히 구별되는 개체.

주님의 손으로 만든 도구!

오직 신만이 이런 모습으로 창조할 수 있어요.

신의 손길이 당신을 창조하고 닦고

깎아 낸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당신 옆구리를 이렇게 깎아내고

젖가슴 아래에서 훑어내려

오랜, 부드럽게 닳은 바이올린 활보다 더 정교한

당신 몸의 핵심부가 있게 했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자주 쓰던

말채찍을 좋아했어요.

그걸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어요. 아버지의 일부처럼 보였

기 때문이죠.

아버지의 펜과 책상 위에 놓인 벽옥 도장도 좋아했어요.

만지면 무엇인가 내 몸에서 솟아나는 것 같았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기쁨을 느끼거든요!

내 기분을 누가 알겠어요, 그러나 틀림없이 기뻐요.

보세요. 당신은 깨끗하고 건강하고 빼어나요!

당신을 존경해요. 당신은 아름다워요. 이 허리의 깨끗한 곡

선, 이 단단함, 이 튼튼한 몸집!

상처 내어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어요.

주님의 손처럼 꼭 쥐고

갖고 싶어요, 당신을-"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의아했다.

갇히고 다친 것처럼 느끼면서,

그녀의 칭찬이 나를 자유롭게 하지는 않았다.   

  

내가 대답했다. “도구도 기구도 아니고, 하느님도 없고!

나를 만지고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저속한 짓이오.

족제비가 그 곧고 하얀 목을 쳐들 때

울타리의 족제비를 만지기 전에 두 번 생각하겠지.

당신 손이 그렇게 가볍고 쉽지는 않겠지.

공주처럼 햇볕 따사로운 곳에서 똬리를 튼 채

머리를 어깨에 얹은 채 잠자는 독사도 쉽게 만지지 못하겠지.

독사가 놀라 정교하게 머리를 쳐들었을 때

그 모습이 드물게 아름다워 보여도

또 엄청난 위엄을 갖추고 정교한 몸짓으로 달아난 것이 기적 같아도

당신은 그 독사를 쓰다듬어 주려고 손을 내밀지는 않지.

또 당신은 저 주름지고 슬픈 얼굴을 한 들판의 황소가

일어나면 무서워하지.

황소는 한자리에 박혀 선 돌기둥처럼 생각에 잠겨 슬프지만.

    

당신을 주저케 하는 것이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거요?

나에게도 이 모든 것이 다 있소.

어째서 당신은 이런 것을 대수롭게 생각하는 거요?”


새벽, 불청객

깰 때쯤 오른쪽 종아리에 쥐가 났다. 가만히 누워 다리를 곧게 뻗으려 했다. 경련이 멈추지 않았다. 종아리 근육을 늘리기 위해 베개에서 머리를 떼고 몸의 방향을 돌려 발바닥을 벽에 붙였다. 뭉친 종아리가 버텼다. 옆을 봤다. 아무도 없다. 아내는 십 분 전에 먼저 깨어 나가서 씻는 중인지 모른다. 어쩌면 거실 바닥에 두툼한 요가 매트를 깔고 똑바로 누워 허리를 풀고 있을지도.     

 

후자라면, 아내의 소중한 아침의 루틴이다. 방해하고 싶지 않다. 통증을 견디며 근육이 풀리길 기다렸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침실에선 고통을 참는 낮고 깊은숨이, 거실에선 몸이 풀리는 긴 숨이 나오고 있다. 잠시 후 경련이 멈췄다. 처음 든 생각은 ‘오늘 수영은 힘 드려나?’였다. 시계를 봤다. 여섯 시 사십 분. 오 분만 더 누워있을까 하다가 결국 나왔다. 아내가 욕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생각을 했다. 원인이 뭔지 나만의 역학조사를 했다. 어제, 평소의 화요일보다 조금 일찍 집에 왔다. 아내는 처갓집 일로 장모님을 모시고 1박 2일, 서울로 출장과 비슷한 여행 아닌 여행을 다녀왔다. 도움이 필요한 친척의 병원 및 행정 관련 서류 업무를 해결하고 내려와야 했다. 부산엔 밤이 돼서야 도착할 것이 뻔했다.


평소라면 울산 작업실에서 여섯 시에 나온다. 집에 오면 여덟 시 반. 딸이 학원에서 집에 오는 시간은 일곱 시쯤. 길어야 한 시간 반 정도 집에 혼자 있지만 아내는 살짝 걱정이 됐는지 나에게 조금 일찍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나와서 한 시간 일찍 집에 왔다. 조금 일찍 나와야 하기도 했고, 또 중요한 제안서를 주중에 넘겨줘야 했기에 작업실에서 아주 집중해서 파워 포인트 작업을 했다. 무리를 해서 그런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설마...... 저녁이 문제였나? 조금 늦은 저녁, 딸이 배고플 게 뻔했다. 간단하면서도 부담 없는 걸 먹기로 하고 돌아오는 동해선 전철 안에서 메뉴를 결정했다. 더운 채소. 조리 방법은 간단하다. 집에 있는 채소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 놓고, 집에 있는 냉동 새우를 따뜻한 물에 해동시킨 후 꼬리를 떼어내고 물기를 뺀 후 썰어 놓은 채소와 함께 비닐봉지에 넣는다. 아내가 미국에서 사 온 바비큐 용 가루 양념을 뿌리고 올리브 오일을 한두 숟가락 넣은 후 봉지를 꼭 잡고 흔들어 고루 섞는다. 이후 에어 프라이어에 잘 깔아 넣고 적당한 온도에 십 분 정도 익힌다. 덜 익었다 싶으면 3분에서 5분 정도 더 익힌다. 다 익으면 접시에 담아 시원한 맥주를 곁들여 먹으면 된다.      


벡스코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탔다. 지하철 안, 집에 있는 채소를 떠올렸다. 감자 몇 개는 싱크대 위에 있다. 냉장고에 있을 채소를 생각했다. 얼마 전 아내가 얻어온 대파도 생각났다. 밀양에 세컨드 하우스를 마련한 직장 동료가 텃밭에 가꾼 대파였다. 양파도 있고 새송이 버섯도 있다. 냉동 새우는 늘 있다. 가지가 있던가?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가지는 없었다.      


요리를 해서 딸과 함께 축구를 보며 먹었다. 요리하느라 무리를 했나? 메뉴와 냉장고 속 채소를 생각하느라 한 정거장 전에 내렸는데, 그걸 알고도 몸이 찌뿌둥해서 그냥 걷기로 했는데, 걷다 보니 집에서 배고픔을 참으며 기다리고 있을 딸 생각이 나서 급히 걸었던 게 문제였나? 그런가?     


어쩌면 지난 금요일, 감독과 함께 목포에 갔다 온 것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왕복 여섯 시간이나 차에 실려 있었으니까. 그러나 운전은 감독이 했다. 감독은 심지어 이날 저녁 집수리를 마무리해야 했고, 그다음 날엔 사촌 동생의 결혼식까지 참석해야 했다. 그렇다면 어디가 아파도 아픈 사람은 감독이어야 했는데, 화요일에 본 감독은 멀쩡했다. 이유가 뭘까?      


내가 어디 아프다거나 몸이 좀 이상하다고 얘기하면, 감독은 늘 늙어서 그렇다고 한다. 고작 나보다 한 살 어린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는데,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맞는 말이니까. 십 년 전에 없던 현상이 몸에 나타난다면 병에 걸렸거나 노화가 원인 아니겠나? 그러니 차라리 늙었다는 농담이 더 맘이 편하다. 아침에 종아리 경련을 아내에게 말했을 때 들은, “왜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지지?”와 같은 아주 심각한 말투의 걱정보다는 훨씬 더 편하다.


낯선 몸

페북 친구 중 운동 도전기를 적는 분들이 있다. 그중 나와 연배가 비슷한 사람도 두 명 있다. 이분들의, 그야말로 생전 처음 헬스장에 나가서 쇠질을 하고 PT를 받아본 후기는 고난의 연속이다. 자전거도 타고 등산도 하고 강연으로 여기저기 다니고 몇 시간 서서 하는 강의도 견뎌내는 육체를 갖고 있지만, 그 육체를 갖고 운동이라는 세계에 들어가면 여지없이 곤란함을 겪는다. 마치 오래된 자동차로 시내 도로로 출퇴근만 하다가 어느 날 고속도로에 올리자마자 못 견디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헐떡이는 엔진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일상 속에서 몸이 받는 자극이란 고작해야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가 십 초 정도 남았을 때 서둘러 뛰는 정도 아닐까? 여기에 차가운 카페인과 담배와 시도 때도 없이 마시는 술 정도...     


내 신체의 현 상태, 더 나아가 그 한계를 알기 위해선 운동을 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말이다. ‘야, 내가 이렇게 간단해 보이는 동작도 못하는구나.’하는 뼈저린 반성을 불러오는 건 낯선 운동뿐이다. 걷기나 등산이나 한가로운 자전거 타기가 아닌 그야말로 낯선 운동... 물론 그렇게 운동을 해도 신체는 노화된다. 남에게, 그러니까 의사 선생님이나 마사지사나 타투이스트에게가 아니라 그야말로 보여주고 싶고 그로 인해 찬사를 받고 싶은 이에게 보일만한 신체 상태를 유지하는 건, 그런 신체를 소유하는 시기는 아주 짧다. 이 시에 나오는 저 여자의 극찬 같은 말을 듣는 그런 시절이.


한 여자의 육체      


                                  파블로 네루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 나는 밀크!

그리고 네 젖가슴의 잔들! 또 방심(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둔덕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끝없는 내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이 흘러내리고,

피로가 흐르며, 그리고 가없는 슬픔이 흐른다.


나이를 실감할 때     

가끔 언제 나이를 먹었는지 실감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한다. 그럴 때 내가 농담 삼아하는 말이 있다. 몸매가 좋은 총각에겐 멋지다고 망설임 없이 칭찬해 주고 몸매가 좋은 아가씨를 보면 뭔가 모를 당당함과 함께 약간 주눅이 들 때라고 말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남자를 보면 부러워하고 질투했을 테고, 그런 여자를 보면 어떻게 한 번 말이라도 걸어볼 수 있을까 궁리를 했을 텐데 말이다.

     

요즘엔 수영장에서 이런 경험을 한다. 대체로 수영을 잘하는 여성 회원들은 몸이 탄탄하다. 날씬하고 마른 사람 중에 수영을 잘하는 회원이 있던가? 기억이 안 난다. 수영을 좀 할 것 같다 싶은 몸이 있다. 심지어 초급반 때부터 그런 틀을 갖고 오는 사람이 있다. 수영 선수 같은 몸을 장착하고 오는 젊은 여성 회원이 말이다. 물론 몸이 좋은 남자 회원들도 가끔 있다. 저번 달까지 헬스장에서 살았을 것 같은 그런 몸매에 달랑 수영복만 입고 들어오는 그런 젊은 남자 회원들이.     


젊음이 육박해 온다. 압도하는 기운이 있다. 건강한 몸으로 미지의 세계와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나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또래의 여자들이 다이어트다, 44 사이즈를 입겠다, 허리를 24인치를 유지하겠다면서 자신의 몸을 세상의 시선과 틀에 맞추려 할 때 그런 추세에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다른 여자나 남자에게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넓은 어깨, 벌어진 견갑골과 등 근육, 탄탄한 허벅지와 호기심 가득한 눈빛까지. 이런 사람은 초급반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입고 싶은 색깔의 수영복을 입는다. 초급반 여성 회원 대부분이 다들 남에 눈치 보느라 무늬도 없는 단색, 그것도 남색과 검정, 회색의 수영복을 입을 때, 원색의, 자기주장이 확실한 수영복을 입는다. 그건 그저 젊음의 강렬함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확신, 그 확신에 근거한 자기 발산이다.      


그 발산 앞에 움츠러들 때가 있다. 마치 갑자기 천둥 번개를 만난 초식 동물처럼. 앞서 말했듯, 어쩌면 지금보다 스무 살쯤 어렸다면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멀찍이 서 있을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 젊음과는 두어야 할 거리가 벌어진다.


적나라한 시들

로렌스의 시 같은 시는 처음이다. 비록 남자가 쓴 것이긴 하지만 여자의 목소리를 빌어 남자의 신체에 대해서 이렇게 적나라하게 말하게 하는 건 처음이었다는 말이다. 저 시를 읽는 동안 당연하게도 영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생각났다. 로렌스의 소설은 읽어 본 적 없다. 실비아 크리스텔이 나온 것이든,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요즘 버전이든 “그 남자”의 캐릭터는 비슷하다. 육체노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강인한 몸과 정신을 소유한 남자. 여자의 캐릭터는 좀 다르지만 어찌 됐든 “그 부인”이라면 “그 남자”에게 저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런 말을 들은 남자도 저 시와 같이 대답했을 것 같고 말이다.      


네루다의 시처럼, 여자의 육체를 남자 입장에서 묘사한 문학 작품이나 대중문화 콘텐츠는 많다. 말 그대로 차고 넘친다. 그러나 뭐랄까 이 시는 약간 결이 다르다. 이렇게 온탕과 냉탕, 냉정과 열정, 상승과 추락이 공존하는 건, 특히 시는 처음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그런데 이게 정직한 거 아닌가 싶다. 성적인 쾌락 뒤엔 끝 모를 울적함과 고요함이 찾아오기도 하니 말이다. 한 가지 놀라운 건 이 솔직한 시를 십 대 시절에 썼다는 것이다. 네루다는 열아홉에 첫 시집을 냈는데 그 시집에 이 시가 실렸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한 여자와 그 육체에 인생의 모든 걸 걸 때는 열아홉 살처럼, 그렇게 젊을 때뿐이다. 저 시기엔 육체를 향한 육욕과 사랑하는 마음이 마치 설탕과 소금처럼 섞여 있다. 그 두 마음이 다른 것도 알 것 같고 구분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그 구분이 쉽지 않다. 글쎄, 몇 살까지 그러려나. 어느 때가 되면 구분이 간다. 두 개를 걸러낼 방법도 터득한다. 노련해지는 건지, 냉정해지는 건지, 아니면 그저 하나의 열정이 서서히 사그라들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럴 때가 온다.


편향된 숭배, 또는 착각

페친인 이경 작가가 재미있는 글을 올렸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는 말을 겁도 없이 입에 주워 담는 글쓰기 강사들이 많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공감한다. 이런 강사들 때문에 시중에 그렇게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소위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의 본이 되는 인생을 담은, 마음을 위로하는 글귀와 백 퍼센트 공감을 자신하는 사연이 담긴, 더 나아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길 소망하는 책이 넘쳐나는 것 아니겠나?      


같은 맥락에서, 정신과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육체의 매력과 신체의 능력을 천박하게만,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로 격하시키는 사람을 혐오한다. 정신 활동의 고고함과 이성과 사고는 늙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나이 듦에 대해 긍정과 찬양 일색인 사람을 싫어한다.


그런 사람도 몸으로 살았다. 누구나 삶은 몸으로 밀고 나간다. 노동도, 운동도, 사랑도 몸으로 한다. 몸이 쇠잔해지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없는지 일일이 말해야 할까? 젊을 때, 질병과 사고로 인해 그런 처지를 겪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젊음이라는 에너지가 약한 몸에 갇혔을 때 얼마나 괴로운지를. 물론 노쇠한 몸에도 삶을 향한 열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몸이 아닌 다른 형태로 그 열정은 승화된다.     


사족 - 몸으로 하는 독서

사족이라면 사족인데, 쓰기와 읽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컴퓨터로 글을 써도 타이핑의 리듬으로 글을 밀고 나가듯,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육필이다. 페친이신 김재인 교수님이 다양한 유형의 전자책과 종이책의 근본적 차이에 대해 연재하고 있다. 난 그 글들을 읽으며 어쩌면 독서에도, 육필(肉筆)이라는 말처럼 육독(肉讀)이라는 말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라. 낱말과 문장을, 행과 단을, 페이지와 페이지를 눈으로 밀고 나간다. 손으로 짚으며 읽는다. 줄을 쳐가며 읽는다. 중요한 부분에 띠지를 붙이고 여백에 메모도 한다. 그러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읽기도 한다. 졸리면 덮은 뒤 커피를 마시며 표지를 응시한다. 뒤엉켜 질펀하게 섹스를 한 후 나른해진 육체를 무방비 상태로 보여주며 침대에 너부러져 있는 연인의 하얀 육체를 응시하며 차가운 맥주를 마실 때처럼 그렇게 한참 내 손길을 받고 있던 책을 응시한다. 육독 아닌가? 전자책과는 할 수 없는, 내 신체와 고유의 부피를 가진 책과의 엉킴...육독이다.      

....

30회가 최대 연재 분량이라고 한다. 난 최소한 일 년은 해보려 했다. 그러니까 52개...아직 말하지 못한 시인과 시가 남았다. 올 늦가을까지는 연재하지 않을까? 새로 연재 브런치북을 만들어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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