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Jun 20. 2024

불거진 푸르른 정맥 같은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32

딜런딜런 콘테스트라고 들어 봤나? 밥 딜런의 가사와 딜런 토마스의 시 중에서 유사한 테마를 갖고 있는 것을 찾아 발표하는 콘테스트다. 물론 현실엔 없다. 무려 30여 년 전 영화인 <위험한 아이들>에 등장했던 영어 선생님이 슬럼가 출신 학생들의 학업 동기 부여를 위해 고안해 낸 게임이다. 참고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미셀 파이퍼다.      


난 이 영화를 통해 처음 딜런 토마스를 접했다. 알다시피 밥 딜런의 딜런은 이 시인에게 따 왔다. 다행히 밥 딜런은 여든이 넘은 현재도 건강하게 살아 있고, 심지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딜런 토마스는 서른아홉에 죽었고 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하리     


                                      딜런 토머스


그리고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하리.

죽은 자는 발가벗은 채로, 바람과 서편 달 속의

사람과 하나가 될 것이다.

그들 뼈가 깨끗이 추려지고, 그 깨끗한 뼈들이 흩어진 후에는,

그들의 무릎과 발은 별들로 장식될 것이다.

비록 그들은 미쳐 갈지라도 정신은 맑을 것이며,

비록 그들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더라도, 다시 떠오를 것이며,

비록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지라도, 사랑은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하리.     


그리고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하리.

넘실거리는 파도 아래

오래 누운 그들은 바람처럼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형틀에 묶이고, 고문대에서 힘줄이 끊어져

몸부림치더라도, 그들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손 안의 믿음이 두 동강 나고,

유니콘 악마가 그들을 휘젓고, 모든 것이

찢겨 나갈지라도, 그들은 꺾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하리.     


그리고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하리.

해안에서 더 이상 갈매기 울음소리와

큰 파도 소리가 그들 귀에 울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이 몰아치는 빗줄기에

고개를 더 이상 꼿꼿이 들 수 없다 할지라도,

비록 그들이 미치고 분명히 죽었다 할지라도,

그들 영혼은 데이지 꽃을 뚫고 솟아오를 것이다.

태양이 부서질 때까지 태양 속에서 부서져라,

그리고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하리.


강렬하다는 표현은 진부해졌다. 열정이라는 말은 여름철 축제의 광고 문구로 팔렸다. 가슴이 뛴다는 말은 자잘한 흥분을 표현하는 말로 남용되면서 하찮아졌다. 이 시는 저 진부한 형용사로 찬사 받아 마땅하다. 어쩌면 이 시가 저 죽은 형용사들에게 생명을 줄 지도. 저렇게 저잣거리에 나뒹구는 형용사들을 거부하려나?


그 선언은 내 것이 아니다.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한다는 영어 원문은 “Death no more hath dominion over him.”에서 따왔다. 이 구절, 로마서 6장 9절에 있다. 전체 원문과 그 번역은 이렇다.      


“Knowing that Christ, being raised from the dead, dieth no more; death no more hath dominion over him.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다시 죽지 아니하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성경 본문 후반에 나오는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를 평문으로 번역한 것이 “죽음은 우릴 지배하지 못하리(And death shall have no dominion).”다. 뭔가 어긋남이 느껴진다. 예수는 죽음을 이겨낸 자다. 부활한 자다. 그러니 당연히 죽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이기에 죽음은 그를 지배할 수 없다. 죽음의 초월자이자 생명의 근원자이다. 이 선언은 그에게 합당하다.     


우리에게도 합당한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무력하다. 칼날에 베이고 총알에 관통당하며 질병 앞에 쓰러지고 세월과 함께 늙고 죽는다. 죽음은 우리를 지금 이 순간에도 지배한다. 죽음은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유령처럼 나와 동행한다. 두려운가? 두렵다. 이 사실, 이 자명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당연히 두려워한다.


어쩌면 모든 철학은 이 자명한 사실, 죽음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 그 처지를 인식한 이들이 그 두려움 끝에,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죽음을 어떻게 모른 척하며 이 삶을 살아낸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산 자만이 이겨낼 수 있다.

다 그런가? 다 두려워하나? 예고된 죽음을 모르는 사람과 그걸 알고도 기꺼이 죽음과 동행하며 그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를 기꺼이 타고 넘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죽음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린 사람들이다. 어린이에게도, 십 대에게도, 어쩌면 청년에게도 죽음은 먼 이야기다. 조부모의 죽음이나 친구의 부모님의 장례식에 갈 나이가 될 때까지 죽음은 먼 이야기다. 부모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중년, 친구의 죽음을 맞이하게 노년이 되어가면서 죽음은 그늘 속에서 걸어 나온다. 무지의 그 깊은 그늘 속에서 말없이 걸어 나온다.      


후자의 사람들은 죽음을 이웃하며 산다. 레드불 팀의 수많은 클라이머와 스턴트맨, 레이서와 파일럿들이 그렇다. 프리솔로 클라이머들은 죽음을 로프처럼 동반하여 벽을 오른다. 그들은 죽음과 눈을 마주친다. 피핑 톰처럼 곁눈질을 해야만 나타나는 죽음이 아니다. 그들은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여 산다.      


우리는 대체로 이도저도 아니다. 알 돼 모른척하면서 사는 사람에 속한다. 오늘의 즐거움과 내일의 희망으로 죽음의 예감을 물리친다. 사는 동안 겪는 고난 속에서도,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도 끝내 죽음을 떠올리지 않는다. 운명이 죽음 같은 불행을 가져와도 버텨낸다.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살아낸다. 시인은 우리에게 그러라고 명령한다.


산 자만이 이겨낼 수 있다. 죽음에 두려움을, 예정된 이 삶의 끝이 던지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죽은 자에겐 공포가 없으니, 오직 산자에게만 허락된다. 용기가, 거듭되는 절망에도 내일을 살아내리라 다짐하며 기꺼이 죽음 같은 잠을 청하며 두 눈을 꼭 감을 수 있는 용기가. 오직 그 용기가 산 자에게만 허락된다.      


햇빛 들지 않는 곳에 빛이 비치네


햇빛 들지 않는 곳에, 빛이 비치네,   

바닷물 흐르지 않는 곳에, 가슴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오네,

그리고, 좌절한 유령들은 머리에 반딧불을 달고,

그 빛과 함께

뼈밖에 남지 않은 살 속으로 지나가네.     


양 허벅다리 사이의 촛불이

젊음과 씨앗을 데우고, 늙음의 씨앗을 태워버리네,

씨앗이 메마른 곳에,

젊음의 열매가 별들 속에 뻗어 나네,

무화과처럼 빛나며,

밀랍이 소진되면, 양초는 심지를 보이네.    

 

새벽은 우리 눈 뒤에서 밝아오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가 물결치며

바다처럼 흐르네,

담과 장벽으로 막힘이 없이, 하늘에서 분출되며

몸 끝까지 도달하네

기쁨 속에 눈물의 기름을 발견하며.


밤은 하늘 위를 도네,

마치 칠흑의 달처럼, 저 하늘 경계까지,

한낮의 빛은 뼈를 비추네,

추위가 없는 곳에서는, 살을 에는 강풍이

겨울옷을 벗기네,

봄의 옅은 기운이 눈꺼풀에 매달려 있네.     


빛은 비밀스러운 공터에 비치네,

생각의 저 끝부분, 생각들이 빗속에 냄새를 풍기는 그곳에,

이성적 사고가 죽을 때,

흙의 비밀은 우리 눈을 통하여 자라고,

그리고 피는 햇빛 속에서 약동하네,

새벽은 쓰레기 야적장 위에 멈추네.


불거진 혈관처럼

결국 삶은 동사다. 생각 이전에 오는 것들이다. 밤의 사색을 물리치는 공포다. 새벽이 올 때까지 빠져 있는 연인의 몸이다. 밀려오고, 지나가고, 데우고, 태우고, 뻗어나간다. 흐르고 분출하고 도달한다. 옷을 벗기고 냄새를 풍긴다. 살아 있는 자만이 피를 흘린다. 상처를 입는다. 밤을 지날 수 있다. 새벽을 맞을 수 있다.


발표 당시, 둘째 연이 외설적이라고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그리 보인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다. 원래 사람들은 당연하고 자명한 말을 불편해한다. 허벅지 사이의 것이 식어버린 젊음을 다시 데우고 늙음의 씨앗을 태워버린다. 그 사이의 것이 타자로 인해 뜨거운 용도를 회복할 때 회복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어차피 양초처럼 그것도 다 탄다. 그러면 회복할 것도, 회복될 것도 없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건, 죽음을 잠시 등지고 해야 할 건 바타유가 말한 “작은 죽음”을 향한 돌진이다.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기원이자 시발점인 성 본능 속에 주어졌다는 사실로 인해 인간에게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되며, 그 앞에서 인간은 공포에 휩싸일 뿐이다. 그러한 공포 상태가 ‘작은 죽음(petite mort)' 속에 주어진다. 내가 그 ‘작은 죽음’을 온전히 겪을 수 있을까? 최종적 죽음을 미리 느껴 볼 수 있을까? 발작적인 쾌락의 폭력이 나의 심장 깊숙한 곳에 있다. 동시에 그 폭력은-나는 지금 이 말을 하면서 전율한다. - 죽음의 심장이다. 그것이 내 안에서 열리고 있다”, 조르주 바타유, <에로스의 눈물> 중에서.     

서른아홉에 죽었다. 당연히 무슨 문학상을 받은 적도 없다. 그의 시는 방금 섹스를 끝낸 남자의 팔뚝 위로 불거진 푸르른 정맥 같다. 여자의 날카로운 손톱이 스치면 터져버릴 것 같은 그 정맥. 약동하고 부풀어 오른 삶의 순간, 그 뒤에 찾아오는 깊은 심연이 하나의 시에 공존하다. 희망만 말하지도 절망만 말하지도 않는다. 취할 때의 기쁨과 깰 때의 후회가 공존하는, 그가 평생 절어 살았던 술처럼 우리의 인생 안에도 그렇게 명암이 공존한다는 걸 돌려서 말하지 않고 욕설처럼 내뱉는다. 왁, 하고 소리 지르는 느낌이다. 순수하다. 거칠다.      

고생도 했지만 인기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 다만 문학계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여하간 술을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영국 웨일스 사람이다. 기성용이 선수 시절 머물기도 했던 스완지 출신이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죽었다.           


딜런 토마스의 시집을 찾아봤다. 두어 권 출간 됐는데 지금은 구하기 어렵다. 영미대표고전시라는 책에 두 편 정도 실려 있다. 그의 시를 읽을 수 있는 시 관련 게시판이나 사이트는 예전부터 있었으나 번역이 너무 예스러워 읽기 어려웠다. 이 번역은 영어권 나라에서 오래 살고 미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한 블로거의 번역이다. 이 번역이 맘에 들어 여기 그 링크를 올린다. 영미권 시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https://blog.naver.com/yoonphy     

이전 01화 아침, 종아리의 경련을 겪은 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