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92
사랑하는 이의 웃음은 태양 아래 마개를 연 환타 한 병처럼 세상을 오렌지 빛깔로 만든다. 분명 두 사람 위를 지나간 것은, 기상청의 예보를 바꾸고 갑자기 자신의 항로를 만들며 나타난 태양이다. 탄산수 한 병이 분무기처럼 뿌려대는 입자의 우주 속에 물처럼, 빛처럼 나타난 태양. 삶은 곧 파괴될 것을 알면서도 영원히 그것을 응시하며 웃고 싶다. 모든 장애물을 걷어내고 자신의 날씨를 찾게 된 순간에, 일상의 작은 문으로 들어서는 그 놀라운 순간에 대한 감사를 간직하지 않았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 서동욱,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P.11.
짧고 아름다운 한순간이 있고, 남은 삶은 그 한순간의 조명(照明)을 받고서만 모습을 나타낸다...... 최고의 순간은 그 자체로 충족적이다. 그 이후에 흘러가는 시간은 바로 이 순간의 의미를 지키고 또 반복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pp. 284~285
만일 과거의 빛나는 한순간이 지금 순간에 개입해서 더할 나위 없이 의미 있고 소중한 현재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벤야민의 말을 빌려 현재의 모든 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오는 작은 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순간은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사건으로 변화한 채 다가오기에 우리에게 현재는 늘 새롭고 유일무이하다., P.290
(사랑한다는 말은) 나날의 성사(聖事)로서 우리 사이에 귀중한 관계를 만든다. 성사의 의의는 시행되는 데 있지 이해되는 데 있지 않다., P199
우리는 나이가 든다. 세월이 삶을 실컷 갈아먹은 뒤 긴 숨바꼭질 놀이를 끝내듯 마주친 너는, 어느 처연한 겨울 앞자락에 선 듯 한두 점 하얀 깃털을 머리카락에 얹은 채 축제일의 밤처럼 환했던 지난 시절의 거리들을 쓸쓸하게 만든다. 거기서 우리는 웃고, 즐거웠지. 약속들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갔는가? 무엇인가 아까운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으나, 지난 세월은 번잡한 거리에 쏟아진 금화들처럼 흩어져 이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제대로 알기 어렵다. 삶은 쇠락한다., P.291
축제는 언제나 새로운 사건으로 찾아온다. 그것이 축제의 시간, 반복의 본질이다. 반복은 이미 존재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는 반복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축제가 있는 것은 축복이다. 축제는 인간이 하루하루를 잃어가며 늙어가는 운명을 벗어나 매번 새로 태어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축제 속에서 삶은 되찾을 수 없는 시간으로 추억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실현된다. 우리가 설레는 마음으로 축제를 기다린다면, 축제가 시작과 삶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PP322-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