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시를 좋아하게 됐을까? 시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건 언제였을까? 짐작 가는 시절이 있다. 혼자서 검정고시와 대입을 준비하던 때였다. 학원도 안 다녔고 가르쳐줄 선배도, 형, 누나도 없었다. 서점에서 좋다는 참고서를 사 와 혼자 살던 월세방에서 공부를 했다. 오래된, 80년대 복덕방이나 전당포에서나 썼었을 법한 낡은 철제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다. 공부를 하다 잠이 오면 후드티를 입은 채로, 아무것도 깔리지 않은 방바닥에 누워 쪽잠을 청했었다. 후드를 둘러쓰고 캥거루 포켓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똑바로 누워서 말이다. 그 시절 입었던 회색 후드티를 아직도 갖고 있다.
그렇게 혼자 공부를 하던 시절, 국어 참고서에 실린 시 몇 편이 좋아서 반복해서 읽곤 했다. 이육사 시인의 이 시도 그런 시 중 하나였다. 다른 시보다 훨씬 짧았다. 그러나 웅장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뭔가 남성적이었다. 요즘의 것에서 적당한 비유를 찾자면 마치 <반지의 제왕>이나 <트로이> 같은 영화 같았다고나 할까? 이 시의 참뜻이라면 참뜻이 희미하게나마 마음속에 떠오르게 된 건 훨씬 뒤의 일이었다.
가슴을 울린 광야
지구에 발을 딛고 사는 민족 중에서 초인과 귀인을 기다리며 인내해 온 민족을 꼽으라면 유대 민족과 함께 한민족이 꼭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이 좁은 땅 위에서 수천 번의 크고 작은 외침을 겪었고, 또 우리들끼리도 선을 그어놓고 네 땅 내 땅 하며 싸우던 시절들이 많았으며, 근현대사에 이르러서는 네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다며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도 총부리를 들이대고 서슴없이 죽창과 낫을 휘둘렀지 않았던가?
그렇게 피의 절규와 절망의 통곡이 고향과 이웃과 내 마음을 휩쓸고 지나갈 때, 끝끝내 이 모든 걸 끌어안아 한으로 삭인 뒤 새로운 희망을 품고 살게 했던 힘은, 가슴 깊숙이 품은, 언젠간 좋은 날 오리라는, 그날을 속히 오게 할 그 사람이 올 것이라는 희망 아니었을까? 조선 시대, 정감록을 그렇게 믿었던 것도, 힘들 때마다 미륵 신앙이 유행했던 것도, 심지어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와 군사정권 시대에도 예언자와 선지자를 사칭한 교주와 그들이 만든 이단과 사이비 종교가 쉴 새 없이 등장했던 것도, 그 희망의 변주 아니었을까?
그 희망에 번번이 배반당하면서도 끝끝내 이 모진 삶을 살아냈던 힘은, 역설적이게도 그 희망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 아닐까? "저번은 진짜가 아니었다. 다음번엔 진짜 메시아가 올 것이다. 저기서 나타났다는 예언자는 가짜다. 거기서 무슨 예언자가 나오겠느냐. 난 다른 땅에 기대를 걸어볼 것이다."
그렇게 그 귀인과 초인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탓을 자신의 성급한 기대와 기운이 안 좋은 땅과 몽매한 무리의 탓을 하면서, 진리를 깨닫고 참을 구분할 줄 알며 귀인과 초인의 기운을 알아챌 만큼 정진을 하면, 좋은 터, 좋은 때에 거기 있다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다시 희망의 끈을 동여매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희망을 버리지 않은 이에게 귀인과 초인은 왔는가? 거친 광야에서 기다리던 그는...
광야에서
문대현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의 피 울음 있다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
교정에서 만난 광야
대학에 와서 이 노래를 들은 후 <광야>가 더 이해 됐다. 90년대 중반이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저 노래는 1984년에 만들어졌다. 성균관대의 노래 동아리인 <소리 사랑>의 멤버였던 문대현이 만들어서, 그곳에서 가장 먼저 불렀다고 한다. 참고로, 찾아보니 문대현은 성균관대 무역학과 82학번이다. 이후 80년대의 각종 시위 현장에서 <아침 이슬>과 함께 사랑받았고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고 인기를 끈 것은, 내가 사랑하는 버전인 안치환의 버전이다.
그렇다. 난 이 노래를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안치환, 그리고 김광석의 노래로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이중 이 노래의 대중적 주인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안치환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그가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본 후부터다. 96년인가, 97년이었다. 이미 군사정권 시절의 엄혹함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그래서 노동 현장과 시위 현장에서, 또 대학가에서 사랑받았던 노래 운동가들이 다른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뒤늦게 들어간 대학에서 맞은 두 번째인가 세 번째 축제였다.
1995년,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를 등교 거부까지 동원하며 겨울방학 직전까지 몰고 갔던 소위 운동권 학생들이 장악했던 학생회는 오히려 이 시위로 인해 신임을 잃어 그다음 해부터 총학생회와 각 단과대 학생회의 자리는 비운동권 학생들이 차지했다. 그렇게 학교 안팎으로 변화의 물결이 몰려오던 그때, 1996년 그 해, 또는 그 이듬해, 5월, 축제의 초대 가수로 안치환이 왔었다. 기억이 생생하다. 주점을 운영하는 학과와 동아리들의 천막으로 가득 차 있었던 운동장 일부가 무대랍시고 비어 있었다. 객석도 없었다. 좋게 말하면 스탠딩 콘서트였다. 당연히 이렇다 할 무대 세트도 조명도 없었다. 무대를 대신한 건 운동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스탠드 석 위의 단상이었다. 조회 시간 때마다 교장 선생님이 말씀을 하시던 곳과 닮은.
안치환은 그런 무대에 올랐다. 기억이 맞는다면 밴드도, 코러스도 없었다. 혼자서 기타 하나 메고, 작은 스피커를 앞에 두고 무대에 올랐다. 무슨 노래를 했더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불렀다면 97년이었을 것이다. <솔아 푸르른 솔아>도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 <광야에서>도 불렀을 것이다. 난 들은 기억이 있다. 이 노래 아니면 또 뭘 불렀겠는가?
그 노래는 시대에 맞지 않는 노래였다. 우리는 이미 <동물원>과 <전람회>의 달짝지근함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국적 없는 음악에 젖어 있었다. 민족이나 민중, 진보와 개혁, 민주주의와 마르크스는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동구권이 무너진 뒤의 시대, 우리는 김우중 회장의 말처럼 먹고 살길을 찾아 나라의 문턱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장 노동자의 애환을 담은 <사계>나 <광야에서>와 같은 노래가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아침이슬>도 전설이 되었다. 우리는 과일 이름과 알파벳이 최초로 붙은 특별히 구별된 세대 아니던가? 오렌지 족과 X 세대. <코요테>와 <DJ DOC>, 그리고 김건모와 함께 거품의 시대를 넘어가고 있었다. IMF 직전의 그 거품 같은 시절을,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앞과 엘리베이터 안에도 승무원 같은 여직원이 타서 고객을 맞아주던 그 시절을.
그의 광야
이육사 시인의 <광야>가 언제 쓰였는지 모른다. 그의 유고 시집은 해방 직후, 그의 동생이 엮어 냈다고 한다. 이 유고 시집엔 삼십 여 편의 시가 실렸다. 양이 적다. 이중 <광야>는 언제 쓰였을까? 그는 시인이자 군인이자 무장 투쟁가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육사 1기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으려나? 그 시기, 어느 공간, 어쩌면 공부를 하고 독립운동을 하던 북경이나 상해에 썼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막 투쟁을 펼쳐나가던 20년대, 대구에서 썼을지도 모른다. 공식적인 등단은 1930년 즈음으로 보고 있으니, 시는 해방의 조짐이 전혀 안 보이던 30년대, 어느 해에 써졌을지도 모른다.
이육사 시인의 <광야>와 안치환의 <광야에서>의 사이엔 어림잡아도 50여 년이 넘는 세월의 강이 흐른다. 그리고 또, 1984년과 지금 사이엔 40년의 시간이 흐른다. 내가 이 노래를 어느 5월에 들은 뒤로도 30여 년이 흘렀다. 그 광야에서의 기다림은 끝났던가? 이육사 시인의 광야(曠野)는 단순히 넓은 땅(廣野)이 아니다. 여의도 광장 같은 그런 땅이 아니다. 그 땅은 텅 빈, 그 끝과 시작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고 황량하며 길들여지지 않은 땅이다.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과 같은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점은 가나안은 이미 축복으로 가득한 땅이기에 찾아가기만 하면 되지만 그 광야는 채워져야 한다는 점이다. 누군가에 의해, 무엇으로든. 그때까지 그 거친 야성의, 미지의 땅에 사는 이들은 희망을 붙자고 기다려야 했다.
누구를? 시인이 기다렸던 초인은 누구였을까? 구세주? 메시아? 선지자? 혁명의 리더? 아직 오지 않았다. 그걸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왔다는 이야기인가? 이 땅은 자유와 부유함이 차고 넘치는데, 이러한 오늘의 조국의 현실이 그가 기다리던 초인에게 기대하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나라가 잘 돌아가고 있다고 연일 뉴스에서 나오던 그 시절에도, 누군가는 피 끓는 목소리로 <광야에서>를 불렀다. 그리고 거품이 일렁이던 90년대에도 그 노래는 여전히 사랑받았다. 시와 노래가 염원하던 민족의 공간과 나라는 완성이 됐을까?
광복절을 코앞에 두고 나라가 시끄럽다. 이 글을 업로드하는 날, 광복절 기념식은 두 개로 쪼개져 열렸다. 그들이 기다렸던 미래와 우리가 기다렸던 미래가, 그들이 기다렸던 바라마지 않던 나라와 우리가 염원했던 나라가 다른 것인가? 나와 그대가 기다렸던 초인과 귀인은 다른 사람이었던가? 나와 그대가 꿈꿨던 나라는, 21세기 이 땅, 이 나라의 모습은 그렇게 달랐던가? 안치환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인의 기다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안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