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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ug 22. 2024

이제야 읽히는 말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41

작은 꽃들아, 이상한 빛들아  

   

                           이성복     

작은 꽃들아

얼굴을 돌리지 마라

나는 사람을 죽였다

작은 꽃들아, 아무에게도

이 말을 전하지 마라

나는 너희처럼 땅에 붙어 살

자리가 없어 그 자리,

내 스스로 빼앗은 자리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작은 꽃들아, 내말은

그의 피 속으로 들어갔구나

작은 꽃들아, 푸른 구멍으로

솟아난 이상한 빛들아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 검은 산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은

흘러내린다 옷만 있고 몸뚱이가 없다

마라, 나는 너의 허리를 감는다

살아 있느냐고, 살아 있었느냐고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눈먼 바람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낮은 하늘 네 눈동자 속으로

빨려드는 것이다 마라,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검은 돌로 쌓은 장방형의

무덤에서 마지막 영생의 꿈에 붙들리는

것이다 눈먼 바람이 우리를 찢을 때까지

찢기는 그림자를 향해 절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

살기 위해선 타자의 자리를 점유해야 한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그 자리를 빼앗아야 한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윤리는 여기서 출발한다.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야생의 논리가 이 이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람의 세상에도 준열하게 적용된다. 다만 곱게 포장될 뿐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이게 내가 사는 것인지, 세상이 나를 휘두르는 것인지, 토네이도에 휘말린 얄팍한 텐트처럼, 그 바람의 외곽을 따라 속절없이 돌고 도는 지상의 파편들처럼 세상의 바람에 휘말려 날아다니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이 부유(浮游)함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항로 없이 떠도는 표류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그 끝은 어디인가? 그 끝에 “나”는 남아 있을 것인가? 어쩌면 그 마지막 날에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나의 파편 아니겠나? 그 파편 밖에 안 남은 내가 내 파편을 볼 수나 있겠나? 결국 내 생의 잔해를 수습하는 건 남은 이의 몫이겠지. 그러니, 역설적이게도 우린 그 끝의 도래를 두려워말고 살아보는 수밖에.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그리움은 몸이 없어

눈이 내린다  

   

눈은 내리기만 한다     


눈이 쌓인다

몸은 그리움을 몰라

눈이 쌓인다     


눈은 쌓이기만 한다


남겨진 것들

살면서, 살아가면서 뒤를 남긴다. 공간과 시간의 저 뒤편에 남기고 또 남긴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으로 남을지, 무엇이 그리운 것이 될지, 무엇이 평생의 후회가 될지 모른 채 우리는 끊임없이 남기며 앞으로 간다. 뒤에 두고 온 것들엔 이름이 없다. 형태도 없다. 어디로도 갈 수도 없다. 그저 뒤편의 어딘가에 있을 뿐이다. 다락방이나 지하실에 쌓아놓은 옛 물건처럼, 책 더미처럼 그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다.      


이름 없는 것들이, 형태 없는 것들이 오늘, 소나기처럼 나타난다. 눈을 타고, 비와 함께, 갑자기 눈길을 사로잡은 어느 꽃과 함께, TV에 나오는 흘러간 옛 영화와 함께. 호명된 기억과 사물은 일상의 조명 앞에 불려 나온다. 이름도 없는 것들, 입도 없는 것들, 눈도 코도 없는 것들이 틀을 갖춘다. 마치 눈사람이 만들어지듯 추억의 격을 갖춰간다. 그러다, 눈사람이 사라지듯 사라진다. 날 붙잡지 못하는 눈사람. 애니메이션 <스노우맨>의 오프닝과 마지막 장면은 뒤에 남겨진 것은 오늘 어떻게 부활하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어른이 된 뒤에도 종종 스노우맨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찾아오지만 녹아버린 눈사람처럼 사라진다.      


추억은 다시 “더미”로 돌아간다. 형태 없는 눈 더미.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는 그 더미. 출근길과 퇴근길에 방해나 되지 않을까 싶은 그 더미. 일상의 갓길에 쌓인 형체 없는 것들. 다시 형체가 될 때까지 우리는 또 그렇게 뒤에 남긴다. 살아가는 동안 남긴다. 남기고 또 남긴다. 무엇이 그리운 것이 될지, 무엇이 평생의 후회가 될지, 심지어 내가 남긴 무엇이 누군가에게 그 무엇, 상처나 추억이나 원한 같은, 그 무엇이 될지도 모른 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채.


그것들 한번 보려고


서울 매제가 일하는 병원에 어머니 입원시켜

드리고 차를 몰고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설 때

눈앞에 돌연 겨울 흰 꽃들, 나무도 갈대도 가시

덤불도 설화석고다 산호초처럼 움직이는 그것들

너무 아름다워...... 그것들 한번 보려고 사람은

사는 것이다 그것들 한번 보고는, 오줌 눈

뒤처럼 몸 부르르 떠는 것이다, 겨울 흰 꽃들


전율

살면서 만난다. 만나면서 산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니 묵묵히 살아간다. 눈 크게 뜨고 입 크게 벌리고 콧구멍 벌름대면서, 피부와 혀와 입술과 머리카락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그렇게 살아간다. 권태는 무감(無感)에서 오는 것이지 반복과 일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무료함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 아침, 아내의 출근 옷차림이 어제와 달랐다. 평소라면 여름 니트에 가벼운 기능성 소재의 바지를 입었을 텐데, 오늘은 가벼운 천연 소재의 원피스를 입었다. 어디 가나, 하고 물었다. 외근이 있다고 했다. 남자 만나는 건 아니고, 하고 농담을 던지니, 에이그 이렇게 티 내고 나가겠나, 하고 받아친다. 아내의 향수 향기가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가벼운 전율이다.     


전율은 공포와 환희의 반응이다. 부르르 몸을 떨리게 하는 것이다. 살면서 몇 번이나 느낄까? 온몸에 소름이 돋는, 이러다 죽을 것 같은 그런 전율을. 감각이 열려 있지 않으면 전율은 오지 않는다. 뭘 하든, 그거 별 거 아니다, 그거 해 봐야 별 거 없다고, 그 느낌 잘 안다고, 그렇게 뭐든 기대 없이 하고 그 경험을 어제의 척도로 받아넘겨 버리면, 관성으로 타성으로 하는 이에게 전율은 없다. 그야말로 목석같은 존재, 좀비. 예고 없이 만난 눈발에도 몸이 떨리는 사람, 그런 삶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이제는 힘이 빠진 날벌레를     


어떤 밤에는 달이 하도 밝아

이부자리 거꾸로 하고

달을 보며 잠이 들었다

밤중에 목말라 깨면

아내는 달빛을 받고 있었다

달빛은 금실 은실

잠든 아내를 에워싸고

이제는 힘이 빠진

날벌레를 거미가 지키듯이,

나는 숨결도 없는

아내를 오래 바라보았다


여운, 음미

예민하던 사람도, 모든 감각이 열려 있어 세상의 변화를 고통스러우리만치 고스란히 받아들이던 사람도 나이가 든다. 나이가 들면 무뎌진다. 그러나 오해 마라. 무뎌지는 것은 감각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변한 것이고, 그 감동을 안으로 받아들여 음미하는 방법을 깨닫게 된 것일 뿐이다. 감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받아들이는 방법이 변할 뿐이다.      


요란스럽지 않게 호들갑 떨지 않으면서 받아들일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은근히, 천천히, 느리게, 서서히, 맛을 보기 전에 입맛을 다실 줄도 알고, 맛을 본 이후엔 점점 사라지는 여운의 마지막 꼬리마저 붙잡아 음미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감각은 더 넓고 크게 열어 세상을 받아들인다. 심지어 그 열고 닫음도 조절할 줄 알게 된다.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당연히 감사함도 늘어난다.     


나이가 들수록 꽃을 보고 달을 보고 산을 보고 강을 보게 되는 것은 그것들의 진면모를 이제야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 전하는 감동을 이제 좀 헤아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바다를 보자마자 허겁지겁 뛰어들던 시절엔 몰랐던 것이다. 바다의 이야기는 커다란 통창이 있는 카페 안에서 수다를 떠는 동안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연인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탐하던 시절엔 보이지 않았다. 그 곡선, 그 힘줄, 파르르 떨리는 살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허기진 사람처럼 덤벼들 땐 흐르는 땀도, 작게 들리는 신음도, 아득히 먼 곳에서 오는 듯 한 눈빛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부르르, 파르르, 떨리는 너와 나, 그리고 세상의 그 진동과 전율이.


2003년 6월 27일에 나온 초판을 샀다. 그러니 그 해 언제쯤 샀을 것이다. 2003년이면 카피라이터 일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어디 가서 월급이라고 말도 못 할 돈을 받으며 일을 할 때였다. 그래도 그 일이 좋아서 더 잘하고 싶어 이런저런 책을 사들여 읽었다. 아마, 그때는 저 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 시집을 냈을 당시의 시인의 나이가 되어서일까? 이제 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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