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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Aug 29. 2024

삶은 우리를 속인 적이 없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42

걷고 싶다.  

   

                         김이나  

              

이런 날이 있지 물 흐르듯 살다가

행복이 살에 닿은 듯이 선명한 밤

내 곁에 있구나 네가 나의 빛이구나

멀리도 와주었다 나의 사랑아     


고단한 나의 걸음이 언제나 돌아오던

고요함으로 사랑한다 말해주던 오 나의 사람아    

 

난 널 안고 울었지만

넌 나를 품은 채로 웃었네

오늘 같은 밤엔 전부 놓고 모두 내려놓고서

너와 걷고 싶다 너와 걷고 싶어

소리 내 부르는 봄이 되는 네 이름을 크게 부르며

보드라운 니 손을 품에 넣고서     


불안한 나의 마음을 언제나 쉬게 했던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거야

말해주던 오 나의 사람아     


난 널 안고 울었지만

넌 나를 품은 채로 웃었네

오늘 같은 밤엔 전부 놓고 모두 내려놓고서

너와 걷고 싶다 너와 걷고 싶어

소리 내 부르는 봄이 되는 네 이름을 크게 부르며

보드라운 니 손을 품에 넣고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일요일 저녁이었다. 일요일 오후엔 세 식구가 대대적으로 공부방 정리를 했다. 화요일에 아이의 책상이 들어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맞은 저녁, 가볍게 치킨으로 저녁을 대신하며 돌아가고 싶은 시절의 이야기가 나왔다. 발단은 공부 이야기였다. 젊은 시절 너무 많은 시험을 봐야 했던 아내는 그 뒤로 공부가 질려 책을 거들떠도 안 본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마치 책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 말에 나도, 딸도 웃었다. 아내는,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대학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고 했다. 내가 말을 받았다. 난 그때가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없다. 지금이 내 인생 최고로 행복한 시절이다. 이 보다 더 행복한 적이 없었다. 다만 이 행복에 내가 기여한 부분이 얼마나 되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 종종 불안할 뿐이라고.     


언젠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 여전히 차도 없고 통장은 가벼우며 전화로 불러내어 술 한 잔 마실 친구도 없는 삶이지만 현재가, 지금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늑하고 온화하며 여유로운 시기다. 이 이상 더 욕심을 내면 벌 받을 것 같은.    

  

다른 무엇을, 현재 내가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내가 바라는 무엇을 갈망하면 안 될 것 같다. 여기서 더 뭘 바라면 벌 받을 것 같다. 이보다 더 좋은 시절이 없었는데 도대체 뭘 더 꿈꾸는 건가, 하고 책망을 받을 것 같다.      


반대로, 내가 원하는 뭔가를 다 이루고 다 가졌다 할지라도 내 눈앞에 아내와 딸과 이 아늑한 공간이 없다면 행복은 없을 것이다. 읽어야 될 책과 해야 될 일과 일주일에 네 번 정도 가는 수영장과 수영이 없다면 행복한 삶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꿈과 행복의 관계

얼마 전 딸과 대화를 하다 꿈 이야기가 나왔다. 딸은 종종 행복한 상상, 자신에게 행복한 느낌을 주는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고 했다. 그런 모습 중 압도적인 것은 변호사나 교수 같은 모습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그랬다. 행복은 계획하고 상상하던 것에 오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말이다. 말을 덧 붙였다.      


아빠가 찍힌 사진 중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뭔지 아냐고 물었다. 딸은 모른다고 했다. 네가 서너 살 때였을 것이다. 남천동에 벚꽃이 한창일 때 우리 가족이 꽃구경을 간 적이 있다. 그때 널 목마 태우고 걸었는데, 네가 아빠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밝게 웃으며 나뭇가지 끝에 달려 있는 벚꽃을 따려할 때, 그 모습을 엄마가 찍었다. 그리고 그날, 남천동 삼익비치 아파트의 산책로 방파제에 앉아 너와 내가 마주 보며 웃는 모습을 엄마가 찍어줬다. 아빠는 그 모습이 아빠의 행복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리 말해줬다.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모습을, 너를 낳기 전엔, 결혼하기 전엔, 이십 대 때엔, 더 어렸을 때엔, 상상한 적이 없다.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빠가 젊었을 때 상상했던, 꿈꿨던, 날 행복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미래의 내 모습이 지금과 같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지금 행복하다. 행복은 내 상상 밖에서 오는 것이다. 네가 상상한 너 자신을 이루는 건 성취일 뿐이다. 행복은 네 계획과 상상 밖에 오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딸에게 말해줬다.      


조용필의 신보가 나온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들은 후, 아내와 나는 이런 앨범은 꼭 사야 한다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짐했다. 실행력 좋은 아내가 예약 구매를 했고, 신보는 나오자마자 우리 집으로 배송 됐다. 다 좋았지만 난 이 노래가 좋았다. 반복해서 들었다. 들을 때마다 울컥했다. 이 노래에 사연이 있나? 검색을 해 봤다. 먼저 하늘로 간 아내를 향한 그리움이 담긴 노래라는 걸 알았다.      


그 그리움이 소박한 바람에 담겨 있다. 그렇다. 별 거 아닌 바람이다. 상투적인 표현, 그 표현을 상투적이지 않게 만들 몇 안 되는 사람이기에, 그 표현을 빌려 와 말하자면 우리나라 최고의 가왕이자 대중문화의 살아 있는 전설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고작 “걷고 싶다.”라고 한다. 그저 손을 잡고 걷고 싶다고 한다. 그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걷고 싶을 뿐이다. 다 이룬 사람이고 다 가진 사람이지만 함께 걸었던 사람이 곁에 없기에 행복은 한 걸음 물러나 있다. 그저 단순히 상상하고 꿈꾸는 바람이 아니라 경험했고 누렸던 행복의 소환을 염원한다. 불가능한 염원이기에 더 간절하고 애절하다. 이제 행복은 기억 속에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삶은 약속한 적이 없다.

삶은 우리를 속인 적이 없다. 어느 것도 약속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이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라는 걸 알아채는 건 쉽지 않다. 불행이 예고 없이 찾아오듯 행복도 예고 없이 찾아온다. 앞서 말했듯, 상상하고 기대하고 준비하고 계획했던 뭔가가 이뤄졌을 때 느끼는 감정은 행복이 아니라 성취감이나 자신감, 자존감 같은 것이다. 행복은 어느 것도 약속하지 않은 삶이 불쑥 내미는 선물 같은 것이다. 오다 주었다. 뭐 이런 느낌으로 말이다.      


백일, 이백일, 생일, 결혼기념일... 수많은 기념일을 챙긴다고 행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만약 그날 행복하다면, 그날이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날, 행복이 찾아왔고 당신이 알아챘기 때문이다. 오래된 연인이어서 행복이 물러간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행복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둔해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래된 부부가 행복한 건, 행복의 조건들 때문이 아니라 늘 행복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한 없이 우울한 것이며, 그렇기에 즐거운 날을 기다리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삶이라는 시인의 말을 다시 생각한다. 푸쉬킨과 투르게네프 등이 활동했던, 니힐리즘이 러시아를 물들이던 그 시대에 살았던 이에게 저 시는 뼛 속까지 와닿았을 것이다. 그리고 저 시를 처음 읽었을 때, 80년대 어느 변두리에 살던 가난한 중학생이었던 필자에게도 시인의 말은 고스란히 와닿았다. 그러나 조금 더 살아보니,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삶은 행복을 지연시킨다. 끊임없이 연착되는 비행기처럼, 언제 출발할지 똑 부러지게 말해주지 않은 채 그저 하염없이 공항에서 기다리게만 하는 무성의한 항공사의 비행기처럼 말이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이 막연한 삶을 살아가는 힘은 마주 보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반대로, 늘 마주 봐도 좋은 사람과 살지 않으면, 매일 마주 보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만약 그렇게 마주 볼 사람이 없으면 그 삶은 미래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랬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던 시절,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십 대를 보낼 때, 돌아보면 뭐 하나 추억이라 부를만한 것이 없던 그때, 내 마음은 간이역에서 도착하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 방랑자와 같았다. 헤르만 해세의 <크눌프>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기약이 없었기에 기다릴 수 있었고, 기다릴 수 있었기에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행복한 감정은 오지 않았다. 학교도 다녔고 어울리기도 했고 연애도 해봤다. 젊은 날, 연애할 때 들었던 감정은 불꽃이었다. 이십 대에 연인과 함께 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조로의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저 불꽃이었다. 뜨거운 것이 사랑이고 사랑이라면 뜨거워야 “만”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아내와 연애할 때도, 결혼한 뒤에도 한참은 혼란스러웠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들을 헤쳐 나가는 데 급급했다. 자신의 커리어를 관리하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나이를 먹었다. 우린 그때 서로에게 참호 속 곁을 지켜주는 동지였다. 도와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할 새도 없이, 그저 할 일을 하고 해야만 하는 일을 했으며 성공할 것 같은 길로 달려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아이를 원했고 나도 그러자고 했다. 그 뒤로 우리는 함께 아이를 키우면서 철이 들어갔다.


산 자의 소망

노래 가사 속 남겨진 자의 소원처럼, 죽음을 앞둔 이의 소원 또한 소박하고 평범하다. 최소한 내가 만났던, 죽음을 목전에 뒀던 사람들은 그랬다. 딸이 크는 걸 보면서 매일 아침 머리칼을 묶어주고 옷을 골라 입힌 뒤 등교를 시켜주고 싶다. 대학 입학식에 가거나 결혼식에 가고 싶다. 아이가 크는 동안 나도 그 사람과 늙어가고 싶다. 내년 봄을 보거나 가을을 보고 싶다. 내년 겨울엔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늘 걷던 그 길을 내년에도 걷고 싶다. 손자가 크는 걸 보고 싶다. 그런 것들이었다.      


삶은 우리를 속인 적이 없다. 우리가 놓친 순간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언제나 지난 뒤에 빛난다. 열차가 서지 않는, 철로 변 어느 이름 모를 마을의 잊히지 않는 풍경처럼 말이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이름이 없는 마을의 풍경엔 눈길도 주지 않는다. 특히 요즘엔 더욱 그렇다. 그러니 예전보다 요즘, 더 많은 풍경들이 뒤에 남는다. 우리가 스마트 폰이나 바쁜 일상에 빠져 있는 동안 더 많은 삶의 풍경을 놓치는 것처럼 말이다.


좀 더 살면, 결혼 20주년이 된다. 연인으로 지낸 세월까지 더하면, 뉴스에서 잘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사반세기 넘는 시간을 같이 보냈다. 30대, 40대에는 위기도 있었는데, 내가 오십 대에 접어들고 나서는 어쩐 일인지 둘 다 평온해졌다. 어쩌면 삶에게 기대하던, 미래에서 오리라 기대하던 뭔가를 기다리는 대신 지금 남아 있는 날들과 그 나날의 기쁨을 만끽하기로 결단했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다고 여길 때, 우리는 서슴없이 오늘보다 내일을, 올 해보다 내년을 기대하며 살지만,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비슷해지는 나이가 되면, 오히려 살아갈 날이 더 적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오늘,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에 집중하게 된다. 더 늦기 전에 그래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가 마주 보고 있을 때, 종종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행복이 살에 닿은 듯이 선명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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