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오 년 전쯤, 대학원 시절 얘기다. 대중문화 비평이나 영화 비평 이론 수업이었지 아마. 어느 주였던가, 라캉과 관련한 여러 논문을 국내 학자들 몇몇이 번역한 것을 권택영 교수가 엮어낸 <자크 라캉- 욕망이론>이라는 책이 교재로 선택됐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책 전체를 읽는 것도 아니었다. 에드거 앨런 포우의 단편 소설 <도둑맞은 편지>를 라캉의 이론으로 분석한, 딱 그 챕터만 읽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추리소설 팬이었던지라 소설에 대해선 진즉에 알고 있었기에 편지의 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저 그 의미를 라캉의 렌즈를 빌려 다시 보면 될 뿐이었다. 그러니 나에겐 그리 어려운 텍스트는 아니었다. 심지어 워낙 유명한 소설이니 다들 이번 주는 수월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수업에 참석해서 놀랐던 건, 학생 중 이 소설을 읽어본 사람은 나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수는 내가 그걸 읽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나는 오히려 아무도 에드거 앨런 포우를 읽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한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결국 소설을 읽지 않은 학생들은 라캉의 독해를 따라 <도둑맞은 편지>를 이해해야 했다. 편지의 이동과 그 소유의 의미를 따라서 말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편지의 이동이 아니었다. 기억에 남은 것이 편지의 주인 바뀜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뒤팽이 아무도 찾지 못하는 숨겨둔 편지를 찾은 방법을 설명할 때 언급한, 지도 찾기의 은유였다. 요즘에도 그런 놀이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과거, 할 놀이가 별로 없었을 땐 종종 사회과 부도를 펼쳐놓고 지명 찾기 게임을 하곤 했다. 주로 유럽-도시와 나라가 다른 대륙보다 상대적으로 좁은 곳에 밀집해 있는 대륙이기에-지도를 펼쳐 놓고 지명을 하나 골라 호명하면 상대방은 지도 속에서 그곳을 찾아내는 게임이다.
소설의 주인공 뒤팽은 이 게임의 초보자와 익숙한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게임 초보자는 일반적으로 세세한 지명을 제시함으로써 상대방을 당황시키려 하지만 익숙한 사람은 지도 한끝에서 다른 한끝까지 크게 쓰인 글자를 택하지. 이러한 것은 지나치게 크게 쓰여진 거리의 간판이나 광고처럼 너무 분명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시선에서 비껴가네.”
그의 주장을 부연하면 이렇다. 이 게임의 초보자는 되도록 작고 무명의 도시를 찾으라고 한다. 반면 베테랑은 지도 전체에 걸쳐 있는 산맥의 이름을 말한다. 게임 성립의 근본이 “찾기”에 있기에 대부분은 숨겨진 것을 말하고 그런 식으로 이 게임을 반복해 온 사람은 작고 존재감 없는 무명의 도시 이름을 찾기 위해 샅샅이 지도를 훑는다. 지도를 가로지르는 산맥과 강의 이름은 지도에서 떨어져야 보이기에 작은 걸 찾으려 애쓰면 애쓸수록 산맥과 강의 이름은 보이지 않게 된다.
하루키의 메시지 ;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실제 삶에선 어느 쪽이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쉽지 않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느리게 지나가는 것이든, 휙 지나가는 것이든 시야에 들어오는 것도, 그래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도 별로 없다. 당연히 본 것 중 기억에 남는 건 더 적다. 결국 소설 속 뒤팽의 말의 핵심은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봐야 할걸 볼 수 있는 가의 문제다. 무엇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가의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파리 경시청의 수백 명의 형사들이 편지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방을 센티미터 단위로 구획한 뒤 샅샅이 뒤졌고 심지어 긴 바늘을 이용해 소파와 의자까지 쑤셔봤지만 편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찾아야만 한다는 목적에 사로잡혀 봐야 찾는다는 본질을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팽은 그 반대로 보이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디테일한 것의 나열과 그 묘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에도, 인물에게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들에 대한 길고 세세한 묘사들은 독자를 이야기의 핵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듯하다. 음악, 영화, 소설, 옷, 날씨, 고양이와 개, 수영, 자동차, 계절과 날씨, 외모와 옷차림까지 묘사되는 것의 종류는 끝도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지칠 줄 모르는 작은 것에 대한 집착과 그 묘사는 어떤 의미일까? 이게 그렇게 중요한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은 것들은 에드거 앨런 포우가 뒤팽의 입을 빌려 말한, 그 지도를 가로지르며 있는 산맥의 이름, 그것과 이란성쌍둥이다. 둘은 다른 표현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핵심은 거대함도, 소소함도 아니다. 그건 무심히 지나침과 쓸데없는 것에 대한 집중이다. 무관심하거나 봐야 할 것에 의식을 두지 않아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만큼 의식 또한 제한되어 있다. 때문에 살면서 우리가 보는 건 또한 제한되어 있다. 보는 것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건 더 적다. 살아가는 동안에도, 사랑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다. 마치 차안대를 쓴 경주마처럼 우리는 필요한 것만 볼뿐,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도둑맞은 편지>에 나온 지도 게임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은 결국 이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봐야 할 것을 봐야 한다고.
우리에게만 보이는 "세계"
때론 남에게는 안 보이고 내게만, “우리”에게만 보이는 것도 있다. 사랑하는 동안 우린 그 사람만 본다. 사랑하는 동안만 보이는 것이 있다. 달리 보이는 세계가 있다. 사랑은 세계를 새롭게 보게 한다. 사랑은 신세계를 만든다. 결혼 이후,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실물의 세계, 현실의 왕국이라면 연인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환상의 세계다. 그래야만 한다. 그 세계는 사랑할 때만 존재하고 사랑이 끝난 후에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환희로 가득 찼던 사랑의 순간들은, 그 순간들로 가득 찼던 왕국은 사라진다.
사랑의 세계는 이해받을 수 없다. 이해받을 필요도 없다. 시처럼 상식과 규범, 세간의 눈총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칠 수도 있다. 홀대와 냉대를 사랑의 외투깃을 높이 올린 채 헤쳐 나가야 하는 수도 있다. 그렇게 혹한의 시기를 견딘 후 사랑의 결실을 맺어도 죽음이 그 사랑을 앗아갈 수도 있다. 이 시는 에드거 앨런 포우가 그렇게 어렵게 결혼한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다. 결혼 당시, 에드거 앨런 포우의 나이는 스물일곱, 아내 버지니아는 열세 살이었다. 둘은 사촌지간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산 지 십여 년 후, 버지니아는 스물넷의 나이로 결핵으로 죽었다. 시인도 2년 후, 과음으로 죽었다.
역사가들의 의견으로는 둘은 함께 살았지만 누이처럼 친구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버지니아는 그녀의 이름처럼 죽는 날까지 처녀로 살다 죽었다고 주장한다. 시인은 그녀의 죽음을 자신들의 사랑을 원망한 운명의 탓이라 여긴다. 신의 질투와 천사의 시샘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디 그들뿐일까? 이들의 사랑은 그 시대의 이해와 상식의 영역 밖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으며 함께 살았다. 그야말로 둘만 다른 세상을 살았던 십 년이었을 것이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그 사랑이 만든 세계가 남아 있다. 아니 남아 있어야 한다. 시인처럼 밤마다 그 세계에 들어가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시인이 더 오래 살았다면 그 세계도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는 동안, 기력이 허락하는 동안 치열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 세계의 성벽을 이루는 마지막 벽돌을 움켜쥐고 있어야만 한다.
잊어버린, 혹은 잃어버린 묘사
철학이니 인문학이니 하는 책만 읽다 지쳐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작년에 나왔으니 신작이라고 말하기 민망하지만-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충동적으로 사서 읽고 있다. 첫 페이지부터 묘사가 이어졌다. 강과 그 깊이, 보이던 물고기와 밟히던 모래들, 그리고 늘 그랬듯 그날 “너”의 차림새까지. 그러려니 하고 읽어나가다, 그렇게 몇 페이지 뒤 소년이 소녀를 처음 만난 날, 그녀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나왔다.
"너는 남색 교복 재킷에 마찬가지로 남색 플리츠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리본이 달린 흰색 블라우스, 흰색 양말에 검은색 슬립온 슈즈. 양말은 온통 하얗고 신발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 묘사를 읽은 뒤 뭔가 모를 아픔이 느껴졌다. 잠시 책을 덮었다. 숨을 고른 후, 옛 사랑의 모습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떠올려 보려 노력했다. 나를 사랑해서 웃고 울었고 뼈와 살을 다 삼켜버릴 기세로 날 탐닉했고 나 또한 탐닉했던 그 사람의 뭔가를 최대한 상세히 떠올려 보려고 애써 봤다. 크로키처럼 불분명했다. 그 불분명한 기억을 갖고 있는 자신에게 실망하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세한 것들에 대한 집착이 이해가 갔다.
그의 소설은 어쩌면 우리에게 진정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반복해서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해에 대통령이 누구였고 경제가 어땠으며 큼직한 사건 사고 따위는 잊어버려도 상관없다. 그 해 여름을 같이 보낸 사람은 누구였는지, 날 처음 마중 나온 날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 뭐였는지, 그녀의 향은 뭐와 닮았는지, 그녀의 입술은 어땠는지, 그녀와 처음 보낸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얼마나 뜨거웠는지... 그런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
너의 세계를 만든 것은?
이름이나 고향이나 출신 학교나 직업이나 연봉 따위가 아닌 진짜 기억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그런 것 따윈 내가 만든 세계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런 정보 따위는 검색하면 나오는 것이다. SNS 좀 들락거리고 한 두 사람 건너 들으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 면에서 책과 사람은 닮아 있다. 검색만 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내가 정말 알아야 하고 읽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 최대 과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굴 만나기 전에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들은 검색만 하면 나오는 “지식”과 “정보”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은 기록의 가치는 있을지 몰라도 기억의 가치는 없다. 당연히 추억의 가치는 더 없다.
기억이 나라는 과거를 구축한다면, 추억이 내가 살아온 날들을 풍성한 볼륨과 색으로 채운다면, 당연하게도 오늘의 내 세계도 풍성할 것이다. 결국 정말 기억해야 할 건 함께 만든 세상에서 마주했던 그 사람, 그 사람의 전부다. 정보가 아니라 그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숨 쉬고 움직였던 그 사람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 살아있어서 나도 살게 했던 그 모든 것들.
그 세계는, 앞서 말했던 사랑이라는 세계는 물론이고 내 과거의 가장 찬란한 한 자락이었던 청춘이라는 세계 또한 혼자서 만들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소설을 통해 반복적으로 묻고 있는 것은 그 세계와 그 세계를 함께 만든 사람과 그 세계의 구성물이다. 68 혁명과 전공투 세대에 대학을 다녔으면서도 한가하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재즈 카페를 운영하고 야구나 보러 다녔던 그에게 “역사의식이 없다.”, “사회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시대정신이 부족하다.”라고 비판하는 이에게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너에 청춘을 만든 건 무엇이었나? 혁명이었나? 정치였나? 이데올로기인가? 열심히 시위를 했어도 졸업을 시켜준 너그러운 대학과 머리에 아무것도 든 거 없이 그저 좋은 대학 졸업장만 들고 세상에 나왔지만 그런 너도 기꺼이 받아준, 고도 성장기를 달리고 있던 직장이었나? 너의 한 시절을 찬란하고 눈부시게 했던 그것은 무엇이었으며, 그 사람은 누구인가? 너라는 세계를, 너의 청춘이라는 세계를, 너의 사랑이라는 세계를 누구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죽어서도 그 옆에 영원히 함께 잠들고 싶은 불같은 열정을 불러일으켰던 그 사랑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지겹도록 상세한 묘사가 나오는 건, 다시 말하지만 위와 같은 질문들의 반복이다. 그 세계에서만 나오는 뭔가에 대한, 그 뭔가로 이뤄진 세계에 대한 질문들이다. 시인의 시가 온전히 자신들만의 사랑의 세계를, 그 영원한 세계를 말하듯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또한 자신이 살아온 세계, 그 세계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 모든 것들을 말하고 있다. 정치가로 기억되는 젊은 날도 아니고 경제 상황으로 기억되는 젊은 날도 아니다. 오직 그 사람으로만 기억되는 한 시절을, 한 시절을 빛나게 했던 그 사람을, 그 사람과 함께 만들었던 세계를 반복해서 재생하고 있는 것이다.
사족..
애써 길어 올리지 않아도 향기와 풍경, 얼굴과 촉감, 목소리와 웃음소리, 비누 냄새와 땀 냄새까지 어제 일처럼 샘솟듯 기억났던 사람이 있었다. 쌓이는 세월의 무게와 상관없이 그 사람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어깨의 곡선과 날 안을 때마다 가늘게 떨리던 손가락까지 기억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기억을 믿는 오만을 저질렀던 것이다. 지금 봐야 할 것을 더 오래, 깊이 봐두고, 새겨 기억해야 할 건 더 깊이 간직해야 할 이유다.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으로 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기억 속에 말이다. 때론 망각이 기억보다 고통스러울 때가 있으니.
에드거 앨런 포우의 시집은 없다. 대신 그의 소설 전집은 갖고 있다. <우울과 몽상>. 판본을 보니 2002년 4월 29일에 초판 1쇄가 나왔다. 난 그해 7월 15일에 나온 초판 5쇄를 샀다.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감안하면 제법 많이 팔렸다고 봐야 할까?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가 왜 미국 대중 문학의 뿌리인지 알 수 있다. 이 전집엔 셜록 홈스와 에큘 포와로의 큰 형님 격인 뒤팽이라는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 소설도 있지만 러브 크래프트와 스티븐 킹을 연상시키는 환상과 공포 소설도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