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이 그야말로 내게로 왔다. 내 수중에 들어온 책은 그 경로를 기억하고 있다. 누구를 거쳐서 왔는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대략 말이다. 그러나 이 시집은 도대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심지어 정화라는 여자를 거쳐 은주에게 간 시집이 내게 다다랐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엔 두 여자가 없다. 물론 이 이름을 가진 여자 한두 명쯤은 떠올릴 수 있지만 내 기억 속, 이 이름을 가진 여자들은 시집은커녕 책과도 거리가 멀다.
시집에 세 사람의 흔적이 있다. 우선 표지 속지에 은주에게 이 시집을 선물하는 정화의 짧은 글이 있다. 내용을 보아 두 사람의 만남은 짧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만남이 기억되길 바랐기에 정화는 이 시집을 은주에게 줬다. 정화는 이 만남이 “기억 속에 남길” 바랐다. 그리고 은주가 “언제 어디서나 아름답게 살아가길” 바랐다. 시집이 은주에게 선물로 건네진 건 1993년 6월 8일이었다.
정화가 이 시집을 산 건, 1993년 3월 30일이다. 시집의 목차 페이지를 넘어 본문이 시작되기 직전, 아무것도 없는 페이지에 정화는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겼다. 그녀는 자신이 “맑고 투명한 눈망울처럼 언제나 깨끗하고 순수하길.......” 염원했다. 그렇게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79페이지엔 A4 용지의 3분의 1일가량을 찢어 만든 메모지가 있었다. 날짜는 10월 14일, 같은 해인지는 모른다. 메모의 내용으로 유추컨대, 미학 강의의 내용을 들으며 핵심만 적어 놓은 듯하다. 이 메모는 정화의 글씨체와 다르다. 메모지의 앞면은 미대 소속 학과와 그 학과의 학생들 명단이 말 그대로 타이핑되어 있다. 아마도 이 메모지의 주인은 미대 학생회 간부였지 싶다. 이 시집이 내게 오기 직전, 누가 갖고 있었는지, 그 주인이 대충 짐작이 간다. 책 한 권이 아쉬웠던 시절, 기숙사의 선배 방에 꽂혀 있던 이 시집을 보고 빌려 달라 했을 것이다. 그 후, 선배는 취업을 했고 선배나 나나 이 시집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당연한 쓸쓸함
학교 다닐 땐 미처 몰랐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내가 선배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나와 나이가 같거나 어렸다. 기숙사 선배들도 대체로 그랬다. 늦게 대학에 간 내 탓이다. 1993년, 이 책의 주인이었던 정화와 은주도 내 또래지 싶다. 이십 대 초중반 아니었을까? 그들은 대학에 왔고 공부를 했으며 시를 읽었다. 시에 나온 시인의 말처럼 깊은 독서를 했을 것이다. 그 깊은 독서에 처박혀 섬처럼 홀로 떨어진 느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섬에 유배당한 심정이었는지도.
그들은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아름답게 살기 바랐고, 맑은 눈망울처럼 살길 바랐던 이들이었기에 세상과 동떨어진 자신들의 청춘이, 그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건만 같은 고독한 나날들이 오히려 축복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명품이라는 개념이 막 한국에 등장했을 때였다. 해외여행이 자유롭게 된 것은 1989년, 이들은 어쩌면 단 한 번도 비행기를 안 타봤을지도 모른다. 국내여행도 수학여행이 다였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존재의 다름, 삶의 다른 유형을 세상에 드러낼 방법 같은 것도 없었다. 내가 지금 다른 뭔가를 하고 있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며, 세상의 다른 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남에게 알릴 수도, 아니 알릴 필요도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아리나 학과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쓸쓸함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다.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 거의 없던 시절, 대화는 자신에게 향했고 아주 친한 사람하고만 드문드문 이뤄졌다. 말로써, 글로써. 몇 십 명씩 함께 강의를 들었지만, 말하지 않는 이상, 우린 다 섬이었다.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세기말의 신자유주의가, 그 현란한 파도가 막 당도하기 전, 저마다의 꿈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부둥켜안고 쓸쓸함을 견뎌야 했다.
나, 덤으로
나,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것만 같아
나, 삭정이 끝에
무슨 실수로 얹힌
푸르죽죽한 순만 같아
나, 자꾸 기다리네
누구, 나, 툭 꺾으면
물기 하나 없는 줄거리 보고
기겁하여 팽개칠거야
나, 지금
삭정이인 것 같아
핏톨들은 가랑잎으로 쓸려다니고
아, 나, 기다림을
끌어당기고
싶네
메마르고 흔들리는
불안은 삶을 흔든다. 청춘에게 존재의 이유를 묻는다. 끊임없는 자문(自問)에 나는 지쳐간다. 왜 내게 묻느냐. 그렇다면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다시, 돌이켜 보건대, 조언을 해준답시고 식어버린 꽁치 찌개와 소주잔을 사이에 두고 자신 있게 조언을 해주던 선배도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았다. 그도 불안했을 것이다. 소주를 마시지 않고는 후배의 고민을 들어줄 수도, 객기 어린 대답도, 오답의 예감이 가슴을 울렁이게 했던 그 대답조차 해줄 수 없었기에 그는 취기를 빌려야 했을 것이다.
푸르렀던 청춘이었건만, 그때 우린 죽어버린 가지, 삭정이 같다 여겼다. 아무런 쓸모도 없이 산 나무에 기생한 채 위태롭게 흔들리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청춘이었기에 그랬을까? 지금처럼 답이 널려 있고 자기 계발과 인생 역전의 스토리가 많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살아 있는 존재로, 사람 구실하며 사는 것이,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너무나 막연했기에 그랬을까? 남과 다른 꿈을 꾸면 그나마 없는 답 중에서 더 희귀한 답을 찾아야 했기에 더 막연함이 커서 그랬을까? 그 시절 우리는 위태로웠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 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발 한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그래도 버텨낸 시간
뭘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눈이 떠졌다. 들어온 학교니 강의는 들어가자 생각했다. 필자는 그러고 보면 고지식한 학생이었다. 혼자 공부해서 늦게 들어온 대학이니 수업은 빼먹지 말자고 생각했다. 4년 내내 기숙사에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축구를 하고 일곱 시쯤, 학교 식당에서 기숙사 동료들과 아침을 먹었다. 나머지 날도, 일찍 일어나 몇몇 이서 아침을 먹으러 갔다. 우린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대학에 왔고 해야 할 게 이거밖에 없어서 학교를 다녔다. 해야 될 건 없었다. 시대의 요구도 없었다.
시인은 좀 달랐을 것이다. 나보다 열몇 살 많으니 80년대 대학을 다녔을 것이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으니 시대의 부름으로부터는 조금 비껴 나 있었을까? 아니, 그건 시인의 의도였는지 모르겠다. 시인보다 네댓 살 많은 유하 시인의 감성이 이 시집에서 느껴진다. 시대의 아픔과 시대가 젊음에게 요구하는 시대의 부름에 무심하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처럼 시대의 큰 담론에서 벗어나 일상을 얘기한다. 작은 것들, 하루들, 순간들, 청춘의 찰나들.
가난하고 어둡고 힘들고 전망이 안 보이던 시절이었지만, 그런 삶이었고 그런 꿈을 갖고 살았지만 일어나야 했다. 살아내야 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슬픔에 호응하며 몸을 일으켜 살아왔다. 내 슬픔이 너에 슬픔보다 훨씬 크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슬픈 일 없는 청춘에게도 슬픔은 있었다. 산다는 것이 슬픔을 동반한 무엇임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거울은 빛나건만
문득 튀어 일어나
아무에게고 전화를 걸고 싶네.
아무 번호나 눌러
아아아아아 끔찍해요!
그 목소리 외침일지, 속삭임일지
입을 열기도 지긋지긋해
짐승 같은 흐느낌일지.
살아갈 날들이 두렵지도 않아.
오직 ‘살아 있음’이
나를 꽁꽁 염하는구나.
운명인지, 숙명인지 모를 삶
시인은 1984년,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그 뒤로도 삶은 이어졌다. 김민기의 <봉우리>처럼 우린 이룸과 이룸을 봉우리 삼아, 이룸과 실패 사이의 절망을 계곡 삼아, 오늘과 내일을 능선 삼아 삶이라는 산맥을 헤쳐 간다. 그 끝도 없이 이어지는 대간(大幹), 그 끝이 안 보이는 봉오리들의 행렬이 예감되면 기가 질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올라온 이상 가야 하는 것이 삶이다. 죽은 자의 염과 산 자의 염은 결국 사로잡힘이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죽은 자의 염은 보내주기 위함이다. 전통 장례에서 염은 둘째 날 행한다. 첫째 날엔 시신을 단장하는 습, 둘째 날엔 염을 하고, 셋째 날엔 관에 넣는다. 알다시피 삼일 째에 관에 넣는 건 혹시라도 살아날, 그 일말의 가능성 때문이다. 그러나 염은 영원한 떠남, 그 영원한 길로 가는 첫 단추다. 그 이후엔 돌이킬 수 없다. 가는 일만 남았다. 일말의 가능성은 언제나 그렇듯, 가능성일 뿐이다. 관 밖에 있는 산 자는 죽은 자의 여정을 알 수 없다. 그저 잘 가길 바랄 뿐이다. 좋은 곳으로 가길 염원할 뿐이다.
삶 또한 그러하지 않나? 사는 수밖에 없다. “살아갈 날들이 두렵지도 않아./ 오직 ‘살아 있음’이/ 나를 꽁꽁 염하는구나.”하는 시인의 말에선 두려움과 막연함이 전해진다. 또한, 그것을 넘어 살아 있다는 사실이 희망처럼 읽히기도 한다. 내 삶이 나를 사로잡아 삶을 향해 떠민다. 살아 있는 이상, 살아라, 하고 명령한다. 그렇게 살아내서, 시인은 계속 시집을 냈고 산문을 냈다. 유명 작가들의 흔한 표현을 빌리면 “글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행복하게 살아냈다. 유명해지면서 본인이 원하지 않는 “염”같은 명예를, 직함을, 지위를, 사회적 옷을 입게 되었을 것이다. 죽은 자의 염이 그러하듯, 산 자의 염 또한 스스로 입는 것은 거의 없다. 살다 보니 입혀지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감당하고 살뿐이다.
이 시집은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판본을 보니 초판은 1990년 6월 10일에 나왔다. 내게 있는 건 1992년 10월 13일에 나온 3쇄다. 값은 2천5백 원이다. 여전히 팔리고 있는 시집은 현재 1만 2천 원이다. 그새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