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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Oct 03. 2024

내가 사랑했던 "영훈"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47

소녀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 돼요


그리움 두고 머나먼 길

그대 무지개를 찾아올 순 없어요    

 

노을 진 창가에 앉아

멀리 떠가는 구름을 보며


찾고 싶은 옛 생각들

하늘에 그려요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외로워 울지만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나와 이름이 같은 이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영훈이다. 성까지 같은 사람 중에선 유명한 사람이 없다. 최소한 내 기억엔 없다. 작곡가 이영훈은 영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소중히 기억되는 사람이다. 이 글을 나와 이름이 같았던 한 남자에게 바치련다.  


발라드 시대의 음악가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80년대, 낯선 음악이 세상에 나왔다. 우린 그걸 “발라드”라고 통칭했다. 이문세, 변진섭이 선봉에 섰고 뒤이어 신승훈이 뒤를 따랐다. 처음 그 “발라드”라는 것이 세상에 나왔을 때 난 초등학생이었다. 이런 음악은 이전에도 있었던 것 아니냐며 따질 수도 있지만 이문세 이전의 느린 템포의 노래들은 포크이거나 스탠더드 팝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정훈희의 노래는 베리 메닐로우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음악과 유사했고 트윈 폴리오의 노래는 포크였다. 김정호나 조용필도 있지만 전자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발라드라고 보기엔 한국적이었고, 후자는 발라드라는 장르 안에 가두기엔 그 음악 세계가 너무 넓었다. 어디까지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몇 학년 때인지는 모르겠다. 국민학교(그때는 국민학교였다.) 3학년? 4학년? 필자는 이문세의 <파랑새>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엄청난 히트 곡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다른 친구들도 알고 있었다. 동요 같기도 하고 민요 같기도 했던 그 노래가 익숙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그 가수가 새로운 앨범을 냈는지, <가요 톱 텐>에서 낯선 노래가 나왔고, 그 노래는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몇 주인가 1위도 했고 나 같은 초등학생도 그의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누구나 다 아는 노래가 됐다. 그 앨범은 이문세의 3집 앨범이었다. 이 앨범이 나온 이후, 사람들은 한 사람의 이름을 더 알게 됐다. 바로 이영훈. 필자는 이때 대중음악에서 작곡가의 역할을 인지했다. 한 가수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주는 사람으로서의 역할도 이해했다     


이문세를 처음 만난 날, 이영훈은 수줍어하며 <소녀>를 들려줬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영훈이 중학교 때 만들었다고 한다. 만들었을 때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만든 사람의 정서가 중요하다. 이영훈은 이 정서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사랑 이야기이지만 마냥 달콤하지도, 천박하게 노골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가사와 멜로디는 멀리서 보내는 연애편지를 닮았다. 벤치의 이쪽 끝에 앉아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겨우 고백을 하는 소년의 마음과 닮았다.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다는 말만큼 소중한 약속은 없다. 머물길 바라는 사람에게, 담담히 건네는 이런 약속은 그 어떤 사랑 고백보다 절실히 다가온다. 물론 그런 고백을 한 사람도 사랑이 끝나면 간다. 같은 앨범에 실린 <휘파람>은 사랑이 끝나는 이야기다. 당연히 남은 사람은 납득이 안 가는데, 가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달라고 한다. 자기 마음이 편하겠다고 그렇게 해달라는 데, 어느 칼럼에서 인용한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약자이기에, 여전히 사랑이 남은 사랑의 약자는 이 부탁을 들어준다.


그렇다. 떠나는 사람은 난폭하다. 노래에서 떠나는 이를 “어린애”라고 부르는 이유다. 식어버린 사랑은 어린애처럼 철이 없다. 망설임도 없다. 재료가 소진되면 문을 닫는 식당이 배고픈 배를 움켜쥐고 줄을 서 있던 손님 앞에서 셔터를 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무심히 사랑의 막을 내려 버린다. 휘파람이나 불며 떠나간다는 가사가 나이 들어 다시 보니 그렇게 무정할 수 없다.


기억이란 사랑보다 

  

내가 갑자기 가슴이 아픈 건

그대 내 생각하고 계신 거죠    

 

흐리던 하늘이

비라도 내리는 날

지나간 시간 거슬러

차라리 오세요.     


내가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

그대 내 생각하고 계신 거죠   

  

함박눈 하얗게

온 세상 덮이는 날

멀지 않은 곳이라면

차라리 오세요.   

이렇게 그대가 들리지 않을

말들을 그대가 들었으면   

  

사랑이란 맘이

이렇게 남는 건지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내가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

그대 내 생각하고 계신 거죠.   

  

새하얀 눈꽃이

온 세상 날리는 날

멀지 않은 곳이라면

차라리 오세요.

이렇게 그대가 들리지 않을

말들을 그대가 들었으면  

   

사랑이란 맘이

이렇게 남는 건지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기억과 망각, 추억과 사랑

권택영 교수가 어느 책에서 그랬듯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기억한다. 이 말을 난 <이터널 선샤인>을 소재로 칼럼을 쓸 때 인용했었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남겨진 사람의 기억은 잔인해서, 잊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브라운 아이즈의 노래는 더 잔인하게, 슬프게 들린다. 그 노래는 “사랑한 만큼 기억하라고” 말한다. "추억은 사랑만큼" 힘이 되기에 사랑만큼 선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가? <남자가 사랑할 때>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새벽의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문세의 노래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 홀로 남겨진 여자의 얼굴을 보면서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추억이 사랑만큼 힘이 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울지 않고 떠난 사람을 생각하기 위해선 시간이라는 치료제가 있어야 한다. 브라운 아이즈도 그걸 알아 서로를 기억하는 건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기대어 흘러가는 일”이라고 한 것이다. 얼마나 흘러가야,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야 울지 않고 지난 사랑을 회상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울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 볼 뿐이다. 그날이 올 때까진, 울면서 너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꺼내어 본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내가 아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회상은 인생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지만 망각은 인생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라고 했다. 인생 대신 사랑이라는 단어를 넣어도 말이 된다. 다만 사랑이 아름답게 회상되기 위해선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지 모를 뿐이다. 솔직히, 냉정하게 말한다면 버림을 당한 사람에겐 약이 없다. 가슴 아픈 사랑은 가슴 아픈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망각이 낫지 않을까? 같은 맥락에서 난 가난했던 시절을 추억에 잠겨 회상하는 사람을 혐오한다. 내 기억 속 가난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것으로 생존하게 하는 것이었다. 가족의 사랑으로 견뎌낼 수 있는 가난에도 정도가 있다. 사랑도 없는데 가난하기까지 한 가정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낸다.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 당신이 긴 시간이 지난 후, 과거의 어느 사랑을 회상하며 ‘그런 사랑이 있어, 내 인생도 나쁘지 않았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은 당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것이다. 아니 최소한 상처보다 기쁨을 더 많이 준 것이다.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망각될 만큼 그 상처들이 자잘한 것이다. 살짝 긁히거나 베인 상처처럼 며칠 지나 아문 상처들일 것이다. 그도 아니면, 당신의 상처를 치료해 준 뭔가가 있었을 것이다. 뒤이어 찾아온 사랑이었을 수도 있고 보기만 하면 싸우지만 맨 날 붙어 있던 친구였을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한 곡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아니 최소한 나는, 집에 TV도 없었고 그 흔한 냉장고 없었지만 라디오 하나는 있었던 나는 DJ의 시대를 살았다. 김종환과 김기덕과 성시완과 전영혁, 그리고 이문세와 배철수의 시대를 살았다. 그들이 틀어주는 음악을 듣기 위해 시계를 봤고 하교를 서둘렀으며 잠을 설쳤다. 그들 덕분에, 그들이 틀어준 음악 덕분에, 그 음악을 만든 이영훈 같은 사람들 덕분에 나의 상처가 좀 더 빨리 치유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난도, 아픈 사랑도, 수 없이 겪었던 실패와 좌절도 지금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 고마움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소녀>와 <휘파람>은 3집에, <기억이란 사랑보다>는 13집에 실려 있다. 난 3집과 7집과 9집을 갖고 있다. 7집 이후 두 사람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다 13집에서 또 재회한다. 13집은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마지막 앨범이다.     


사실 내가 사랑하는, 그러니까 누군가 내 옆구리를 툭 치기만 해도 술술 부를 수 있는 이문세의 노래들은 3, 4, 5집에 실린 곡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카세트테이프들이 없는데, 당시엔 십 대였기에 경제력이 없었고 부모 또한 음반을 사라고 용돈을 줄만한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끼니를 걱정하는 가난엔 책 한 권도 사치다. 결국 내가 갖고 있는 앨범은 대학에 들어가서 산 두 개의 카세트테이프와 훨씬 뒤, 우연히 음반 가게에서 발견한 LP가 전부다.    


같은 이유로 대중가수의 단독 콘서트도 서른이 넘어, 지금의 아내 덕분에 처음 가봤는데, 2003년 4월 6일, 부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던 이문세의 콘서트였다. 그날의 기분을 어딘가에 적어 놨다. “언제부터 울기 시작했을까? <사랑이 지나가면>을 들을 때? 아님 <이별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이문세의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 마디마디를 꼭꼭 짚고 넘어가는 가사 때문이었을까? 난 목이 뻐근해질 정도로 울음 참아야 했다.”      

이영훈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난 <싸이월드>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주 긴 글을 썼었다. 물론 지금은 볼 수 없다. 장국영처럼 이영훈의 기일도 믿기지 않는 날이다. 2008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그에게 어울리는 날이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몇 살이든, 나이를 얼마를 먹든, 죽음이 내 일처럼 여겨지진 않겠지만 마흔일곱의 사내에겐 더 그러했을 것이다. 보낸 사람들도 아무런 준비 없이 보냈다. 준비를 한다고 그 어떤 죽음이 쉽게 받아들여지겠냐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 이르게 갔다.     


내가 사랑했던 예술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보다 더 나이를 먹어 버렸다. 중학생 때 랭보의 시를 읽고 난 후, 가난하고 절망스러운 세상, 그처럼 마흔이 되기 전 떠날 거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던 남자는 쉰이 넘게 살아남았다. 나보다 열두 살 많은 음악가가 이십 대 중반에 이문세와 함께 만든 음악을 들으며, 고통스러운 십 대를 견뎌냈던 남자가 쉰이 넘어버린 것이다. 살아남았기에 해야 할걸 했다. 고마웠던 음악가를 위해 써야 할 글을 썼다.


이영훈과 이름이 같은, 유명한 동명이인이 두 명 정도 있다. 한 명은 목사고 한 명은 경제를 공부했는데 역사를, 그것도 치우친 입장에서 얘기하는 반쪽짜리 학자다. 이 둘은 음악가 이영훈보다 먼저 태어나서 여전히 살아있지만, 글쎄, 훗날 더 많은 사람이 더 오래 기억할 "이영훈"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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