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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Oct 17. 2024

그 숲에서 내가 걸어 나온다.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19

숲     

               

                             하덕규   

  

저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내 어린 날의 눈물 고인   

  

숲에서 나오니 숲이 느껴지네

외롭고 외롭던 숲

내 어린 날의 숲   

  

저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내 어린 날의 슬픔 고인     


숲에서 나오니 숲이 느껴지네

어둡고 어둡던 숲

내 젊은 날의 숲


슬픈 노래

다시 들으며 내뱉은 말은 “이 노래, 참 슬픈 노래였구나.”였다. 당연히 이 노래를 처음 들을 땐 이렇게까지 슬픈 노래인지 몰랐다. 슬픈 노래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 다시 들어보니 정말 슬픈 노래다.     

 

두어 달 전, CD와 카세트테이프가 한데 쌓여 있는 책꽂이 하단에서 우연히 하덕규 1집의 카세트테이프, 그 등걸을 봤다. 다른 것도 있던가? 뒤적거리다 보니 <시인과 촌장>의 2집과 3집의 CD가 나왔다. 뒷면을 보니 2집은 85년, 3집은 88년에 나왔다. 내가 이 앨범을 산 건 90년대 중반쯤일 테니 CD 제작은 앨범이 나온 뒤 한참이 지나서였을 것이다. 그만큼 <시인과 촌장>의 앨범은 보존 가치가 있었던 모양이다. CD 시대의 도래 이후, 그전 세대의 앨범들이 종종 CD로 만들어졌다. 이 앨범들도 그중 하나였다.    

 

CDP도, 턴테이블도,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도 없는 탓에 유튜브를 통해 이 앨범들을 다시 들었다. 대학 시절 좋아했던 <숲>을 먼저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너무 슬펐다. 그때는 전혀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통과할 땐 모른다. 지나올 땐 느끼지 못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 여정이 향후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감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무심히 지나올 수도 있다. 즐거이 지나올 수도 있고 두려움과 불안 속에 겨우겨우 지나올 수도 있다. 마치 강원도에 가는 길과 같다.


한계령을 넘는 길

십 대 시절 다니던 교회 전도사의 고향이 속초였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고향 근처로 몇 번 수련회를 갔었다. 의정부에서 강원도까지는 먼 길이었다. 그때는 산을 관통하는 터널이 없었다. 한계령을 타고 올라갔다 내려와야 했다. 볼리비아인가 남미 어느 나라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길과 닮은 길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 길이 위험한 지도, 먼 길인지도 몰랐다. 그저 낡은 승합차에 실려 갔다. 굽이굽이 올라간 후 고갯마루에 다다라 한계령 휴게소에 내리면 멀리 바다가 보였다.      


그 기억이 있는 사람에게 강원도는 여전히 먼 곳이다. 지난겨울, 가족 여행으로 강원도 고성을 갈 때, 아내의 스마트 폰 내비게이션은 중앙고속도로를 통해 가도록 했다. 난 막연히 ‘참 멀고 험한 길이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차는 단 한 번도 오르막을 오르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뚫린 길고 긴 터널을 여러 개 관통하자 느닷없이 강원도가 나왔다.      


터널의 모양새는 다 비슷해서, 요즘 아이들은 종종 출발지와 도착지, 중간에 들른 휴게소는 기억해도 그 사이, 여정은 기억하지 못하곤 한다. 아마 요즘 아이들의 인생, 그 기억도 비슷할 것이다. 최소한 내 아이의 기억은. 터널은 산과 산맥의 핵심부를 관통하는 지난한 과정을 겪은 뒤에야 생겨난다. 막혀 있던 곳 아니고 그 안에 캐내야 할 암석이나 보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이 산의 이편과 저편을 쉽게 오가기 위해, 그 편의를 위해 뚫는 것이다.


애초에 길이 아닌 곳, 길이 있으면 안 되는 곳에 길을 만들기에 길을 막는 것들은 많은 수밖에 없고, 그 많은 것들은 길을 위해 자기의 생명과 살과 부피를 내줘야 한다. 사람은 그 터널을 원래 있었던 것인 양 지날 뿐, 사람을 위해 자기의 속살을 내어준 산과 산맥의 고통은 모른다.


삶의 고통 또한 타인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 어쩌면 스스로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다시 들어본다. 숲을 나와야 그 숲은 어두움도, 외로움도, 푸르름 아래 고여 있던 눈물도 보인다. 숲을 지날 때는, 젊은 날의 숲도, 어린 날의 숲도, 그 숲을 지날 때는 그러려니 하고 지났었다. 숲을 나와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것이 보였다.      


숲이 보였던 순간

딸이 어린이집에 들어간 이후 종종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예전과 다르게 요즘엔 친구네 집에 놀러 가기 위해선 이쪽 엄마와 저쪽 엄마의 긴 협상이 있어야 한다. 내 어린 시절처럼 같이 놀다 물이나 한 잔 마시러 불쑥 들어가거나 친구네 엄마가 좀 늦게 온다고 전화라도 오면 내 엄마가 저녁까지 먹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바로 집 앞에 사는 아이 집에 놀러 가도 날을 잡고 시간을 정해야 한다. 빈손으로 보내서도 안 된다.      


딸이 친구를 집에 데려 오고 싶어 한 이후, 그 숲을 돌아볼 수 있었다. 유년 시절이라는 숲을. 그 숲에 살던 가난이라는 괴물, 그 괴물이 살던 남루한 단칸방, 연탄이 들어가던 아궁이, 석유곤로, 허름한 찬장, 매일 같이 먹던 라면들, 낱장으로 연탄을 사 올 때 쓰던 연탄 두 장이 딱 들어가는 양철통까지 낱낱이 생각났다. 그 숲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딸이 친구를 데려오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 숲을 나온다고 숲이 보이는 건 아니다. 기억은 그저 가둬진 물일 뿐이다. 댐이나 호수에 가둬진 그런 물. 호수가 일렁이는 걸 본 적이 있나? 잔잔한 경주의 보문 호수도 출렁일 때가 있다. 한 겨울, 사나운 바람이 남산을 넘어와 들이닥칠 때, 보문호수는 멈추지 않고 울렁인다. 바다의 파도는 왔다가 물러가지만 호수의 파동은 바람이 멈출 때까지 호수 구석구석을 울렁이게 한다. 호수는 바람 앞에 속수무책이다.     


숲을 벗어나면 숲이 잊힐 줄 알았다. 바람이 불면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혼자서는 토해내지 못했던 울음을 쏟는 대나무처럼, 사는 동안 예상치 못한 바람이 푸석푸석 마른 마음을 후려치면 여지없이 기억의 숲이 울부짖었다. 고요하고 고요했던 숲이 요동쳤다. 거울 같이 맑고 잔잔했던 기억의 호수가 일렁였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바람이 지나가길.     


가시나무     


                하덕규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와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걸어 나오는 나

숲에서 내가 걸어 나온다. 십 대의 숲에서, 이십 대의 숲에서, 삼십 대의 숲에서, 푸르렀던 숲, 가물었던 숲, 불이 번져 밑 둥까지 다 타버린 숲. 그 숲, 그날의 숲에서 내가 걸어 나온다. 안아주고 싶다. 다 모여 봐라. 우리 서로를 안아주자. 다들 애썼다. 덕분에 너도 살고 나도 살았다. 자, 모여 봐라. 우리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자. 후회의 한숨도 받아주자. 피지 못한 꽃들은 아쉬워 말고 이르게 내렸던 서리도 원망말자. 이제 다들 나와 함께 오늘을 누리자. 그 숲은 그만 돌아봐라.     


노래 속 “당신”은 신이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작가가 나중에 목사가 됐다는 걸 생각하면 다른 여지는 없어 보였다. 지금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나이 들어 다시 보니, <숲>과 <가시나무>를 나란히 놓으니 그 “당신”이 숲에서 걸어 나온 과거의 나 같다. 어린 날의 나, 청춘의 나.      


그렇게 많은 나들이 바람만 불면 소리 내어 울었다. 그 많은 “나”들을 부둥켜안고 많이도 울었다. 그렇게 나를 안고 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안에 가시가 돋았다. 가시는 양방향으로 돋았다. 나를 향해, 그리고 타자를 향해. 가시를 없애기 위해선 그 모든 나를 오늘의 나로 불러들여야 했다. 숲에서 걸어 나온 나와 화해하고, 달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한참을 다독인 뒤 오늘의 내 품으로 끌어안았다. 아내와 딸이 함께 사는 집으로 초대해 불러들였다. 다들 평안하다.      


바람이 불면 여전히 흔들린다. 그러나 잔잔히 흔들린다. 숲 속 사찰, 추녀 끝에 달린 풍경처럼. 그렇게 잔잔히 흔들리는 날이면 나와 내가 담담히 대화를 주고받는다. 우리의 대화는 늘 같은 말로 끝난다. 딸의 숲은 늘 봄이었으면.


하덕규는 1989년, 시집을 냈다. 제목은 <내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이다. 당시까지 발표한 노래의 가사들과 다른 시들이 들어간 것으로 난 알고 있다. 시집은 절판 상태다. 하덕규는 목사로써, 백석예술대학에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로서 조용히 살고 있기에 시집이 복간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참고로 양희은의 노래 중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인 <한계령>도 그의 작품이다. 작사도 그가 한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지만 곡이 나온 지 이십여 년이 지난 2007년, 한계령이 고향인 무명 시인 정덕수가 원작자임이 밝혀졌다. 하덕규도 그의 시에서 부분, 부분 발췌하여 만들었다고 시인했다. 하덕규는 사과를 하고 그동안 밀린 저작권료를 정산해 주겠다 했지만 그 무명시인은 DSLR 한 대만 사달라고 했단다. 이후 이 곡의 작사가로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오르고 있다.


김훈의 소설 < 내 젊은 날의  숲>의 제목은 당연하게도 <숲>의 한 구절에서 빌려 왔다. 이 글을 쓰면서 몇 군데 파라락 넘겨 봤다. 김훈이 왜 제목을 빌려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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