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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Oct 24. 2024

인간의 본분, 살아가는 것

그날의 시로 너를 위로한다 50

먼지가 되기보다는 재가 되리라

    

                                                잭 런던   

     

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재가 되리라

마르고 푸석푸석해져서 숨 막혀 죽기보다는

내 생명의 불꽃을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

완전히 불태우리라.

활기 없이 영원히 회전하는 행성이 되기보다는

내 안의 원자 하나하나까지

밝은 빛으로 연소되는

장엄한 별똥별이 되리라.

인간의 본분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

나는 단지 생을 연장하느라

나의 날들을 허비하지는 않으리라.

내게 주어진 시간을 쓰리라.


아픈 딸이 소환시킨 기억

얼마 전, 환절기만 되면 목이 붓곤 하는 딸이 아팠다. 늘 그랬듯, 같은 증상이다. 학교를 안 가고 집에서 쉬고 있는 딸과 얘기를 하다 대학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그 시절, 병원에 간 적이 없다. 크게 다친 적도 없고 큰 병에 걸린 적이 없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일 년에 한 번쯤, 몸살감기에 걸릴 때면 학교 정문 앞에 있는 허름한 약국에 갔다. 기숙사가 정문과 붙어있다시피 해서 약국과 가깝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 시절, 덕분에 안 먹어본 종합감기약이 없다. 용돈이 떨어졌거나 기숙사 동료 학우가 자기한테 남은 감기약이 있다고 하면 그걸 얻어먹기도 했다.      


아파서 강의를 빼먹은 적은 없다. 아니, 어떤 이유로든 단 한 번도 강의를 빼먹은 적은 없다. 대학에서 대학원까지 단 한 번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기숙사 학우들도 대체로 그랬다. 지금의 내 모습에선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당시의 나와 우리는 성실했다. 자취가 아닌 기숙사를,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선배, 후배와 방을 써야 하는 기숙사 생활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 자발성의 배후엔 집안의 강요도 있었겠지만 알아서 집안 사정을 헤아린 마음도 있었다. 학교에서 자고 먹고 공부하기로 작정한 자식들의 마음, 그 마음이 성실의 원동력이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성실 이상의 것을 원했고,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이 뭔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옛이야기를 하다 보니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직장 이야기도 나왔다. 그때도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다. 가장 먼저 출근해서 제작팀과 기획팀이 함께 쓰던 공간을 정리한 후, 화장실도 청소했다. 누가 그러라고 한 건 아니었다. AE들은 늘 밖으로 돌고 나보다 어린 조감독 두 명은 제작팀과 기획팀의 다양한 잡무로 늘 바빴다. 그나마 책상에 가장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 카피라이터인 나였기에 내가 해야 될 것 같아서 했다. 일도 성실히 했다. 경쟁 PT도 열심히 준비하고 부산 본사는 물론이고 마산, 서울, 대구 지사에서 요청하는 라디오와 TV 카피도 칼 같이 써냈다. 이후, 이런저런 선택을 한 끝에 오늘에 다다랐다.  


아직 남아 있다.

이 일을 한 지, 20년이 넘었다. 쉰이 넘어가면서 감독과 종종 은퇴를 주제로 이야기했었다. 얘기할 때마다 확 늙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실제로 늙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다, 최근 상반기의 불황을 털어내고 일이 많아져서 바빠지면서 몸도 마음도, 정신도 살짝 지쳐갈 때,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을 할 날이 정말 얼마 안 남았다면 적당히 하지 말자.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지만 하는 동안엔 성실히,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      


수영을 하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올 초만 해도 한 바퀴 정도는 쉬었다. 숨이 차고 근육이 지쳤다 싶으면 속도가 느린 뒷 번으로 갔다. 천천히, 적당히, 쉬엄쉬엄 했다. 물론 그 시간대는 물론이고 수영장 전체에서도 운동량과 수영 실력으로 손에 꼽히는 반이니만큼 뒷 번의 운동량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1번을 따라 착, 착, 착, 템포를 죽이지 않고 들어와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을 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언제까지 사지가 내 맘대로 움직여줄지 알 수 없다. 내 몸이지만 예상할 수 없다. 이십 대에 지금의 내 몸 상태를 예견할 수 없었듯. 게다가 내 돈을 내고 하는 운동 아닌가. 어차피 두세 세트마다 레인을 걷고 오는 쿨링 타임이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나 자신을 더 몰아붙여보자. 이런 생각을 했다.     


이후 한 바퀴도 쉬지 않고 모든 운동을 소화하리라, 결심했다. 당연히 내 순서도 고수하자고 다짐했다. 가끔 새로 온 2,30대 청년들은 앞에 보내지만, 그것도 그들이 고사하면 강요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 반에서 1번, 2번을 오가는 뉴 페이스 젊은이는 수상 구조사 시험을 준비하는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다. 이 정도라면 언제든 앞으로 보내준다.


쏟아부어낸 삶

편집자 류시화에 따르면, 이 시는 잭 런던이 죽음을 앞두고 친구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남긴 유언이라고 한다. 잭 런던이라면 이런 말을 해도 된다. 불꽃같은 삶이라는 표현을 흔히들 쓰는데, 이 표현이 딱 맞는 작가, 한 사람만 고르라면 잭 런던이다. 그는 1876년 1월 12일에 태어나 1916년 11월 22일에 죽었다. 딱 40년을 살았다. 잭 런던은 수많은 나라를, 자신의 발과 화물 열차 등을 이용해 돌아다녔다. 잠은 거의 노숙으로 해결했고 여러 나라의 감옥에도 갇혔었다. 앞서 말했듯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는데, 그중엔 밀렵꾼과 사냥꾼, 광부도 있다.      


생애의 후반부, 그러니까 18년 동안 글을 썼다. 어느 날 공공 도서관에서 우연히 <로빈슨 크루소>를 본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후 그는 매일 오천 단어씩 썼다고 하는데, 이는 200자 원고지 70매 정도다. 한글 프로그램으로 바꿔 계산하면, 나처럼 11포인트, 줄간격 160으로 쓸 경우, 대략 네 장정도의 분량이다. 그는 이 놀라운 생산력으로 죽기까지 총 51권의 책을 남겼는데, 여기엔 소설은 물론이고 저널리즘 정신이 담긴 르포르타주가 포함된다.      


다들 알만한 작품으론 <야성의 부름>, <강철 군화>, <암살 주식회사> 등이 있고, 종군기자로 러일전쟁에 참전하여 당시 조선에 대한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또 그 자신 하층민으로, 노동자로, 심지어 종군기자와 노숙자로도 살아 봤기에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는 이들에 대한 르포르타주인 <밑바닥 사람들>을 남겼다. 후에 이 책에 깊은 인상을 받은 조지 오웰은 파리와 런던에서 자발적으로 부랑자의 삶을 살고 그 경험을 밑천 삼아 <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을 썼고, 후에 이 책을 본 한 단체의 요청에 의해 부두 노동자의 삶을 경험한 뒤 <위건 부두 가는 길>이라는 르포르타주를 남긴다.


그 삶도 괜찮다.

이런 삶은 아무나 살 수 없다. 또,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낸 삶만이 삶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린 각자 아는 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전력을 다해 살고 있다. 물론 이런저런 말을 들을 것이다. 이리 해라, 저리 해라, 같은 말을 많이 들을 것이다. “그건 최선이 아니다.”, “그건 최고가 아니다.”, “더 할 수 있다.”, “노력이 부족하다.”, “시간을 쪼개서 써라.”, “독하게 0년만 바치면 인생이 바뀐다.”와 같은 말은 수도 없이 들을 것이다.      


우린 선택한다. 좋은 선택인지, 나쁜 선택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저 최선이라 여겨지는 것을 선택한다. 선택의 여지는 삶의 순간과 공간에서 만난다. 그 여지는 결국 내가 존재하는 지경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 지경(地境)의 경계 밖에 있는 선택의 가능성은 가시적이지 않다. 보이지 않으니 선택도 할 수 없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무난하고 조용하고 말썽 없이 자랐다면, 그리고 주변의 친척과 친구와 친구의 가족들 또한 다들 그렇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이라면 선택의 여지 또한 평범하다. 그 평범한 것 중에서 절박하게 하나를 골라 감수해 낸 세월이 오늘의 당신이다.      


물론 그중 쉬운 길, 편한 길, 빠른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이 그렇다. 반면 어려운 길, 불편한 길, 험하고 먼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비난도 칭찬도 훨씬 나중 일이다. 누군가 당신을 대신하여 당신의 삶을 살아줄 수 없고 당신 또한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면 선택 또한 두고 보는 수밖에 없다. 비정하지만, 그게 인생이고, 이것이 어쩌면 누아르 영화와 실존주의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에겐 필요한 건 자신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오늘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 셀리 리 랠프는 2023년, 방송/영화 비평가 협회가 주최하는 Critics Choice Awards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수상 소감에서 시청자들에게 TV 앞으로 다가오라고 한 뒤 이런 말을 한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할 필요는 없어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할 필요도 없죠.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필요 또한 없고요. 다만 당신이 거울을 볼 때, 그 거울 속 한 사람만 사랑해 주면 됩니다.”라고.    


누군가에게 당신의 삶을 증명할 필요도, 입증할 필요도 없다. 당신이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 할 수 있는 한 한껏 살아내면 된다. 아니, 그보다 당신이 자신의 존재를 충만하게 느끼면 된다. 서서히 뭔가가 줄어드는 인생이 아니라, 나눠 쓰는 인생이 아니라 그저 오늘을 충만하게, 이 하루치의 햇볕을 한껏 받으면 살면 된다.            


낙화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그 뒤의 일은 내 몫이 아니다.

아내 외엔 아는 사람이 없는 부산에, 어느 날 갑자기 와서 살았다. 낯선 나라에 이민 간 한인동포들이 그렇듯, 또 그전에도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녔기에 여기서도 교회를 다녔다. 그러다 불쑥, 신과 나 사이에 엄청난 거리감-인지적, 물리적-을 깨달은 뒤, 다음 날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살던 삼십 대 중반, 불쑥 내가 죽으면 장례식엔 몇 명이나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례식, 참 쓸쓸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최근엔 그런 생각을 버렸다.


장례식은 산 자의 것이다. 죽은 자는 그 산 자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장례식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홀가분해졌다. 지금, 이 순간, 딸의 열나는 이마를 만질 수 있다는 것이, 그 이마에 얹을 물수건을 갖고 딸에게 장난을 걸어 웃기며, 이렇게 아픈 덕에 오랜만에 아빠가 자기 옆에 누워 농담을 하고 장난을 친다는 사실에, 아픈 것을 잊고 웃는 딸의 얼굴을 보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다시 못 올 지금 이 순간이.


성실한 대학 생활과 직장 초년병 때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빠도, 기숙사 학우들도 순진했었던 것 같아. 아빠는, 성실하면 잘 될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잘 안 됐네. 너처럼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랬어야 했는데, 그때는 다들 몰랐어. 그저 전공 공부만 열심히들 했지. 강의 안 빠지고.”


“어쩐지 슬프네.”


딸은 안타까움을 가득 머금은 눈으로 날 봤다. 난 딸의 열이 오른 볼을 살짝 톡톡 두드렸다.


지나온 청춘

청춘은 좋았다. 몸도 마음에도, 약간의 고생이 있었지만 그걸 잊을 만큼 찬란한 순간도 있었다. 그래, 많이 웃었고 울었다. 많이 추웠고 많이 더웠다. 우리는 강의실과 낡은 기숙사를 오가며 공부를 했다. 또 가끔은 운동장과 세 시간짜리 침대 위에서 그칠 줄 모르고 땀을 쏟았다. 뜨거웠다. 냉정했다. 사랑을 받았고 상처를 줬으며 키스를 한 입으로 독한 말도 했다.      


서툴렀지만 최선이었다. 할 수 있는 걸 했고 해야만 하는 걸 했으며 꿈꿀 수 있는 걸 꿈꿨다. 어떤 꿈은 봉쇄당했고 어떤 꿈은 두려워 다시 집어넣었다. 어떤 사랑은 애를 써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어떤 사랑은 밤새 내린 폭설처럼 느닷없이 내 일상의 창가에 바특하게 다가왔다.


이제야 보이는 나

우리의 용서와 화해와 깨달음의 순간은 늦게 온다. 때로는 너무 늦게. 돌아보니 나름 전력을 다해 그 시절을 힘껏 살아냈던 내가 보였다. 이것도 안 하고, 저것도 모른 채 어리숙하고 서툴기만 했다고 생각했었던 그 젊은 날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보였다.      


지금이 가을인지 모르겠다. 이 나이쯤 되면 가을이라고 하던데 그런가? 시인의 말처럼 열매를 맺어야 하는 건가? 난 무슨 열매를 맺었나? 보여줄 열매 같은 건 없다. 앞으로도 그런 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힘닿는 데까지 살아낼 뿐이다. 그러고 싶다.


딸의 키는 이제 160센티미터가 넘었다. 어제 오후, 김치를 썰어놓고 보니 넣으려 준비한 통에 넣고도 약간 남을 것 같아 거실에 앉아 있던 딸을 불렀다. 김치 양념이 묻은 손을 보여주며 싱크 대 수납장에 있는 초록색 뚜껑이 있는 유리로 된 반찬통을 꺼내달라고 했다. 까치발까지 했지만 살짝 모자랐다. 무리를 하면 될 것도 같았지만 위험해 보여 얼른 손을 닦고 내가 꺼냈다. “아하, 아직 살짝 모자라는구나. 아직 아빠만 꺼낼 수 있네. 근데, 뭐, 멀지 않았다.”하고 아쉬워하는 딸을 달랬다. 딸은 싱긋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딸의 신체적, 정신적 성숙은 가시적이다. 그러나 중년 남자의 성숙은 자신도, 남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성숙하고 깊은 인간이 됐는지 말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모르는 걸 말할 수는 없지 않나? 그저 어제의 나를 용서하고 오늘의 나에 감사하며 내일의 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딸이 성숙해지는 만큼 내 내면도 더 성숙해지길 바란다. 고요해지길 바란다. 멀리 볼 수 있길 바란다. 누군가의 마음에 평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란다.


이번 편으로 이 브런치 북의 연재를 멈추려 한다. 전체 50편이다. 한글 파일로는 240장이 좀 넘고, 200자 원고지로는 1천5백 장이 조금 넘는 분량이다. 애초에 52주, 52편을 계획했는데,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마감일이 얼마 안 남아서, 이것도 넣고 싶어 우선 마무리한다. 뭐, 큰 기대 없이 참가하는 연례행사 같은 거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내 글 중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을 보내고 싶었다. 자세한 연재의 후기는 조만간 올리려 한다.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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