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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Oct 10. 2024

들고 있는 찻잔을 던지고 싶은 날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48

딸에게 쓰는 아빠의 첫 시

-내 딸이 세상에 오던 날의 풍경     


                                  이승재     


하늘이 맑더냐고!

푸르고 푸르른 오월의 하늘이

헤아릴 수 없이 푸르렀고

꿈꾸는 나무들이 행복에 겨운 얼굴로

쪽빛 바람에 산들거리는 날이었다

엄마 아빠의 가슴 속

희망이 샘솟는 강을 건너

네가 오던 날

기쁨에 넘치는 햇살이

까르르까르르 웃고 있던

오후였다     

네가 엄마 아빠의

사랑으로 오던 날이었다.


낯선 감정

딸이 태어난 후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면 감정의 세기라고 해야겠다. 어떤 감정이든 딸에게 향하고 딸에서 내게 전해지는 건 강도가 달랐다. 딸에게 가는 사랑도, 딸이 내게 보내는 신뢰와 사랑도, 책임감과 두려움도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세기였다.      


딸이 커가면서, 말을 하고 자기의 이름을 알고 나라는 존재를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 생겼다. 딸을 키우기 전까진, 내가 가진 것을 누군가에게 다 줘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누군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어본 적도 없다.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 몰라 전전긍긍했던 적도, 그래서 이러저러한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 애쓴 적도 없다. 내 존재의 해석은 타자의 것이기에, 기억 또한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 생각은 유효하다. 하지만 딸에겐 달랐다.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존재인 아빠라고 부를 때, 처음으로 가치관의 진동을 느꼈다. 다 주고 싶은 사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사람, 없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줄게 없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직업이 좋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다. 화목한 형제자매도 없기에 사이좋은 고모와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를 비롯한 사촌 형제자매를 줄 수도 없다. 고민 끝에 결국, 갖고 있는 재주라곤, 그래도 약간의 돈을 버는 재주라곤 글을 쓰는 재주뿐이니 이걸로 뭔가 의미 있는 사람이 되어 이 아빠를 약간이라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해 주자, 그런 생각에 다다랐다.      


마침, 그 무렵, 후배 하나가 유튜브 채널을 만들면서 함께 영화에 관한 잡담이나 하자고 초대를 했다. 또,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지역의 한 공동체에서 이런저런 강의를 해달라는 섭외를 받아 몇 번의 강의가 이어졌다. 그 잡담과 강의를 위해 쓴 원고를 모아보니 분량이 좀 됐다. 이걸로 일단 책을 내자. 그래서 딸에게 그냥 아빠가 아니라 “작가 아빠”를 선사하자. 그렇게 결심을 했다.       


제 나름 다듬고 편집한 원고를 서울과 지역의 출판사 수십 곳에 보냈다. 그중 딱 두 곳, 지역의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중 한 곳을 갔다. 남포동의 오래된 건물의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출판사여서 제법 힘들게 찾았다. 앉아서 얘기해 보니 원고를 출판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런 원고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얘기나 해보자고 불렀다고 했다. 한 삼십 분 정도 이야기를 한 뒤돌아서 나오는데, 시집 하나를 건넸다. 이름도 모르는 어느 무명 시인의 시집이었다. 파라락 거리며 며칠 읽었다.


내 친구 정근   

  

나보다 매운탕 생선을 잘 발라먹는 친구

나는 아버지 어머니 장례식 때

아버지 어머니 소리치며 목 놓아 울었어도

어머니 장례식 때 울음조차

목으로 삼키던 슬픔 많은 내 친구

면도 안 한 모습 본 적 없지만

구레나룻 턱수염 얼굴 가득 덮고 있는

그만큼 정 많은 사람

안경 너머 경계를 서는 듯한 눈빛

이제야 알 것 같은 세월 이십 년

목젖 뜨거운 삶 삼키지만 말고

뱉기도 뱉으며 살아보자

어깨 축 치고 가는

바람결에나 실어 보낸다


이름과 인생의 무게

시인은 2부 전체를 무명의 사람에게 할애한다. 1부에선 아들과 딸, 아내 이야기를 주로 한 시인은 2부에선 장모, 장인, 친구, 아는 지인과 동료, 시장 상인, 노점상까지 다 불러 세운다. 그 무명의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여 불러내 그 삶을 시의 무대에 올린다. 무심히 지나칠 존재감 없는 사람이고, 잠시 얼굴을 마주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대단치 않은 사람일 터인데 그는 그 이름을 부른다. 시의 무대에 그들을 주인공 삼아 인생이라는 드라마를 펼친다.        


사실, 무명(無名)은 없다. 다만 유명(有名)이 미치는 범위와 정도가 다를 뿐이다. 그 범위와 정도에 따라, 때론 유명은 이름의 주인을 괴롭힌다. 물리적, 심리적으로. 유명은 명성을, 명성은 명예를, 명예는 이름값을, 그리고 이름값은 유명세를, 그리고  분주함과 부(富)를 부른다. 유명의 순환은 그렇게 도돌이표처럼 이어진다. 글을 쓰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유명은 유명을 만들지만 무명은 무명의 순환을 만든다. 무명은 그 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아닌가?     


얼마 전, 자주 가는 중고서점에 누군가 시집을 잔뜩 팔았다. 문학과 지성 출판사의 시집들이었다. 그 시집의 주인인 시인 중 내가 아는 시인은 류근 시인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방송에 몇 번 나왔기에 이름이 익은 것일 뿐, 그의 시를 읽은 적은 없다. 유명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지만 많이 팔리지도 않고 류근 시인처럼 얼굴을 알리지도 못한 시인들은 그 무명의 삶을 어떻게 견디며 살까? 이승재 시인처럼 다른 직업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련만 시를 써먹고살고 있으려나. 무명은, 때론 곤란하다.     

 

다만, 무명에겐 가벼움이 있다. 유명에겐 화려함이 있는 대신 무명에게 이 한 없는 가벼움, 홀가분함이 없다. 유명한 이도, 무명인 이도 그 사실을 안다. 유명을 꿈꾸는 무명인 사람들도 유명을 비추고 있는 화려함이 만든 그 묵직한 그늘을 짐작하고 있다. 그 그늘은 이름이 불러들이는 모든 환호와 시선과 부와 명성의 무게다. 그 무게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책임이라 부를 수도 있으리라.      


앞서 말했듯, 이 무게는 그렇게 살아보지 않아도 짐작될 수 있는 것이다. 유명인도, 무명인도 아닌 범인(凡人), 그러니까 어디에서도, 어느 정도라도 그 이름의 힘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도 가능한 짐작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은 이 두 욕망 사이에서 방황한다. 무명의 한없는 가벼움과 유명의 화려함과 그 뒤에 숨은 묵직한 그늘 사이에서. 그 욕망은 결국, 유명이어서 가능한 일과 무명이어서 가능한 일, 유명이어서 불가능한 일과 무명이어서 불가능한 일이 있기에 발생하는 것 일 테고, 그 가능과 불가능은 가벼움과 화려함, 홀가분함과 묵직함에 기인할 것이다.


무명은 주목받지 않기에 자유롭다. 반면 유명은 그 명성을 가져다준 “무엇”이 만든, 그 “무엇” 때문에 받은 환호와 명성이기에, 그 “무엇”이 틀이 되어 그를 가둘 수 있다. 더불어, 유명엔 범위가 있다. 시대를 초월하고 경계를 뛰어넘는 유명세는 드물다. 안도 다다오처럼 한 영역을 뛰어넘어 모두에게 회자되는 유명한 사람은 드물다는 말이다. 의사는 의료계에서, 학자는 학계에서, 운동선수는 스포츠계에서 명성을 얻고 유지한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이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은 범위와 한계가 없다. 마침 이름 없는 물과 같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00강이라고 하는 건 사람의 이름 지음 때문이다. 이름이 있는 건, 그 이름을 강제로 변경받을 수 있다. 심지어 뺏기기도 한다. 이름 없는 것들만이 영원히 존재하는지도. 불멸의 명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허상인지도. 빗물이 불어나 갑자기 마른땅에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자연스레 주어진 삶을 흘러가는 데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 물론 누구나 다 아는 거대한 강이 되어 강을 끼고 사는 삶과 땅과 세상의 지형과 지세를 바꾸고 싶은 욕망도 있다. 우리는 이 두 욕망 사이에서 널뛰고 있다.


화진포     


들고 있는 찻잔을

던지고 싶을 때 그런 날

날마저 궂어

길 건너 이층 집 옥상 가까이

하늘이 내려오면

화진포에 가고 싶다

대장장이 풀무질처럼

파도는 치고

슬픈 것들 녹여 위안을 얻는

나의 대장간으로 가고 싶다

연착하는 기차처럼 삶은

한 발짝씩 늦게 도착하고

하루 몇 번 내 안에서

바다가 저무는 날

화진포에 가고 싶다

간이역 대합실처럼

흐린 하루의 끝에서

저무는 바다를

오래 보고 싶다.


낙화    

      

봄이 간다   

  

떨어져 누운 저    

 

아픈 것들의     


봄이 간다


살아낸 사람, 남겨진 이야기    

3부에 들어서야 겨우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자기를 둘러싼 사람, 자신을 키워준 사람, 자신의 친구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내게 소중한 이름들을 기억과 함께 끊임없이 소환한다. 무명이지만 내겐 소중한 그 이름들, 함께 한 기억들을 꺼낸다. 때론 상처, 때론 사랑, 때론 후회, 때론 회한이 담긴 그 기억들을, 그 무명과 함께 만든 기억들을.     


무명이든, 유명이든 살아낸 사람에겐 남겨진 이야기가 있다. 벚꽃이 져도 벚나무는 거기 있는 것처럼, 그 벚꽃을 본 사람들은 다음 봄에도 그 꽃을 기다리며 겨울밤에 두런두런 꽃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과 함께 한 이의 마음엔 이야기가 남는다.


살아낸 사람이 생의 저녁을 맞이할 즈음, 그제야 자신을 용서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용서한 뒤에야 풍경이 보이는지도 모른다. 산이 보이고 바다가 보이고 꽃이 보이는지도 모른다. 별 것 없는, 무명의 외진 해변의 바다에서도 깊은 이야기를 건져내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무명이다. <영웅>에서 검객 무명은 왕을 암살하려 했으나 천하의 혼돈을 끝낼 이는 그뿐임을 알고 칼을 거둔다. 그가 왕을 죽여 자신의 복수를 완성하고 천하의 혼돈을 지속시켰다면 그는 유명해졌을 것이다. 그 이름 뒤에 그는 또 뭘 얻었을까?     


딸이 좀 더 커서, 그 나이대의 나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니 만약 같은 학교를 다녔다면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로 우러러봤을 만큼 영리하고 용감하게 자신의 십 대를 헤쳐 나가는 딸을 보면서, 딸에게 필요한 건 “아버지”임을 깨닫고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아버지이기에 그 노릇을 충실히 해주는 것이 우선임을 깨닫고 있다. 물론 여느 아버지처럼 여전히 물려줄 돈도, 땅도, 집안도, 명예도 없다. 그저 사랑을 줄 뿐이다. 딸이 더 나이 들어 삶의 무게에 휘청일 때, 다시 일어설 힘을 줄, 무한정받았던 사랑의 기억만 가득한 유년기를 만들어 줄 뿐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상상한 적도 없고 기대한 적도 없다. 심지어 애쓰고 힘쓴 적도 없는 것 같다. 그저 결혼하여 살다 보니 이런 행복과 마주하게 됐다. 지금은 따뜻하다. 달군 돌로 가득 찬 구덩이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두툼한 고기처럼, 뜨겁게 타오른 가마에서 천천히 식어가는 옹기처럼. 그렇게.


시인은 한 권의 시집을 더 냈다. 내가 알기론 그렇다. 이 시집은 첫 번째 시집으로 2017년 4월 18일에 1쇄가 나왔고, 내 것은 8월 29일에 나온 2쇄다. 저자 스스로 오십이 넘었다고 하니 지금쯤이면 환갑 언저리이겠다. 5학년이었던 시인의 딸은 대학에 갔을 지도. 화진포는 강원도 고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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