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어서 그랬다. 두 번을 해도, 몇 번을 해도 능숙해지길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마음에 생긴 일이니 당연히 무슨 마음인지 안다. 무슨 마음인지 아니 적절한 단어도 떠오른다. 그러나 그 단어를 담아낼 그릇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단어의 앞과 뒤에 놓여야 할 것들이 분명 더 있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고를 수가 없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이 생기기 전까지 너를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 호칭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다. 겨우 찾아 널 부른다. 부른 뒤에 이어갈 인사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 소개를 할 필요는 없다. 우표의 힘을 빌리든, 누군가의 손에 전해지든, 아니면 도둑 같이 몰래 네 책에 편지를 숨기어 네가 나중에 발견하든, 누가 썼고 전했는지는 알 것이기에 소개는 생략할 수 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여전히 인사는 남았다. 인사의 첫 줄은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하다. 마음을 전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종이 몇 장에 쓰인 낱말들로, 그 낱말들이 밀치락달치락 거리면서 만들어낼 의미의 울림이 너에 마음에 닿기를 바란다. 짧은 쪽지부터 여러 장의 편지까지, 마음을 전할 방법은 글과 말뿐이던 시절이 있었다. 말 그대로다. 말과 글. 종이에 써진 글과 목소리로 전해지는 말.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그 마음이 담긴 종이가 전부였다. 그 뒤의 일은 받은 이의 몫이다.
낯설고, 때론 흔한
읽어보면 부끄럽다. 상투적이다. 흔한 표현이다. 시인이 아닌 사람이 시인이 될 수밖에 없는 순간, 시인이 되어야만 하는 순간, 할 수 있는 선택은 상투적인 표현에 기대는 것이다. 꽃가루, 와인, 쪽배, 호수, 아지랑이....... 그러면 어떤가? 전해지면 된다.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어둠이 찾아들어 마음 가득 기댈 곳이 필요할 때”, 그때, 언제나 내가 그대 곁에 있겠다는 약속이다.
“그대”라는 말은 낯설다. “그이”라는 말도 들은 지 오래됐다. 연애할 땐 주로 이름을 불렀다. 한 번도 입말로 “그대”라고 부른 기억이 없다. 편지에서라면 몰라도. 어쩌면 듣는 사람도 그대라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을지도 모른다. 글은 말보다 너그럽다. 참을성이 많다는 것이 아니다. 표현의 농밀함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은유도 허락된다. 돌려서 말하는 것도 용납된다. 상투적인 비유를 가져와 써도 괜찮다. 진심만 담겨 있다면 그 진심이 백 단어로, 열 줄로, 한 페이지로 표현되어도 상관없다.
종이 한 장의 무게는 실로 가볍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의 무게는 가늠할 수 없다. 그 무게를 재어 마음에 품는 건 받는 이의 몫이다. 천 자가 넘는 단어에 담긴 오직 하나의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밤새 설레며 답장을 쓰는 것도 받는 이의 몫이다. 우리는 그렇게 종이배에 가벼운 종이 인형을 실어 냇물에 실려 보내듯 그 가벼운 종이 몇 장에 많은 이야기와 깊은 사랑을 담아 보냈다. 그 종이 위엔 “그대”라는 말이 허락됐다.
편지
김광진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 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 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기나긴 그대 침묵을
이별로 받아 두겠소
행여 이 맘 다칠까
근심은 접어 두오
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 왔음에
감사하오
좋은 사람 만나오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소
이 맘만 가져가오
두 세계의 만남
한 개인은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다. 그 세계를 하나의 우주라, 생태계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한 인간의 소멸은 한 세계의 소멸이다. 우주 하나가, 하나의 잘 돌아가던 생태계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의 삶은 결국 우주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견뎌내고 버텨낸 하루는 우주의 한 귀퉁이를 만드는 힘겨운 작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세한 묘사와 레이먼드 카버가 담담히 묘사하는 어느 하루의 사건은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종종 어떤 이들은 사랑을 세계의 확장으로 이해하곤 한다. 마치 진열장에 전시된 피겨가 늘어나는 것처럼, 슈퍼리치의 차고에 새로 입고된 슈퍼카처럼 연인을 생각할 때가 있다. 너는 내 세계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너로 인해 내 세계는, 마치 식민지처럼 늘어난다. 마치 주체의 제국주의 같지 않나?
사랑은 두 세계, 두 우주의 충돌이다. 그러나 둘 다 파괴되지 않는 충돌, 오히려 한 존재의 성숙과 성장을 돕는 충돌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 사랑 안엔 정중함과 무람함이 공존한다. 섬세한 단장과 육체적 야만이 교차한다. 사랑이 오래될수록 이 공존과 그 균형을 지켜야 한다. 서로에게 예의를 갖춰야 할 때도 있고, 편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도 있다. 가장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야 할 때도 있고, 가장 육체적이고 본능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 속에서 극단을 자유롭게 오가며, 비로소 해방이 된다. 그 해방을 통해 우주가 팽창하듯 우리의 세계가 더 커진다. 나도 그대도.
약간 상투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에겐 나무의 옹이나 대나무의 마디 같은 것이 있다. 맹수가 훈장처럼 몸에 안고 있는 깊은 흉터처럼 저마다의 사람에겐 나름의 성장의 흔적이 있다. 그것은 무언가를, 물리적인 뭔가를 흡수하거나 사들이거나 지배하거나 축적하거나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보내주고 다시 사랑하고 보내고 상처받고 상처 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하고 다시 일어서고 다시 내일을 기대하며 잠들고 눈물을 닦고 애써 미소 짓고, 넘어가지 않는 밥을 국에 말아먹으며 힘을 차린 뒤 다시 살아내면서 얻어지는 무엇이다.
그러니 간다는 사람을 붙잡을 필요 없다. 붙잡는 다고 해서 내 사람이 되지 않는다. 붙잡는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의 사람이 되지도 않고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만남의 기쁨과 처연한 보냄 속에서, 그 환희와 절망을 오가며 성숙해진다.
덕분이다.
사는 건 비굴하다. 우리 대부분은 비굴함을 견디며 살아낸다. 그러니 최소한,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했던 이에겐 비굴함도, 모욕감도, 더 나아가 두려움과 공포감도 주지 말자. 그런 건 이미 피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마치 정글 한 복판에서 마주하는 말라리아모기들처럼. 그러니 부탁하건대, 사랑을 붙잡기 위해, 그 사람을 붙잡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어떤 힘도 사용하지 말자. 물리적이든 육체적이든 위계적이든 그 어떤 힘이든 말이다.
오히려 노래 가사처럼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 왔음에 감사하오.”하고 정중히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 네가 아니었다면 이 지리멸렬한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진즉에 이 삶을 끝냈을지 모른다고 말하며 고마워해야 한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 나 같은 사람을 만나 그대의 삶에 오점이나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려, 하고 오히려 미안해해야 한다.
하고 싶은 말도, 하려 했던 말도 삼키는 것이 낫다. 이유를 말해달라고 조를 필요도 없다. 침묵의 이유가 말이 나오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할 말이 없어서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마지막 인사만 잘하면 된다. 사는 동안 나를 잊고 사시오, 부디 좋은 사람 만나시오, 하고 간곡히 부탁해야 한다. 너에 우주가 평안하길, 내 우주는 내가 어떡하든 지켜낼 테니, 그건 걱정 마시고.......
이형기 시인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하고 <낙화>에서 말했던 건 이런 의미였다.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 내 영혼의 슬픈 눈”이라고 이어 말했다. 시에 나오듯 청춘이 꽃답게 죽듯, 사랑도 그렇게 져야 할 때를 알아채어 단정한 뒷모습만 보이며 사라지는 것이 아름답다.
그렇다. 가사처럼 연서(戀書)를 보낼 때만큼 이별의 순간에도 예의를 갖춰 보내줘야 한다. 날 사랑했던, 내 우주에 새로운 별들을, 그 별들로 이어진 새로운 별자리를, 어쩌면 새로운 은하수를 만들어줬던 그 사람에게 깊이 감사하며 예의를 갖춰 배웅해야 한다. 사랑이 식어 그리 간다면 그 불을 꺼트린 것이 자신이라 여기고, 내 탓을 하며 보내줘야 한다.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사랑을 불러왔던 그 편지에 담겼던 첫 마음처럼 끝 마음도 그렇게 고와야 한다.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그리고 남겨진 나에 대한 예의다.
사족
딸이 보는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우연히 가수 이무진이 진행하는 <리무진 서비스>라는 콘텐츠를 보게 됐다. 주로 젊은 아이돌 가수들이 나오는데, 의외로 그들은 종종 내가 젊은 시절 사랑했던 노래를 부르곤 한다. 유재하와 김광진의 노래가 여전히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 옛 노래들을 딸이 좋아하는 가수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옛 노래들을 들으면서, 그 당시의 노래들은 사랑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만남, 사랑의 고백, 이별의 받아들임 등을 섬세한 단어들로 표현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 아침, 딸과 함께 또 <편지>를 들었다. 리무진 서비스에선 <스테이씨>라는 아이돌 걸그룹의 “시은”이라는 멤버가 이 노래를 불렀다. 참고로 시은은 내 학창 시절 댄스 가수로 이름을 날렸던 박남정의 딸이다. 시은은 2002년 생으로, <편지>라는 노래가 나왔을 땐 태아에 있지도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은의 목소리로 들은 <편지>는 좋았다. 이십 대 여성이 담담히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슬프게 들렸다. 이별의 슬픔이, 한겨울, 뿌옇게 쏟아졌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입김처럼 보였다.
아직 유재하의 카세트테이프를 갖고 있다. 케이스 뒷면엔 1987년 8월 25일 발매됐다고 적혀 있다. 이때, 난 중학생이었다. 가사만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 이 두 노래는 내게 그런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