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도망은 두고 갈 것이 없는 사람만 할 수 있다. 남겨둘 것, 뒤에 두고 올 것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만 할 수 있다. 그게 무엇이든, 도망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 절박하게 다가오는 사람만이 그럴 수 있다. “위험이 느껴질 때, 30초 안에 털고 나올 자신이 없는 것들에는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히트>의 로버트 드니로의 대사는 이 양면성을 함축하고 있다. 아무것에도 미련을 두지 않거나 미련을 두지 않을 만큼 도망의 이유가 절박하거나. 이 두 가지 이유가 충족되는 사람만이 도망을 선택하고 실행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생각하면 결국 도망의 가장 크고 절대적인 이유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도망은 도망가지 않으면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이 상실될 것 같은 사람의 마지막 선택이다. 범죄자의 도망은 마지막 선택의 극단적인 현상이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법적 구속으로부터의 회피다. 처벌과 죄의 무게로부터의 도망이다. 이제, 이런 도망, 극단적이며 사법적인 도망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대신, 노래에 담긴 도망, 그리고 또 다른 도망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러나 다른 종류의 도망, 노래에 담긴 도망의 근본적인 이유 또한 자기 보존이다. 사회와 제도와 돈벌이와 심지어 가족과 학교와 직장으로부터의 도망은 그것들 때문에 내가 죽게 생겼을 때 발생한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를 이 세계에서 “사람”으로 “정상인”으로 살게 했던 그것이, 그리고 그것의 요구에 걸맞게, 아니 우리 스스로 그것이 만든 세계에 맞게 살기 위해 선택했던 “나”와 “나라는 세계”의 무게에 짓눌릴 때 우린 도망을 선택한다.
또, 세계가 <트루만 쇼>에 나온 것과 같은, 그저 “만들어진 인위적 세계”가 아닐까 의심이 될 때, 그래서 그 세계에 사는 나조차 “진짜 내가” 아니지 않을까 의심이 될 때, 그래서 그 세계의 벽 너머에 진짜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그야말로 충동이 있을 때, 우린 도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찾기 위한 도망
이런 도망은 결국 진실 찾기의 여정이 된다. 해리슨 포드와 토미 리 존스가 나온 클래식한 영화 <도망자>와 그 후속 편에 나오는 주인공도, 심지어 <본 아이덴티티>에 나온 제이슨 본의 탈주의 목적도 결국엔 진실 찾기다.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나?”, “진짜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도망치는 내내 반복된다. 숨겨진 진실과 참 나를 찾기 위한 도망의 여정은 그 목적이 완성됐을 때 끝이 난다. 그런가?
영화는 끝이 나지만 인생은 계속된다.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은 마트료시카 인형과 비슷하다. 까면 깔수록 “나”라는 존재의 핵에 다가가는 것 같지만 그 안엔 또 다른 내가 있다. 제이슨 본 시리즈처럼 수많은 여권 중에서 진짜 내 여권을 찾는다고 해서, 진짜 내 이름 하나를 찾는다고 해서 나를 찾는 여정이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앞서 <도망자>처럼 애써 찾은 진실은 오늘의 정답일 뿐이다. 애써 찾는 나 또한 오늘의 나일뿐이다.
세계로부터의 도망
다시, 앞서 언급한, 세계로부터의 도망으로 돌아가자. 노래에서 말한 그 “도망”에 대해서 얘기하자. 이 도망은 회피가 아니다. 죄로부터, 처벌로부터, 구속으로부터의 탈주도 아니다. 그건, 이 노래가 말하듯, 돌아오기 위한 도망이다.
우리는 참 세계와 참 나를 볼 수 없다. 다시 라캉의 표현을 빌리면 “실재”를 볼 수 없다. 인식론적이든, 현상학적이든 우리가 보는 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뿐이며, 우리가 살 수 있는 세상은 우리가 이해가능하고 수용 가능한 “세계”다. 우리는 세계 그 너머를, 상상 그 이상의 그 무엇은 볼 수 없다. 그야말로 죽지 않고서는, 자신이 태어나는 순간을 스스로 목격하지 않고서는, 그 불가능한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해석되기 이전의 나를, 세상에 수용되기 이전의 날 것의 나를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당연하게도, 그 경험을 할 수 없기에 태초의 나는 미지의 존재로 남는다. 부모에게 물어본들, 그들도 답이 없다.
때문에, 결국 도망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우린 그걸 “일탈”이라 부른다. 주말마다 양양과 강릉으로, 부산의 송정으로 서핑을 하러 가는 것도, 멀쩡한 집 놔두고 산으로 강으로 캠핑을 가는 것도, 이 더위에 마라톤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등산을 하는 것도 “도망”이다. 이 도망은 일종의 자기 소멸, 자살의 흉내다. 일상에서, 사회에서 묵묵히 버텼던 “나”를 죽인 뒤, 새로이 부활시켜, 새것의 나를 데리고 세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도망이다.
클럽에서 육체를 일상과는 다른 용도로, 즉 평소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형태로, 쓰지 않던 근육을 사용하여 춤을 추는 것도, 또, 연인이나 심지어 낯선 누군가를 만나 사회 속에서의 나를 밖에 벗어두고 온전히 야만적인 존재가 되어 울부짖으며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도, 마치 즉각적으로 그곳을 떠나라는 본국의 지시를 받은 전쟁이 임박한 지역의 재외국민처럼, 너도 나도 허겁지겁 짐을 싸고 여권을 챙겨 공항으로 나가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라 밖으로 떠났다 돌아오는 것도, 결국엔 어제의 일상적 나의 죽음과 부활을 위한 도망이다. 죽음과 닮은, 부활과 귀환이 보장된 도망이자 죽음.
사랑의 도망
여기 또 다른 도망이 있다. 사랑의 도피 행각. 요즘에도 이런 말을 쓰는지 모르겠다. 예전엔 사랑을 하기 위해서도, 그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도 부모와 가족과 공동체의 인정과 허락이 있어야 했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든 반대가, 특히 부모의 반대가 있으면 그 사랑은 좌초되곤 했다. 좌초되기 싫은 사랑의 배는 항로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가자던 사람이 있었다. 신파 영화가 유행했던 70년대도 아니고, 싸구려 에로영화가 유행했던 80년대 연애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러자는 사람이 있었다. 사랑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유야 분명했고 많았지만 나도, 그녀도 납득할 수 없었기에 도망을 꿈꿨다. 다들 뭐에 홀렸는지 너만 있으면 된다. 내가 먹여 살리겠다. 네가 얼마를 벌어오던 상관없다. 그저 나랑 살자. 내가 원하는 건 그뿐이다. 그랬던 사람이 있었다.
그 도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두려움과 일상이 그 도망의 발목을 붙잡았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 그 도망을 실천했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자신과 도망을 가자던 한 사람은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서로의 사랑이 식어 헤어졌다. 졸업하면 날 먹여 살리겠다며 눈물 콧물 다 빼며 애원하며 날 붙잡았던 사람도 자기 마음에서 사라지고 있던 사랑의 열정은 붙잡지 못했다.
그래서 이 노래 속,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도망”이 지속되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하다. 도망갈 때의 그 마음이 변함없어야 한다. 도망에서 지치면 도망 이전의 삶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지친 이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 막 결혼식으로 올리려던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힘껏 도망쳐서 버스에 올라탄 뒤, 잠시 후, 더스틴 호프만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어긋남에 대한 예감 때문이었다. 반대로,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이 그렇게 끝났던 건, 그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이기도 하지만, 둘 다 돌아갈 집과 일상을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망과 다른 여정들
돌아오는 것이 예정된 떠남은 도망이 아니다. 앞서 말한 주말의 도망은 “도망의 흉내”다. 일종의 도망의 키치라고나 할까? 그런 키치, psuedo event(疑似事件)에는 불안이 없다. 주말에 캠핑을 가거나 원나잇을 하거나 양양에서 캠핑을 하는 동안엔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 떠나온 나를 누군가 잡으러 올 것이라는 불안은 생기지 않는다. 만약 그런 주말을 보내면서 불안하다면 두고 온 곳이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완벽한 곳일지도 모른다.
이런 주말의 “도망”과 비슷한 것이 여행과 순례다. 여행과 순례에는 돌아옴이 예정되어 있기에 불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집 밖을 나서 길 위에 서지만, 그 여정엔 끝이 있다. 목적지에 다다라 순례의 임무를 완수하면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진정한 도망은 이와 다르다. 여행이 일상의 에너지 충전이고, 일탈이 일상의 이면의 돌발적인 노출이며, 순례가 지상의 번뇌를 벗어나 신과 만나기 위한 여정이라면 도망은 그 무엇도 아니다. 진정한 도망의 여정엔 끝이 없다. 목적지도 없다. 사랑의 도피가 그렇듯, <트루만 쇼>의 탈출이 그렇듯, 가슴에 품은 그 무엇이 목적이 될 뿐이다. 그 가슴에 품은 “무엇”이 사라지지 않는 한, 도망은 도망자에게 두려움과 막연함 대신 희망을 선사한다.
탈주의 반복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어떤 형태의 도망이든 반복해야 한다. 궤도에 올라섰다고 생각했을 때 탈선을 생각해야 하고, 머물렀다고 생각했을 때 떠남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가두고 제한하는 무엇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다. 물론 그 도망은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니 실패가 중요한 게 아니다. 도망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영화 <대탈주>엔 “포로에겐 탈출이 권리이자 의무입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진짜일까? 20세기 중반의 유명 남자 배우의 스크랩북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당대의 영국과 미국의 유명 남자 배우-스티브 맥퀸, 찰슨 브론슨, 리처드 가너, 제임스 코번 등이 나온다. 연합군의 남자 포로수용소가 배경인 영화이기에 당연히 여자 배우는 한 명도 안 나온다. -가 나오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이 대사의 진위 여부가 늘 궁금했다. 찾아봤다. 실제로 제네바 협약엔 전쟁 포로의 탈출은 권리이자 의무다.
다시 말한다. 권리이자 의무다. 이 권리와 의무를 짊어진 <대탈주> 속 연합군 포로들은 반복적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개인별, 소대별, 부대별, 국가별로 탈출을 시도하고 잡혀오길 반복한다. 이중, 툭하면 탈출을 했다 잡혀오길 반복하는 스티브 맥퀸의 탈출을 향한 의지는 인상적이다. 그는 잡혀올 때마다 벽에 야구공을 튕기고 잡기를 반복하는 거 외에는 할 것이 없는 독방에 갇힌다. 하도 자주, 많이 독방에 갇혀서 “쿨러 킹”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이후, 연합군 포로들은 장기간 굴을 파서 대대적인 탈출을 시도한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실제 탈출에선 무려 75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중 50여 명이 게슈타포에 잡혀 총살을 당했고 열한 명이 수용소로 잡혀 들어왔다. 본국에 돌아간 군인은 세 명뿐이었다. 이런 비극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하나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
“탈출은 권리이자 의무다.”
도망은 일상을 살아가는, 이 사회에 갇혀 있는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다. 그래서 다시 말하건대, 도망은 반복되어야 한다. 그 반복되는 도망은 매번 새로워야 한다. 마치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처럼, 들뢰즈가 말한 주사위 게임처럼, 우린 반복된 도망, 이 탈주를 통해 오늘의 나로부터 더 멀리, 더 다르게 벗어나봐야만 한다. 물론 갔다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온 나는 떠나기 전 나와는 다른 존재다. 한 번의 도망이라는 전과가 내게 훈장처럼 얹어진다.
물론, 그 후에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스티브 맥퀸처럼 벽에 야구공을 던지고 받는 지루한 일상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 일상엔 도망의 가능성이 웅크리고 있다. 빈 벽과 야구공과의 대화 속에서 도망의 계획이 무르익는다. 아무도 몰라줘도 된다. 동참해 주는 누가 없어도 된다. 트루만처럼 언젠간 멋지게 인사하면서 진짜 나를 찾아 도망하리라.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버틴다. 그렇다. 살아야 도망할 수 있다. 버텨야 도망을 계획할 수 있다.
사족 1.
미국까지 끌려갔던 독일군 포로들도 탈출을 시도했다고 한다. 밥을 너무 잘 줘서 살이 오를 대로 오를 만큼 편한 수용소 생활이었지만 탈출을 시도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경비가 너무 허술했고 담벼락도 그다지 높지 않았기에 그 유혹을 이겨내기가 어려웠던 못한 포로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탈출은 매번 실패했다고 한다. 미군과 경찰이 부지런히 잡으러 다녀서가 아니다. 포로들이 간과했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들이 몰랐던 것은 자신들이 수용된 수용소가 얼마나 외진 곳에 있는지를 몰랐다. 또, 결정적으로 미국 땅이 얼마나 넓은지도 몰랐다. 때문에 탈출을 시도한 대부분의 포로들은 사막과 숲과 황야를 헤매다 제 발로 들어왔다고 한다.
사족 2.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도망가자”라는 말이 대뜸 나와서 놀랐다. 광고는 부정적인 말을 최대한 자제한다. 도망을 다룬 영화라도 예고편에서는 자유를 향한 여정이니, 진실을 찾는 질주니, 하는 말로 대신하여 표현한다. 심지어 다이어트나 변비약조차 비만과 변비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도 빠지지 않는 뱃살과 무한정 반복되는 요요에 대해서, 변기 위에서 힘을 주는 시간과 해결이 안 되어 노랗게 된 낯빛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오직 그 해결 뒤에 찾아오는 기쁨에 대해 말한다. 날씬한 몸매, 가벼운 몸놀림에 대해서만.
결국, 도망가자라는 노래는 처음 이 한 소절로 우리를 흔든다. “괜찮아.”라는 위로보다 더 위로가 되는 한마디가 이렇게 위험한 말일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경악한다. 이 노래는 이 경악스러움에 놀란 우리를 멈춰 세운 뒤, 우리의 등을 떠민다. 잠시, 도망갔다 오라고... 그렇게 갔다 와도 세상 큰일 나지 않다고.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만약 부산에 사는 이라면 훌쩍 동해남부선을 타고 바다를 옆에 끼고 있는 송정역이나 일광역, 월내역에 내려 바다가 잘 보이는 아무 카페에나 들어가 사치스럽게 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리고 오라고. 그렇게 우리의 등을 떠밀고 있다. 잘 갔다 와라. 어디든, 언제든, 누구하고 든, 혼자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