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은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에서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하고 묻는다. 젊은 시절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이 질문이 거만하고 오만하게 느껴진다. 사람이 살면서 누군가에게 뜨거운 대상이자, 동시에 타인을 뜨겁게 달궈 본 경험 한번 없겠나? 누구나 내 나이쯤 되면 가슴 한편에 뜨거운 사랑의 흔적 하나 정도는 품고 살고 있지 않나? 그런 사람이 드물다고 묻는 것인지, 네 사랑은 미지근했다고 책망하는 것인지, 이 시는 이제 알 수 없는 말장난처럼 들린다.
열애의 사전적 정의는 열렬히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만으론 열애가 뭔지 말할 수 없다. 윤시내의 <열애>는 열애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는 것, 그렇게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이 열애라고 말이다. 어떤 가, 그런가? 사람은 화산과 달라서 터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속이 끓어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 사랑하는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끓어오르고 있다. 성격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 끓어오름이 밖으로 넘쳐나기도 하고 그 끓어오른 열기를 가만히 다스려 안으로 되새김질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분출의 양상만으로 사랑이 뜨겁다 아니다 판단하는 건 사랑을 모르는 이나 하는 짓이다.
뜨거운 사랑이 뭔지 모르는 청춘에겐 그 사랑의 전형이 있었다. 멀리로는 <젊은 베르테의 슬픔>과 같은 소설이 그런 역할을 했다. 나에 이모와 삼촌, 그리고 우리 세대는 소설과 시, 영화로부터 사랑을 배웠다. 김홍신, 한승원, 김한길의 소설이 그런 선생 노릇을 했다. 70년대부터는 영화관에 걸리던 신파 영화들도 가세했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전형을 보여줬고 사랑하기에 떠나야만 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로 끝나는 순애보도 보여줬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비 오는 날의 수채화>나 <약속>, <편지>와 같은 영화들을 봤다. 우리도 저런 사랑을 하자 다짐하며, 아니 “우리도 저런 사랑과 다를 바 없는 뜨거운 사랑 아니냐?” 하고 반문하면서. 그 뒤로도 연인과 무수한 사랑 영화들을 봤다. 물론 여러 여자와 한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한 여자와 한 영화를... 그러니까 환승 연애나 양다리, 세 다리는 걸치지 않았다는 말... 그만하자.
열애에 대한 예의
다시 열애 이야기로 돌아가자. 여하간, 열애는 한 사람을 향한 직진이다. 야구로 말하면 포심 패스트볼이고 축구로 말하면 발등에 얹힌 강력한 슛이다. 십 대 시절, 그리고 대학 시절 축구를 할 때 종종 그런 슛을 했다. 속된 말로 맞고 죽어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있는 힘껏 지르는 슛을 말이다. 선수가 아닌 아마추어들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이런 슛을 보면 피하게 되어 있다. 운동신경이 없으면 그마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맞고 쓰러진다. 맞거나 피하거나 둘 중 하나다. 맞겠다고 버틴 사람만이 킥의 고통을 느낀다. 사랑도 그렇지 않나?
사랑은 이지선다형이다. 내겐 그랬다. 썸이니 간을 보니 하는 말은 사전에 없었다. 내 또래 남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젊은 시절의 친구와 동료들이 다들 그렇게 담백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은 이지선다형이다. 비무장지대도, 중립국도, 휴전도 없는 전쟁과 비슷하다. 더 나아가,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랑은 열애다. 온애(미지근한 사랑)나 냉애(차가운 사랑)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 사랑은, 그 유치한 군가 가사처럼 뜨겁게 하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뜨거운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연애가 별 볼일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만큼 한심한 사람도 없다. 그건 모태솔로보다 못한 사람이다. 모태솔로는 자신만 괴롭히지만 과거의 사랑을 폄하하는 사람은 자신과 과거의 연인까지 괴롭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전력이었다. 열애였다.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뜨거운 사랑으로 기억하고 있다. 소중히 그 사랑을 가슴에 품은 채 나이가 들었고 남편이나 아내가 속 썩일 때마다 몰래 회상하며 위안을 받는 그런 사랑이었다. 피부의 윤기는 서서히 사라지고 머리칼은 희어지며 열심히 운동을 해도 근육은 서서히 사라지는 나이가 됐을 때, 다시 뭔가 가슴속 어딘가에서 뭉클하고 뜨거운 것이 샘솟게 하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사랑을 폄하하지 마라. 그 사랑은 당신만의 사랑은 아니니까.
모든 사랑은 열애다.
이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땐 스물아홉 개의 열애일기와 스물한 개의 연가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들어 다시 읽어보니 열애일기와 연가가 다 다른 사람을 향한다고 한들, 그게 뭐 그리 대수냐 싶은 생각이 든다. 뭐, 몇 달에 한 번씩 연인을 바꾼 것이 아니라면 대여섯 개씩 주인이 다른 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이 모든 일기와 연가의 대상이 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접었다. 물론 시인은 오직 한 사람을 생각하며, 한 사람만을 위해 썼을지도 모르지만.
사랑을 여러 번 한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랑이 열애였음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죄가 된다. 앞서 말했듯 자신의 사랑을 폄하하는 건 죄가 된다. 언젠가 다른 글에 썼듯이 과거의 사랑했던 경험을 학습으로 여겨 그렇게 배운 것을 다음 사랑에도 적용하는 것도 죄가 된다. 모든 사랑은 결국, 새 사랑이어야 한다. 연인은 연인에게 숫처녀이고 숫총각이어야 한다. 몇 번의 경험이 있었는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문제다. 모두와 다른 유일한 단 한 사람. 마음은 그렇게 오직 한 사람의 것이어야만 한다. 사랑할 때는 말이다.
마음을 받아줄 사람이 있어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면 살만한 인생이다. 종이에 눌러쓴 편지를 건네면 두 손을 내밀어 살포시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살만한 인생이다. 시인처럼 오십이 넘어 지난 사랑을 생각하며 그 사랑에 관하여 시를 쓸 수 있으면 괜찮은 인생이다. 시를 못 쓴들 또 어떠랴? 우리에겐 추억과 회상이라는 것이 있지 않나? 우리도 한 때 누군가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래 이 새끼야 취해라
혼령같이 우리들 주변을 헤매던
박정만이가 간 지 며칠 뒤였을까
자기의 「달아나는 말」같이
진도 박수 같은 놈 하나가 왔다 쓴 소주 냄새 풍기면서
담뱃갑을 꺼내 들고
형님은 담배 안 태우시오?
그렇다고 했더니
술도 끊었소?
커피도 끊었다는 내 대꾸에
진도 박수 같은 그 사람
그리고 또 무엇을 끊었소?
여자도 끊었다고 했더니
그럼 무엇만 안 끊었소?
소설 쓰는 일만 안 끊었다고 하자
아이고 형님 기호 식품은 다 끊고
이젠 중 다됐구만요
진도 박수 같은 그 사람은 파안대소를 했고
나는 소처럼 소리 없이 웃으며 녹차를 내놓았다
아따, 취하고 싶은 사람한테 술을 내놓아야지
차는 깨어나게 하잖아요
그래 취해라 이 새끼야
나는 그에게 양주병을 들이밀었다.
돌아볼 수 있는 나이
식어버린 연탄재처럼, 열기가 다 빠져나가는 시절이 온다. 그 시절이 온 뒤에야 뜨거운 시절, 혈기왕성했던 시절을 돌아볼 수 있다. 시인은 삼십 대 초반, 치기 어려 저질렀던 일화를 시집 발문에 고백한다. 술에 취해 “발가락에 볼펜을 찔러가지고 갈겨써도 당신들의 시보다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어요.”하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그때 맞지 않은 몰매를 이 시집을 세상에 내놓은 뒤 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맞을 생각이라고 사죄를 한다. 발문엔 그 날짜를 4324년 9월 15일로 적었다. 서기로는 1991년이다. 서른 즈음에 신춘문예에 소설로 당선됐던 이가 쉰이 다 되어 시집을 낸 것이다.
열애일기와 연가가 앞을 장식하고 나면, 그 후엔 나이 들면서 마주친 세상의 변화, 자신의 변화, 타인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다들 그렇듯이, 아니 그래야만 정상적인 사람이듯이 그 또한 나이를 먹으며 반성이 늘어간다. 타인을 마주하고 자신을 돌아본다. 자기 연민과 타자에 대한 연민이 몇 번이고 엇갈린다. 시대의 아픔과 상처가 타자의 삶 속에, 시인의 하루 속에, 누군가의 죽음 속에 묻혀 있다. 시를 통해 헤아려 본 시간의 흐름이 길다. 7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시대를 살아냈다.
소설가로 이미, 속된 말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이 시를 썼다. 시들의 행간에서 알 수 있듯 소설도 마음대로 안 되고 시도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걸 알게 된 나이에 시집을 냈다. 위의 시처럼, 건강을 생각하며 몸에 안 좋은 건 끊고 몸에 좋은 것만 마시면서 마음을 다잡고 글쓰기에 정진해도 나오는 글이 내 맘 같지 않아서 괴로운 날들이 늘어만 간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흘러갔을 것이다. 원래 야망 같은 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되고 싶었던 건 있었다. 재미라면 재미고,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인데 광고홍보학과를 다니면서도 카피라이터를 꿈꿔본 적이 없었다. 그건, 뭐랄까, 너무나 막연해 보였다. IMF가 터져 동기들이 다들 대학원을 피신할 계획을 세울 때, 나도 그 대열에 어떨 결에 꼈다. 상의할 사람이 없어, 훗날 내 결혼식의 주례를 봐주신 기숙사 사감 목사님과 마주 앉았다.
“너 뭐 하고 싶냐?”, 젊은 시절, 논산의 유명한 깡패였던 목사님은 회개하고 돌아서 목사가 되셨다. 그러나 그 풍채와 두툼한 손과 날카로운 눈빛엔 과거, 주먹 하나 믿고 살았던 사내의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목사님의 질문을 받고 잠시 뜰을 들인 후, 지금 생각하면 허황된 꿈을 고백했다. “저 대통령 한 번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뭔 소리인지 더 알고 싶다는 눈빛을 보내셨다. 난 말을 이어갔다. 정치 홍보 일을 해보고 싶다. 국회의원을 만들고 대통령도 만드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목사님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그럼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가라.”, 군더더기 없는 조언이셨다.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갔고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그 길에 닿지는 않았다. 현재, 난 그 시절의 꿈과는 전혀 다르게, 꿈꾸지 않았던 삶을 살고 있다. 그날의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목사님께 죄송스러울 뿐이다.
나이가 들면 뭔가 더 많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민기의 <봉우리>가 말하듯, 어느 지점, 어느 순간, 뭔가를 달성하면 뭔가가 될 줄 알았다. 서른이 넘으면 뭔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마흔이 넘으면 인생이 쉬워질 줄 알았다. 쉰이 넘으면 올라가 있어야 할 곳에 올라가 있을 줄 알았다. 물론 약간 높은 곳에 오른 적도 있다. 그러나 저 노래 가사처럼 그건 그저 수많은 봉우리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박정만은 시인으로, 1981년 5월,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됐을 때 받았던 고문 후유증과 간경화로 1988년 10월 2일에 죽었다. 이날, 서울 올림픽 폐막식이 열렸다. 그 며칠 후, 한승원 시인을 찾아온, <달아나는 말>을 쓴 사내는 시인 송찬호다.
한승원의 딸은 소설가 한강이고, 그의 아들 한규호는 한글을 익히기 시작한 영ㆍ유아라면 꼭 읽으며 글공부에 재미를 붙이는, 그래서 딸도 몇 권이나 읽었던 <받침 없는 동화> 시리즈의 저자이자 출판사의 대표다.
판본을 보니 초판은 1991년 10월 30일에 나왔다. 난 1995년 2월 10일에 나온 재판을, 대전의 문경 서적에서 샀다. 이 해, 난 늦깎이 신입생이었다. 그리고 평생 처음으로 뜨겁게 사랑을 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연애를 했고 매번 최선을 다했지만 늘 후회를 남겼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